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 된 만화, 산업이 된 웹툰의 길 찾기 : K-웹툰 경제사
아파트공화국에 세워진 웹툰왕국
- 주거와 생활과 여가 등 사회경제적 변화와 함께 한 만화의 경제
로제의 아파트가 경쾌하게 흘러나오고, 프랑스인들이 열광한다. 그 영상을 작은 폰으로 재생되고 있다. 그 영상을 보는 청소년이 있는 곳은 대한민국 아파트의 한 작은 방이다. 그리고 그 아이의 책상은 <나 혼자만 레벨업>을 비롯한 각종 만화의 캐릭터로 채워졌다.
이방인을 놀라게 만들었던 산으로 둘러싸인 흰옷과 초가집의 나라는 전쟁의 폐허를 거쳐 이제 아파트의 숲이 되었다. 그리고 영화와 음악을 넘어 만화와 웹툰으로 세계의 눈을 즐겁게 하고 있다.
신문의 삽화로 시작해 길거리 좌판으로 시작된 한국의 만화는 만화방(대본소)의 시절을 지나 PC통신의 시절을 넘어 글로벌 동시소비의 시대에 어울리는 플랫폼 만화와 웹툰을 만든 것이다.
전 세계를 충격에 빠트렸던 코로나 팬데믹과 언택트 콘텐츠 시대는 이제 엔데믹 시대를 대비하고 있다. 폭력적으로 조정됐던 우리의 일상과 산업은 곳곳에서는 삐걱거리는 움직임과 새로운 충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소음이 달라진 세상이 제자리로 가는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세계를 만들고 있는지 궁금증이 커지고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10년 뒤 지금을 어떻게 평가할까? 지난 2019년부터 2026년까지의 시간은 아마 또 다른 변화, 그것도 한반도가 아닌 전 세계적인 삶이 변화하기 시작한 때로 기억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지금이 위기인가 조정기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앞으로 어떻게 하기에 달린 것이기는 하다.
대한민국의 만화계 역시 다르지 않은 격한 파도를 넘고 있다. 이전의 실패를 그대로 답습하면 ‘위기’가 현실이 될 것이고, 현재의 놀라움을 만든 창의성이 더해진다면 ‘조정기’로 새로운 도약을 맞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전 우리 만화가 걸어온 길을 되짚어본다. 특히 우리가 사는 이 공간과 사회경제의 변화에 한국 만화계가 어떤 영향을 받았고, 어떻게 반항하고 적응했는지를 한번 살펴보고자 한다. 그 변화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어쩌면 지금 우리가 할 일이 보일지도 모르겠다.
근대의 풍경, 생활과 미디어의 예술
만화는 근대에 그 형태가 갖춰진 시각예술이라 할 수 있다. 당연히 근대,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에 한국에 들어와 자리 잡았다. 특히 미디어와 함께 사회적인 정보와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유용했던 시각 콘텐츠였다. 유럽에서 초기 형태가 만들어진 만화는 미국의 신문과 함께 놀라운 성공과 대중예술로 자리 잡기 시작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분쟁까지 겪었던 ‘옐로우키드’와 <호간의 뒷골목 Down Hogan’s Alley>의 이야기는 만화가 그때 어떤 의미였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19세기 미국은 남부 대농장 중심의 농업경제가 붕괴되고 제조업을 기반으로 산업화, 도시화가 진행되는 시기였다. 이민자도 급증하여 당시 뉴욕의 경우, 시민의 75%가 이민 출신이거나 이민 2세였고, 70여 개의 언어가 난무하는 도시였다.’
_ <만화학개론> 권경민, 북코리아
여러 인종이 섞여 살던 당시 뉴욕에서의 삶은 <갱스 오브 뉴욕>과 같은 영화에서 그려지듯 힘들고, 거칠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소통과 위로였을 것이다. 거기에 가장 대중적인 매체인 만화가 파고들었다. 《뉴욕월드》에 1895년부터 연재되던 <호간의 뒷골목 Down Hogan’s Alley>이라는 만화가 대표적이었다. 당시 만화는 사실적인 상황묘사와 재미로 영어를 잘 모르던 이민자들도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있게 해주었다.
