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 된 만화, 산업이 된 웹툰의 길 찾기 : K-웹툰 경제사
삑사리의 미학과 스타일은 어떻게 경제가 되는가?
- 질기고 신명 나는 아름다운 K-스토리텔링과 웹툰의 미학과 언어
탈춤부터 인형극까지 한국 전통 콘텐츠에는 우리의 삶과 문화와 스타일이 담겨 있다. 단정한 아름다움과 절제미 그리고 섬세한 정을 은근히 보여주다가, 모든 걸 풀어내는 신명과 노골적이고 쉬지 않는 풍자와 해학을 가차 없이 날리며 웃음을 만든다. 이 부조화의 조화는 칼군무와 떼창의 케이 팝을 넘어 ‘코리안 삑사리’로 불리는, 글로벌 관객을 감동하게 하는 한국만의 스토리텔링이 되고 있다. 그리고 유산의 현대적이며 산업적인 적용과 독특한 시각적 연출 미학으로 만든 브랜드가 바로 한국이 종주국임을 외치는 ‘웹툰(Webtoon)’이다. 재기발랄한 상상력, 융합과 유연성을 담아내는 쫓아올 수 없는 (창작, 연재의) 속도, 이를 조화하는 절제의 미덕과 가볍게 튕겨 나오는 나름의 스타일이 바로 웹툰의 형상이다. 이는 글로벌에서 동시적으로 이루어지는 가치소비의 시대에 가장 적합한 교환가치를 만드는 콘텐츠로 자리매김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놀라운 성공에 환호하고 축배를 들고 있지만, 사실 이제 시작인 산업이며 예술이라 할 수 있다. 오히려 과제와 난관이 시시각각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는 게 현실이다. 자신을 잘 알아야 다음으로 전진하거나 위기를 넘기기가 쉬운 법이다. 우리의 그 여정 속을 관통하는 몇 가지 키워드로 우리만의 모습과 특징 그리고 장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part 01. 한국만의 스토리 미학과 특징, 그 유연함과 쿨함의 묘한 경계와 역사


<기생충>과 <헤어질 결심> 그리고 <오징어게임>은 전 세계 팬들의 환호를 불러왔다. 영화 속 대사처럼 “다 준비되어 있구나” 싶은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자연스럽게 풀어내는 스토리와 연출은 확실한 결과물의 차이를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외 문화산업 관계자들이 자주 하는 이야기가 있다.
첫 번째가 ‘코리안 삑사리’다. 생각도 못 한 지점에서 터져 나오는 반전과 코미디는 진한 여운과 어쩔 수 없는 웃음으로 사람들을 매료시킨다는 것이다. 그리고 놀라운 가성비와 속도전이다. 일주일에 풀 칼라 100컷을 주간 연재할 수 있는 작가는 오로지 한국에만 있다는 게 정설이다. 여기에 적응력과 유연성도 어디에 내놓아도 부족하지 않은 우리 민족만의 경쟁력이다. 해외 인력수출이나 삼각무역 등의 성공을 말하지 않더라도, 가장 먼저 인터넷을 활용한 웹툰 미학과 산업의 창출이라는 성과는 그 특징을 빼놓고는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거기에 우리만의 정서적인 특징과 이야기 능력을 꼭 더해야 할 듯하다.

예전 7~80년대 초까지 판소리는 방송의 스타 콘텐츠였다. ‘조상현’이라는 대단한 명창이 풀어주는 사설과 판소리는 당시 우리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그중 <흥부전>이 있다. 거기서 동생 흥부가 형 놀부 집에 가서 형수에게 부탁하다가 밥주걱으로 뺨을 맞는다. 사람들은 마치 자기 일처럼 분노하고, 슬퍼하며 부끄러워했다. 그런데 흥부는 뺨에 붙은 밥알을 떼먹으며 다른 쪽 뺨도 때려달라고 요청한다. 그 구질구질하고, 비굴하면서도 후련하기도 한 웃음은 바로 ‘한’과 ‘정’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와 길거리 마당놀이와 탈춤놀이의 적나라한 풍자와 해학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우리만의 웃음이었다. 거기에는 또한 온갖 전쟁과 폭정에 시달리면서도 꿋꿋하게 살아온 우리의 끈질긴 지혜가 담겨있다. 보면 우리의 놀이와 이야기는 주고받는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의 전통연희는 마당놀이처럼 바로 앞에서, 소위 ‘애드리브’라 불리는 즉흥연기와 사람들의 반응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쫓아가는 말 잔치를 통해 웃기고, 울리는 공연을 만들어냈다. 정해진 각본은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줄기이고, 그 결말은 장터에 모인 관객들도 대부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매번 새롭게 변주되는 상황과 재미는 또다시 놀이판에 사람이 모이게 만드는 힘이자 원동력이 되었다.

