양여진 씨는 곧 데뷔 13년차를 맞이하는 중견 만화가다. 학교에 입학할 나이인 일고여덟 살짜리 연년생 아들딸을 두고 있는 주부로서 고된 하루하루를 보내는 동시에 만화가로서의 생활까지도 억척스레 소화하고 있다.
△ [세인트 마리] 표지 이미지
양여진 씨는 1970년 2월 13일생으로 자양초등학교와 광진중학교, 명성여고를 거쳐 경원대 불문과를 졸업했다. 대학시절엔 애니메이터로 활동하다 「풀하우스」의 원수연 씨 화실에서 2개월 수업, 1994년에 『댕기』에서 「호랑이랑」이라는 작품으로 프로 데뷔를 했다. 가톨릭을 믿는 신앙인으로 「일루미나」와 「폼페이 최후의 날」 등의 종교물을 내기도 했고, 「작전타임」, 「컴온」 등의 작품을 거쳐 현재 양여진이란 이름을 가장 널리 알린 작품인 체스 규칙 기반의 초능력물 「세인트 마리」의 연재를 시작한다.
이 시점에 타 출판사 아동지 진출에 따른 견해차로 말미암아 <서울문화사>에서는 작품을 낼 수 없게 되는 일을 겪기도 했다. 다분히 감정 섞인 대응으로, 출판사로서는 명분이 없었다.이후 『비쥬』에서 연재를 시작한 「주희 주리」를 통해 현실성 넘치는 성장·성공 드라마를 보여주었지만 『해피』와 『비쥬』가 폐간을 맞이하며 현재는 두 작품을 모두 단행본으로만 진행 중이다. 다른 건 몰라도 두 작품은 반드시 완결 짓고 말겠다는 의지를 엿볼 수 있지만 출판 만화 시장의 불황 속에서는 실로 쉽지 않은 여정이다.
△ [세인트 마리] 관련이미지
등장인물들은 착하기만 하지 않고, 그저 악독하지만도 않다. 게다가 같은 심리묘사라 하더라도 사람의 근원, 정신적인 부분에 닿아 있는 무언가를 사정없이 건드린다. 같은 장면이라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읽어낼 수 있는 부분이 유난히 편차가 큰 작품이 바로 양여진 표 만화들이다. 하지만 그 부분을 읽을 수 없는 어리거나 단순도식에 익숙한 독자들에에게선 그 부분이 바로 어렵고 불편하다는 반응으로 나타나고 만다. 이해할 수 없는 구도 속에서 자기 속내를 닥닥 긁어내는 감각을 느껴야 하기 때문이다.또한 양여진 씨 작품은 지독하게 현실적이다. 양여진 식 만화가 현실적인 건, 단순히 소재의 문제가 아니라 인물들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에 따른 것이다.
사람의 심정이 흐르고 움직이도 변하는 과정이 결코 단순하지 않음을, 사람과 사람이 서로의 상처를 핥고 다독이고 보듬는 과정이 어떠한지를 세심하게 그려낸다.어떤 아비는 자기 마음 표현할 줄 모르는 중년 그 자체며, 어떤 어미는 자식 놈 혼사길 영영 막힐 줄 알았다가 딱지 뗐다는 소식에 기뻐 어쩔 줄 몰라 한다. 어떤 연인은 서로의 오해가 말이 없기 때문임을 깨닫고, 어떤 소녀는 작은 행복감이 살아갈 힘을 준다는 데에 순수하게 기뻐한다. 지나치기 쉬운 감정들이지만, 실은 그 어떤 멋을 부리지 않는 이러한 면면이 우리 삶을 이루는 근간임을 작가는 잊지 않는다. 그러니 팬터지를 그려도 현실적이고, 학원물을 그려도 현실적인 것이다. 흔히 국내 작품들에 리얼리티 부족 이야기를 종종 하곤 하지만, 진정한 리얼리티는 반드시 ‘현실’을 무대로 삼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양여진 씨는 보여주고 있다.
현재 양여진 씨는 「세인트 마리」와 「주희 주리」의 작업을 진행하며 틈틈이 만화 중심의 대중문화 언론 『만』(http://mahn.co.kr/)을 통해 「The Tragic Kingdom - 비극의 왕국」(이하 「TTK」)이라는 뱀파이어를 소재로 한 옴니버스 만화를 연재 중이다. 「TTK」는 출판사와의 불화와 잡지 폐간을 거치며 지친 양여진 씨가 ‘정말 하고 싶지만 실을 곳을 찾지 못한 이야기’로, 『만』의 자리를 빌려 온라인 공개를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모두 10회 분량의 원고가 올랐다.
△ [The Tragic Kingdom - 비극의 왕국] 관련 이미지
이 작품은 『이슈』 2004년 2월 10일자에 발렌타인 특집으로 실렸던 「My Bloody Valentine」에 등장하는 다섯 흡혈귀들을 중심으로 하는 옴니버스 시리즈로, 영원이라는 시간 속을 헤매는 존재들인 흡혈귀를 소재로 삼아 각 화에 해당하는 시대 배경과 인물 사이의 개연성을 그 어떤 작품보다도 깊이 있게 연구하고 묘사해내고 있다.「TTK」는 창작가가 정말 하고픈 이야기들을 내어 놓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 또 ‘기획 만화’를 대세로 치며 기존 제작 방식을 마치 절대악인 양 몰아세우고 있는 현 만화판 상황에서 창작인으로 자기 작품을 어떻게 준비하고 그려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인물의 개성과 작화의 밀도, 넓고 깊게 깔린 복선이 주는 이야기의 짜임새 등은 단순히 소재의 독특함이나 유행을 좇게 마련인 ‘기획’의 뻑뻑함과는 명백한 차별성을 지닌다.
만화계는 바야흐로 변화를 종용하고 종용받는 혼란기다. 하지만 명백한 사실은, 그 어느 쪽이라고 절대악도 절대정의도 아니며 어느 방법을 써야만 성공할 수 있다는 공식조차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웹툰과 학습만화는 ‘대세’일지언정 태생적인 ‘한계’ 또한 너무도 명확하지 않은가. 양여진 씨는 기존 출판에서도 최근 유행이나 조류를 좇기보다 자기 색깔이 있는 이야기를 자기 방식으로 풀어 온 작가고, 그 점 때문에 일정 체제 안에서 고초를 겪기도 했다.
심지어 독자들에게는 작품 성향에 비해 ‘예쁜’ 그림체로 말미암아 얄궂은 오해를 사기도 한다. 높은 연령대에서는 굵직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낮은 연령대에서는 내용이 쉽지 않다는 이유로 손을 대지 못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중간 지점에서 자기 색깔을 놓고 있지 않다는 사실 자체가 지금에 이르러서는 강점이기도 하다. 적어도 양여진 씨는 자기 작품들을 포기하지 않았고, 시간이 흐르며 그 작품들의 색깔은 누구도 쉽사리 흉내낼 수 없는 부분으로 올라서고 있다.양여진 씨가 방향성에 대한 고민을 멈추지 않는다면, 또 좀 더 장점이자 단점이자 다시 장점일 부분들에 대해 고민하고 연구하는 태도를 버리지 않는다면 ― ‘출판만화’가 어떻고 ‘웹툰’이 어떻고 이전에 지금까지와 같은 작품들을 그려낼 수 있다는 사실이 반드시 빛을 발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