“두렵고, 문화도 낯설었습니다. 좋은 직업 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습니다.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습니다. 이주민들은 이질감, 외로움을 느끼며 도시를 배회했습니다. 몸과 마음이 추우면 고향의 온기가 그리워지는 법입니다. 그래서 같은 민족끼리 모여 살았습니다. 그것이 슬럼이었습니다.
<호건의 앨리>는 바로 그 동네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만화 속에는 미국의 현실이 있었습니다. 그 속에서 어른 흉내를 내며 배회하는 슬럼가의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만화는 그 아이들의 시선을 통해 사회를 보았습니다. 대중은 만화에 열광했습니다.”
_ 《세계만화산책》 노랑이 경고를 멈출 때, 강기린
만화는 그렇게 폭발적 인기를 끌었고, 결국 신문사를 옮겨 다니고 진흙탕 같은 분쟁까지 겪을 정도였다. 그런 만화가 일제를 따라, 근대화의 물결을 타고 구한말의 한반도와 미디어에 스며든 것이다.
근대적 한국 만화의 시초로 불리는 이도영의 삽화 역시 1909년부터 1910년까지 대한민보에 게재되었고,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던 <멍텅구리 헛물켜기>는 1920년에 창간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연재된 만화였다. 하지만 1930년대 일제의 탄압과 함께 세상을 풍자하면서 그 존재를 과시하던 시사만화의 전성기는 끝나고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신문, 잡지의 아동, 유머 만화만이 남겨지게 되었다. 만화가 시대에 얼마나 민감한 매체인지를 그 시작 때부터 너무 잘 보여주고 있다.
사실 만화가 유통이 되기 위해서는 볼 수 있는 매체와 그게 유통될 수 있는 장소가 있어야 한다. 원래 조선의 마을에는 집회시설, 공연장 등 공공유흥 장소가 없었다. 모든 사회적 관계 역시 주거 공간이나 그 주변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와 함께 이식된 근대식 문화는 조선 사람들의 생활방식과 습관, 그리고 일상의 문화를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철도가 이 고을 읍내로 놓인다는 소문이 돌면서부터 왜놈이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 어느 틈에 그들은 잡화상을 내고 ‘오뎅집’ 요릿집을 내었다. 왜놈들이 늘어감에 따라 게다짝소리와 왜갈보의 ‘샤미셍’을 뜯는 똥땅똥땅 소리가 행길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귀에까지 요란스레 들리었다. 마침내 철도는 이 고을 경내로 들어왔다.” - <두만강>
소설가 이기영이 <두만강>에서 묘사한 상황들은 당시 개화된 도시와 읍내가 처했던 상황이었다. 지금도 논산의 강경읍에는 그때의 흔적을 볼 수 있는 오래된 건물들이 남아 있다. 한때 강경은 금강 물줄기 위에 터 잡은, 서해로부터 충남북의 깊숙한 내륙까지 연결하는 목이기에 항상 사람이 밀려들었고, 조선 말기의 대표적인 포구 시장으로 평양, 대구와 함께 전국 3대 시장 중 하나로 손꼽혔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마을에서 생활하던 조선 사람들은 그때까지는 보부상과 같은 일종의 방문판매에 익숙해 있었다. 하지만 점차 읍내에서 펼쳐지고 공급되던 소비문화의 편리함에 길들여져 갔다. 읍내는 이제 그전과는 다른 도시생활을 즐기는 장소가 되었다. 집과 마을에서 행해지던 사교, 오락, 휴식, 접대를 위한 기능들은 구락부, 카페, 공원, 요릿집 등으로 옮겨진 것이다. 집안에 갇혀있던 사람들은 자의반 타의반 거리로 나와 그들의 하루에 주어진 상당 시간을 그곳에서 보내게 되었다. 당연히 동네에서 칡 캐고 숨바꼭질하며 놀던 아이들도 읍내 주변을 기웃거리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전기수의 숨넘어가는 이야기에 부모가 넋을 잃고 있을 때, 길거리 좌판에서 빌려주던 만화책에 정신을 빼앗기는 아이들의 모습이 쉽게 상상이 된다. 우라사와 나오키의 <20세기 소년>에서 길거리 좌판으로 행세하던 만조메의 모습이 거기에 겹쳐 보인다. 만조메는 거기서 만화 같은 이야기를 꿈꾸는 소년을 만나고 결국 인류와 지구 멸망에 함께하게 되지 않던가.