영화 <공공의 적>에서 마약반에 새로운 반장에 살벌한 분위기로 점검이 시작되었다. 그 불편하고 불안한 순간 강 형사(설경구 분) 자리의 서랍을 열었을 때 “또로로로록” 굴러 나오는 육각형 모나미 볼펜은, 분노했던 형사반장과 불안해하면서 지켜보던 관객들에게 어이없고도 진한 웃음을 한바탕 선사한다. 이런 웃음의 연출은 서민의 감성과 상황의 정밀한 준비와 캐릭터와 서사에 필요한 정보를 예측할 수 없게 보여주는 재미에서 비롯된다. 특히 우리 민족은 이야기를 사랑한다. 당대의 스타로 대접받던 이야기꾼인 전기수도 그렇고, <정년이>로 재조명된 여성 국극단의 인기 그리고 70년부터 안방을 점령했던 <여로>와 같은 드라마는 거의 세계 최고 수준의 스토리텔링을 완성했다고 이야기한다.


그렇지만 한국의 스토리는 선이 분명하다. 권선징악이 너무 명확한 설화라고 이야기하고, 가끔 악에 대한 처벌이 <장화홍련전>과 같은 고전 동화에서 너무나 무섭고도 처절하게 그려지지만 대부분 우리의 풍자와 해학은 적나라하지만, 선을 넘어가지 않는다. 사람의 마음에 기대는 감성적인 접근과 변주는 어떤 면에서는 일본과 유사하다. 여운과 감성 그리고 시각만으로 감성을 전달하는 건 일본도 한국도 선호하는 방식이다. 일본에서 만들고, 한국에서도 놀라운 인기를 끌었던 <쉘 위 댄스>의 묵묵한 중년 남자의 감성이 할리우드로 넘어가 엉덩이 가벼운 설명조의 신파로 변질된 장면이 바로 그런 차이를 보여준다.
롤랑 바르트는 일본을 여행하면서 <기호의 제국>(산책자)이라는 책을 남겼다. 거기서 그는, “나에게 동양은 그 자체로서는 무관심의 대상”이라면서도, “동양은 일종의 특질들만을 제공하여 내가 그 특질들을 조작(창조적 상호작용)해서 서구의 특질과는 전혀 다르고 들어보지도 못한 상징 체계의 개념을 ‘즐기게’ 해줄 따름”이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다른(낯선) 나라의 낯선 언어를 들으면서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다른 공식과 다른 문법으로 우리의 ‘실체’를 해체하는 것”이며, “우리 안의 서구적인 것은 무엇이든지 흔들리게 되고 ‘모국어’의 권리마저 위협하게” 될 것이라 말한다. ‘언어’라는 것은 비교하고, 해체를 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을 통제하는 시각언어와 그 체제는 그 나라를 다른 나라와 구별하게 하는 가장 큰 특질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동양과 서양, 또 한국과 일본이 또 다르다. 한국의 감성은 일본의 심리적인 접근과 같이 깊이 들어가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걸 보더라도, 외면하고 이해하고 다독거리는 걸 더욱 선호한다. 한국 마니아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끌어낸 <에반게리온>이지만, 이카리 신지가 보여주는 극단적인 감성과 일탈은 우리의 콘텐츠와 정서에서 그다지 환영받지는 못하는 게 그런 이유라고 생각된다. 게다가 우리는 무(貿)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것보다, 있는 것을 변주하고, 스타일을 더함으로써 편하고, 속도감 있게 구현해 내는 것에 더 재능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특히 한국의 신세대들은 민주화의 경험을 온몸에 두른 부모 세대와의 소통과 충돌, 그리고 새롭게 출현하는 놀라운 문화의 세례와 기술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독특한 감성과 스타일을 만들고 있다. BTS에 열광하는 소녀 팬이었다가, 대통령 탄핵 때 BTS 응원봉을 흔들며 키세스 소녀가 되는 걸 마다하지 않고, 남태령에서 농민과 함께 밤을 지새우는 것이다. 마치 양극단처럼 느껴지는 상황과 장면을 아무 거리낌 없이 소화하고, 가볍게 SNS로 소비하고, 또 다음날 친구들과 카페를 가서 수다를 떤다. 그런 재기발랄하고, 예측할 수 없고 해맑은 감성은 그대로 콘텐츠와 현대의 우리 시각예술에 스며들어 있다.