만화방 전성시대와 공동주택의 부흥
프랑스의 사회학자인 앙리 르페브르는 도시에서의 일상생활은 근대성의 가치들을 적용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근대의 생활은 공적 생활과 사적 생활이 일정한 시간대로 나뉘고 반복되는 주기적 시간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일상생활에 필요한 삶의 행위들이 상업화, 산업화의 영역으로 이관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전통적인 주거공간의 의미는 퇴색되고, 그곳에는 아주 작은 생활시간만이 남겨지게 된다. 독일의 사회학자인 위르겐 하버마스는 이러한 현상을 '생활세계의 식민화'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즉,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경제체계와 관료행정 체계의 복합성과 강제성이 증대되어 의사소통과 상호 이해를 기반으로 하는 일상생활의 영역이 위협받고 파괴된다는 것이다. 근대의 시작이 읍내에서의 생활과 소비문화로의 이동이라면, 당시는 일제의 폭력만이 아닌 관료와 체계에 의한 일상생활의 식민화가 동시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또 어쩌면 현재까지도 그 식민의 잔재는 우리의 삶에 끈질기게 남아 있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청산되지 않은 문화는 해방 이후 치러진 극단적인 충돌의 폐허 위에 고스란히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후 익히 알다시피 우리는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친다. 당시 가장 시급한 건 폐허 위에 살 수 있는 집이었다. 조선총독부가 1941년 만든 조선주택영단은 해방 이후 대한주택공사로 모습을 바꾼다. 전쟁으로 사라진 주택을 단기간에 복구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공공주택을 대량으로 짓는 방법이 가장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주택영단'이나 '대한주택영단'의 이름으로 건설, 공급, 관리되었던 주택을 모두 영단주택이라고 하는데 부흥, 재건, 희망, 국민주택 등과 같은 이름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서울 교외에만 9~15평 규모의 주택이 표준설계에 따라 수십, 수백 채 단위로 몇 년 사이에 지어졌다.
현재도 청량리 위쪽 세종대왕 기념 공원과 한신아파트 사이에 남아 있는 낡고 오래된 주택가 역시 1950년대 만들어진 대표적인 연립형 주거단지로 부흥주택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곳이었다.



그곳의 집들은 마치 복사&붙이기를 한 듯 똑같은 모양의 이층 주택이 마주 보며 이어져 하나의 골목을 만들고 있다. 농경생활을 기반으로 집과 길과 마을로 이어지던 한국의 생활영역은 이제 도시화, 산업화의 공간으로 이주를 해온 것이다. 그리고 1950년대 말에 이르러 만화노점이 진화(?)되어 만화방이 널리 생겨나기 시작한다.
당시 한국사회는 경제와 부흥이 지상의 과제였다. 국가를 위한 충성의 시대였으며, 또한 대학과 성공을 위한 교육의 나라였다. 세계에 유래가 없는 교육보험이 만들어지고, 방문판매로 집집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과 세계문학전집이 들어갔다.
가정은 사회와 분리되었지만, 아이들에게는 학교의 연장이었다. 새로운 역학관계에 의해 가정에 세워진 질서는 집도 사회의 출세를 위한 준비공간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개인의 일탈과 욕구는 사회적 가치와 체계에 비해 하찮은 것으로 여겨졌다. 아이들에게도 자신들만의 세상이 필요했다. 물론 힘겨운 노동의 세계에 적응해가던 어른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마침 근대적인 동네가 만들어지고, 그 주변에 상가들이 세워졌다. 그 공간 중 하나에 만화방이 스며들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나라에 만화방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1958년 이후로 추정된다고 한다. 원로만화가인 박기준은 독립된 전문점 형태의 만화방이 등장한 것은 1958년 이후에 시작되어 50년대 후반과 60년대 초반에 확산되었다고 증언하기도 한다.


이전에도 만화는 있었다. 박기정, 박기준, 박기당, 박광현, 신동우 등의 작품이 단행본 만화로 출간되었고 많은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 사람들은 힘들어지면 판타지를 찾기 마련이다. 만화는 당시로서는 가장 고급지고도 편한 위로이자 도피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고급 단행본은 만화방의 출현과 함께 순식간에 시장에서 퇴출되고 말았다. 60년대 들어 전국적으로 확산된 만화방으로 인해 만화가 일상적으로 소비되는 구조가 정착되었기 때문이다. 만화방이 확산되자 만화 수요가 확산되었고, 만화 공급을 위해 만화전문 출판사가 늘어나면서 새로운 작가와 작품을 원하기 시작했다. 결국 60년대에 한국만화는 도시적인 생활의 정착과 함께 만화방이라는 소비 구조를 통해 장르 확산을 가져온 것이다. 그런 수요와 장르 확산이 만화의 고급화를 퇴출했다는 만화 같은 아이러니는 이후 계속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주간지와 성인만화 그리고 일일생활권
70년대는 본격적인 경제개발이 시작된 시기였다. 여기저기서 노동이 수출되고, 재건을 위한 자본이 이유를 불문하고 들어왔다. 당연히 국가의 필요에 의한 사회의 이익이 더욱 우선시되었으며, 근대화 과정에서 도입된 '합리성'이라는 패러다임이 더욱 강조되었다. 기존 전통적인 생활에서 행해지는 혼례, 제례, 상례 등의 전통적인 양식은 구태의연한 전근대적 산물로 취급되어 간소화, 합리화 대상이 되었다. 그와 동시에 가정도 분화되기 시작했다. 이제 온 가족이 공유하는 시간은 주말이나 저녁 시간뿐이었다. 사람들은 진부한 일상을 대신할 그 무엇이 새로이 필요했고, 그것은 보통 집 밖에서의 각종 여가생활로 대체되었다.
당시 한국사회의 가장 큰 변화는 가정에는 텔레비전이 본격적인 보급되었고, 사회적으로는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된 것이었다.
1961년 KBS TV를 시작으로 1964년 동양TV(TBC TV), 1969년 MBC TV 등이 차례로 개국하면서 텔레비전 방송이 활성화되었다. 김일 선수가 나오는 프로레슬링이나, 권투처럼 인기 있는 스포츠 경기나 TBC <아씨>(1970), KBS <여로>(1972) 같은 인기 드라마 방영되는 날이면, 텔레비전이 없는 이웃들이 모여들어 함께 시청하기도 했다. 시내 중심가인 명동, 무교동 등의 텔레비전 상가나 백화점 앞으로 수백 명의 인파가 몰려들었고, 변두리 다방 등에도 텔레비전을 보려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1970년 37만여 대였던 텔레비전 수상기의 보급 대수는 1973년 128만여 대, 1975년 200만 대를 돌파했다. 사람들은 보는 것의 즐거움, 시각매체의 재미에 빠져들었다. 사실 만화의 위기를 말할 때마다 라디오, TV, 인터넷 등 새로운 볼거리, 놀거리와 매체가 그 이유 중의 하나로 거론되기도 한다. 하지만 만화는 독자적인 생태계를 가진 듯, 또는 그런 새로운 유행의 천덕꾸러기처럼 항상 그것들에 어우러져 갔다. 다만 문제는 외부가 아니라 내부였던 것이다.