모든 국가와 세대에 문제가 되었던 ‘학교 폭력’을 보자. 비록 극단적인 예를 보여주는 웹툰들도 있지만, <아직 제목 없음>과 같은 웹툰은 해맑은 고통과 회피를 보여주며 한국적 정서와 스타일의 일단을 보여준다. 학교는 누구에게나 추억의 장소이자 눈부신 감옥이며 자기 발견의 공간이다. 그래서 어떤 이에게는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지만, 또 어떤 이들에게는 생각하기도 싫은 기억이기도 하다. 공통적인 것은 가장 놀랍고도 인상적이며 강렬한 시기라는 사실이다. 세대에 따라 다양한 제목과 이야기로 <여고괴담>과 <학교> 시리즈가 지속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최근에는 그 묘사와 충격이 더욱 강해지기는 했다. <말죽거리 잔혹사>(2004)로 시작한 2000년대는 <외모지상주의>(2014)나 <지금 우리 학교는>(2028~2029/2022 드라마)과 <더 글로리>(2023)와 같은 이야기로 학교를 그리고 있다. 학교는 폭력과 괴담과 좀비의 가장 좋은 이야기 배경이 되어버린 듯하다. 정말 우리에게 학교와 청춘은 그런 시간이고, 공간일까? 아프니까 청춘이라 했던가? 청춘이니까 아픈 것이기도 하다. 자라는 청춘이기에 절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도저히 답이 없을 것 같은 막막함과 답답함이 머리와 가슴을 온통 지배하던 시기이다. 또한 그렇기에 누구보다 뜨겁게 바라보고, 열심히 덤벼들고, 낄낄거리며 관계를 배우고, 비웃으며 자신을 지키는 법을 배운다. 조숙할 정도로 성숙하지만, 또 천진난만하고 따뜻하기도 하다. 그래서 OTT의 범람하는 콘텐츠와 글로벌 경쟁에서 좀 더 자극적인 소재와 스토리가 더욱 인기를 끌고 있지만, 왠지 <아직 제목 없음>과 같은 해맑고 뻔뻔하면서도 감성적인 웹툰이 보다 우리의 스타일에 더욱 맞는 것처럼 느껴진다. <아직 제목 없음>(네이버웹툰, 주영현)의 시작은 상처 많고 답답한 여고생의 방과 불편한 잠자리다.
“처음엔 다시 잠들기 위해 계속 눈 감고 누워 있어도 봤지만, 오라는 잠은 안 오고 생각만 많아져서 더 고통스러웠다.”
“다 귀찮다. 대충 버티다 보면 알아서 끝이 나겠지.”
가슴 속 깊이 묻어두었던 감정이 툭툭 던지듯 맑은 그림 사이를 채운다. 내 마음 깊은 곳에 보관하고 있는 심리를 해부하듯이 날카롭게 끄집어내며 알지 못하는 소녀의 감정에 다가가게 된다. 그렇지만 더욱 막막하고, 어두울 것 같은 학교에서의 하루는 ‘역시’라는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유쾌한 독백과 해맑은 대사로 채워진다.
“잠만 잘 거면서 학교는 왜 이렇게 일찍 오는지 참… 독특하다고 해야 하나.” 아침에 마주친 선생의 독백에 소녀의 내면이 한마디도 지지 않고 대답한다.
“일찍 와서 자고 있으면, 아무도 마주치지 않아도 되니까.”
“외롭다. 외롭긴 하지만, 대신 자유롭다.”
“혼자 있는 건 용기다 … 라고 나 자신을 포장해 본다. 사실 그냥 부적응자일 뿐이지만. ㅅㅂ 나도 좀 살자.”