그리고 전국을 1일 생활권으로 만든 경부고속도로는 산업의 시스템은 물론, 사람들의 소비생활 패턴마저도 변화시키면서 고속도로 문화를 활성화했다. 특히, 시각매체의 재미를 알게 된 장거리 여행객들의 유일한 즐거움은 주간지 읽기였다.
1964년 9월 27일 《주간한국》을 시작으로, 《주간중앙》(1968년 8월 24일), 《선데이서울》(1968년 9월 22일), 《주간조선》(1968년 10월 20일), 《주간경향》(1968년 11월 17일), 《주간여성》(1969년 1월 1일) 등이 속속 창간했다. 1970년에는 국내 첫 스포츠신문 《일간스포츠》가 창간되면서 잡지 문화와 함께 성인만화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일간스포츠》의 경우 1972년 <임꺽정>, <수호지> 등 고우영의 극화를 싣기 시작하며 2만 부에 불과했던 발행 부수가 1975년 30만 부로 늘어났다고 한다. 성인만화의 인기를 주도한 《선데이서울》은 1974년 박수동의 ‘고인돌’을, 《주간여성》에서는 강철수가 <청춘의 낙서>를 연재하였다.
신문이나 잡지도 심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지만, 어린이 만화나 만화방용 만화보다는 상대적으로 자율성을 누릴 수 있어 성인만화의 활성화에 큰 역할을 했다. 물론 이후 성인만화들도 단행본으로 출간되는 과정에서는 대대적으로 수정, 삭제 조치는 피할 수 없었다. 사회적으로 만화가 푸대접을 받는 상황은 1970년대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마다 어린이날이면 남산이나 동대문운동장에서 불량만화를 모아 태우는 행사는 여전히 열렸다. 특히 1972년 1월 말 일어난 ‘불량만화 파동’은 특별단속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경찰은 곳곳의 만화방을 급습해 수만 권의 만화책을 폐기처분했다. 그해 10월 유신이 선포되었다.
8090시대의 폭발적 분출과 문화의 르네상스
몇십 년간 경제와 국가에 억눌렸던 문화적 욕구는 1980년대 들어 새로운 변화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정부는 3S[스크린(Screen), 스포츠(Sports), 섹스(Sex)] 정책으로 대중의 환심을 사려했고, 어린이·성인·순정 만화 잡지의 창간과 성공으로 문화와 만화는 ‘르네상스’를 맞게 된다. 이런 변화와 분출의 배경에는 놀라운 경제성장과 사회적인 변화가 함께하고 있다.
특히 80년대 중반 3저 호항을 타고 성장한 한국 경제는 ‘한강의 기적’을 우리 일상으로 끌어들였다.
먼저 주거에 있어서 아파트공화국으로의 전환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동탄의 아파트 단지
사실 인구의 거의 절반이 아파트에 사는 현상은 한국 주거생활사의 가장 큰 변화이지만, 1960년대 말만 해도 아파트는 생소한 단어였다.
해방 후 처음 지어진 아파트는 1958년 준공된 서울 종암아파트였다. 그리고 단지형 아파트의 시작은 1964년 완공되었지만 지금은 재개발되어 사라진 마포아파트였다. 너무도 생소한 아파트라서 처음에는 들어가 살겠다는 입주자가 없어 전체 물량의 10분의 1도 분양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1960~70년대 한국은 2차 산업이 급격히 성장했다. 세계 유래가 없을 정도로 단기간 압축성장을 이루었고, 도시화가 급격히 진전되었다. 농촌에서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들었지만, 땅도 부족한 상황에서 아파트는 그들을 수용할 유일한 해결방법이었다. 거기에 더해 복부인의 활거와 이어진 부동산 투기는 아파트 열기를 광풍으로 만들었다. 아파트 보급률은 수직상승했다. 1970년 0.8%, 1975년 1.9%, 1980년 7.0%, 1985년 13.4%로 급속히 증가한 것이다.
도심에서의 생활과 거주로서의 아파트 그리고 상가의 존재는 문화와 소비의 양상을 변화시켰다.
1982년 10월 창간된 어린이 만화 월간지 《보물섬》의 성공은 이런 변화를 대변하고 있었다. 오로지 만화만 실린 만화 잡지는 이현세, 허영만, 김수정 등 여전히 인기 있는 수많은 스타 작가들의 작품을 선보였다. 그리고 1985년 《만화광장》, 1987년 《주간만화》, 1988년 《만화세계》와 《매주만화》 등 1980년대 중반 이후 성인만화 잡지가 잇따라 창간되었다. 비록 졸속 저질 만화 잡지와 공장형 양산시스템이라는 부작용을 낳기도 하였지만, 이들 잡지는 당시 만화의 전성시대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공포의 외인구단>으로 대표되던 80년대 만화의 전성시대는 장르를 불문하고 장편극화가 큰 흐름을 형성한다. 1960~80년대 만화 속 남자 캐릭터는 가부장적 사고에 입각한 반항적 남성우월의식과 강력한 카리스마 리더십이 구비된 신화 속 영웅상이었다. 이러한 남성상은 한국전쟁, 산업근대화 등을 거치면서 형성된 것이고, 그동안의 사회경제적 변화와 욕구와 맞물려 있었다. 하지만 1987년 민주화 항쟁과 대통령 직선제 등의 변화를 거치면서 1980년대 이데올로기의 시대는 서서히 저물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다양한 문화와 장르가 분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 순정만화도 다시 도약기를 맞는데, 1988년 11월 순정만화 월간지 《르네상스》가 창간되며 현재까지 이어지는 K-감성의 단초를 마련하게 된다. 그리고 1992년 봄 혜성같이 등장한 X세대 뮤지션 ‘서태지와 아이들’ 열풍은 점차 확대재생산되면서 아이돌 문화와 함께 1990년대 사회 전반에 대중문화 트렌드를 혁신한다.
X세대 열풍은 성인만화계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는 순정만화 등 다양한 장르만화의 활성화와 만화잡지의 놀라운 부흥을 이끌어냈다. 한편으로 아파트의 확산과 함께 상가와 도심 중심 문화가 재편되고, 세분화, 전문화되면서 만화방의 숫자는 점차 줄어들기 시작한다.
90년대에 대형 출판사 외에도 독립 서점과 만화 전문 서점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는 2000년대 이후 만화책만을 취급하는 서점들이 증가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특히, 몇몇 서점은 단순한 서점을 넘어 만화 팬들이 모이는 커뮤니티 공간으로 기능했다. 이러한 서점들은 상업성과 예술성을 겸비한 다양한 작품을 소개하며, 독자들에게 새로운 만화를 발견할 기회를 제공했다. 한마디로 당시 만화전문서점은 만화책, 라이트 노벨을 넘어서 애니메이션 화보집, 캐릭터 피규어, 프라모델, 일본 만화 원서 등을 진열 판매하는 등 서브컬처의 성지로 그 역할이 넓히고 있었던 것이다.
홍대 앞 북새통문고와 같이 도심의 문화, 젊음의 문화, 대중의 문화가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만화도 단순 취미와 여가를 넘어 마니아적 문화로 성장하고 있었다.
90년대 후반의 몰락과 웹툰의 화려한 부상
90년대 초반 만화시장 주도권은 《소년 챔프》, 《윙크》, 《이슈》, 《팡팡》 등 과 같은 만화 잡지에게 있었다. 당시 잡지의 성공은 지금 생각해도 놀라울 정도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항상 그렇듯 기회는 위기와 함께 온다. 비록 위기의 요인은 복잡하지만 그 대응과 결과는 의외로 단순할 때가 많다.
90년대 이후 현대 한국사회는 경제적 풍요와 함께 첨단 선진사회로 나아가는 길목에 있었다. 정치적 민주화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해 주었고, 기술의 발전은 개인의 일상을 크게 변화시키고 있었다. 또한 사회가 다변화되면서 알아야 할 것도, 해야 할 것도 더욱 많은 바쁜 일상으로 변화하면서 주거 공간, 특히 아파트는 베드타운이 되어갔다. 그리고 가족 이외에 나날이 새롭게 형성되는 사회적 관계망은 더욱 복잡해졌으며, 과거 이웃 간, 그리고 친족 간 행해졌던 교류의 일상을 대신하게 되었다.
가장 중요한 곳으로 인식되었던 거실공간이 약해지고, 가족 구성원들은 각자를 위해 마련된 개인공간에서 시간을 보내거나, 컴퓨터, 전화 등의 등장으로 집 밖의 사회적 영역과 직접 소통하게 되었다. 마침 2000년의 1인당 주거면적은 1970년과 대비 거의 세 배가 늘어났다.
그렇게 도심과 주거가 분리되고, 도심에는 다양한 놀거리와 즐길 거리의 문화가 본격화되고 있었으며, 주거는 인터넷과 단단해진 개인영역으로 마치 성처럼 구축되고 있었다. 그때 한국만화의 침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 요인은 여러 가지였고, 복합적이었다. 만화방 중심의 문화와 공장형 시스템에 따른 질적 저하, 무분별하고 근시안적인 일본만화의 수입으로 높아진 눈높이와 유통망의 변질, 아이돌 등 대중문화의 발전 그리고 ‘청소년 보호를 위한 유해 매체물 규제에 대한 법률안’(아청법)과 IMF 경제위기 등이 대표적인 원인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특히 1996년 한나라당(현재의 국민의힘)이 발의해 이듬해인 1997년 7월 1일 발효한 소위 ‘아청법’은 1990년대까지 한국 만화가 응축하고 있던 가능성을 통째로 무너뜨리는 악영향을 끼쳤다고 평가되고 있다. 이 법의 가장 큰 문제는 심의 기준이 모호했다는 점이다. 아청법은 자녀 보호라는 명목을 앞세운 여론을 발판으로 삼아 당시로써는 다양한 명목으로 규제의 칼을 휘두르기 너무나 좋은 환경을 보장한 것이다.
당시 한국만화를 대표하던 이현세 작가의 소환과 동시에 발표된 ‘유해 만화’ 목록은 1,700여 종 510만 권으로 7월 23일 수색영장 하나 없이 압수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7월 31일에는 다양한 색깔의 격주간지 《미스터 블루》, 《빅점프》, 《투엔티 세븐》 등이 발행이 중단되기에 이르렀다.
거기에 불법 복제 만연과 만화의 경쟁력 상실로 인해 만화의 생태계가 급격히 붕괴되었다. 놀라운 성공과 수요의 폭발에 만화계는 공장형 양산과 일본만화의 수입으로 대응하였다. 독자들의 눈은 높아지고, 작품의 질은 떨어져 갔다. 게다가 2000년대 초반, PC방과 인터넷 보급이 확산되면서 온라인은 만화의 주요 독자를 위한 새로운 놀이와 문화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IMF 사태라고 불리는 외환위기와 경제침체가 이어졌다. 실업은 증가했다. 실업자들은 상가 도서, 비디오 대여점에서 비디오와 만화를 빌려 아파트에 마련된 개인의 성에 틀어박혔다. 거대한 군집체인 아파트는 철저히 개인적인 공간을 보장해주었다. 만화방에서 라면을 먹으면 밤을 새우던 청춘이 이제 집에서 PC를 보거나 마우스로 웹소설이나 채팅 또는 만화를 보면서 홀로 밤을 지재우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렇지만 그때 현장에 있었던 이들은 문제의 원인이 상당히 단순했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산업적인 실패였다는 것이다. 만화산업을 질적으로 선도할 편집자나 작가와 같은 인재를 육성하여 고도화하는 게 아닌 이윤의 극대화를 위해 수공업적인 유통 시스템에 기반을 둔 초기 공장형 모델에 집착했다는 것이다. 그게 한계에 도달하자 외부, 즉 일본의 만화에 기대어 위기를 돌파하려고 했고 그게 바로 전체 한국 만화계의 몰락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어쩐지 최근 만화와 웹툰 관련 토론회에서 발표되는 위기에 대한 분석과 참으로 유사하다는 게 놀랍다.
어쨌든 90년대 중후반부터 한국의 만화웹툰계는 몇몇 작가의 개인적인 발전과 인터넷 문화의 발전에 따른 새로운 미디어의 형식이 개발될 때까지 거대한 침체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그리고 그 침체는 2003년 다음 ‘만화속세상’ 서비스와 이어지는 포털 웹툰의 연재 시스템 도입 그리고 그해 10월 강풀의 <순정만화>와 함께 시작된 웹툰의 시대까지 이어진다.
그 뒤로 20년의 시간이 지났다. 웹툰은 이제 국내를 넘어 글로벌시장에서 주목받는 매체가 되었다. 웹툰의 성장은 인터넷 환경의 급속한 도입과 10여 년간 새롭게 구축된 웹툰의 세로스크롤 미학 그리고 오랜 기간 축적되고 자연스럽게 형성된 유연하고 독특한 한국적 스토리텔링의 힘이 큰 역할을 했다. 다만 그 성장에는 내부적인 요인만 작용한 게 아니었다.
2019년 초부터 시작한 COVID-19(코로나) 감염병으로 인해 시작된 경기 침체와 언택트(untact)의 시간과 ‘코로나 블루’라는 글로벌을 휘감은 감정적인 피폐함이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게다가 한국사회뿐만 아니라 글로벌 문화산업은 거대한 세대교체의 흐름에 빠져들었다. 이는 새로운 소통방식과 함께 다양하고, 젊은 세대 친화적이며, 온라인 친화적이며 위로와 환상을 제공할 콘텐츠를 필요로 하게 된 것이다.
다만, 위에 잠시 언급했듯이 이전 만화의 전성시대는 항상 위기와 함께 찾아온다. 그리고 그 위기에 대응하는 외부적이고 근시안적인 대책은 결국 오랜 기간 이어지는 침체를 현실화시킨다. 그 내용과 방식이 마치 때가 되면 찾아오는 혜성처럼 비슷한 내용과 모양으로 나타나고 있음이 놀라울 따름이다.
자본주의는 한때 얼마 가지 못한 경제와 정치의 체제로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몇십 년 주기로 나타나는 거대하고도 근본적인 문제를 항상 새로운 대응과 그 시대에 가장 적합한 내부적인 조절장치를 통해 해결하고는 했다. 그 문제해결의 방식은 또한 자본주의의 목표와는 다른 창의적인 면을 보이기도 한다. 포드시스템을 보완한 유연생산체계나 벤처 열풍 그리고 플랫폼 경제 등이 대표적이다.
한국 만화는 웹툰이라는 새로운 문화상품이자 브랜드를 만들고 키워왔다. 이는 한국의 사회경제적 변화와 자신이 가진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가능해진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급격한 고양과 함께 찾아온 새로운 환경과 경쟁의 심화에 따른 위기는, 위기 자체가 아니라 이전의 실패와 비슷하게 대응하는 모습 자체에 대한 경고가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과연 우리는 지난 역사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또 지금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외부만 보는 시선을 돌려 한번 내부와 지나온 길을 돌아봐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