자신에 대한 솔직한 관찰과 쿨한 감성은 위태롭지만, 절대 무너지지는 않을 것 같은 희망과 편안함을 만들어주기도 한다.
“매일 새롭게 외롭고 매일 새롭게 무안하다.”
“우울한 내 삶의 한 줄기 빛. 이 거지 같은 학교생활을 버티게 해주는 한 남자. 나의 히어로.”
“보고 있으면 나에게도 아주 조금쯤은 희망이 생긴다. 그래! ‘너 같은 애도 사는데!’ 하고 말이다. 미안, 너한테 미안하지만 나도 좀 살자. 이렇게라도 좀 버틸게.”
“은밀한 나의 취미. 아니 악취미. 같은 반 구준희 관찰. 덕분에 나는 관심 학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너의 그늘에서 편안히.”
소녀의 세밀한 관찰은 이성에 관한 은밀하고도 아름다운 관심과는 조금 다르다. 그렇지만 그 반응에 어쩔 수 없이 헛웃음이 터져 나오고, 킥킥거리는 박수가 절로 쳐진다. 참으로 세밀하고, 가차 없는 관찰 그리고 숨김없는 내면의 독백과 응원 아닌 응원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토록 뻔뻔하고, 해맑게 고통과 회피라니. 아마 이런 해맑음과 결코 어둠에 빠지지 않는 우리만의 감성이자 스토리텔링이 그대로 이어진 듯한 느낌이다. 사실 우리는 어떤 면에서 항상 어리고, 또 어떤 면에서는 성숙했지만, 격정적이고, 조절이 안 되면서도 냉정하고 쿨한 청춘이다. 그러다 보니 상처받고, 반항하거나 ‘회피’를 한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하지만 즐길 수 없다면 미루고, ‘회피’하라! 봤지만 못 본 척, 있는데 없는 척, 심리학에서는 이런 행동을 ‘회피행동(Avoidance Behavior)’이라고 한다. 회피행동은 위협이 되거나 어렵다고 판단하는 상황이나 대상, 생각 등을 피하거나 관여하지 않는 것, 또는 이미 개입한 상황이나 대상으로부터 떠나는 것을 의미한다. 트라우마를 경험한 사람들에게서 이런 회피행동이 더욱 두드러지는데, 나를 힘들고 아프게 하는 것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안전함을 확보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기 때문이다. 이런 회피행동은 더 큰 갈등이나 문제를 유발할 수 있는 상황에서는 얼마간 도움이 된다고 한다. 그러나 장기간 지속되면 습관화될 수 있고, 자신을 주변으로부터 고립시키고 더 많은 기회와 경험을 차단할 수 있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어려움이다. 그렇지만 누가 ‘천희’와 ‘준휘’에게 ‘회피’를 멈추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도 좀 살자!”라는 어울리지 않는 듯 던진 천희의 한마디는 ‘회피’하면 어때? 하는 뻔뻔함이 너의 잘못이 아니라는 풍자와 위로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낄낄거리면서도 응원하는 것이다.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풍자하지만, 결코 그 상처를 결코 회복하지 못하게 계속 해부하지는 않을 것 같은 기대, <무한도전>의 형제들이 서로를 마음껏 배신하고 뒤통수를 치지만 결코 악의로 끝나지 않고 웃음으로 마무리될 것 같은 마음의 기대와 편안함이 있는 것이다.

이는 SF와 같은 독특한 장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궁벽했던 한국의 SF 장르지만, 2010년대 후반을 맞아 3세대 SF 작가들과 함께 약진하고 있다. 이미 드라마와 영화로 진출한 <보건교사 안은영>의 정세랑 작가부터, 10만 부가 넘는 놀라운 판매량을 올린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의 김초엽 작가 그리고 뮤지컬 등 다양한 분야로 확장되고 있는 <천 개의 파랑> 천선란 작가 등 SF 문학은 새로운 시대를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이런 감성과 서사는 이미 1980~90년대 순정 만화부터 이어져 오고 있다. 강경옥 작가의 <별빛 속에>(1987~1990)와 <라비헴폴리스>(1989~1992), 김진 작가의 <푸른 포에닉스/외전>(1988), 김혜린 작가의 <아라크노아>(1992)와 신일숙 작가의 <1999년생>(1992)을 비롯해 원수연 작가의 <휴머노이드이오>(1992~1993), 이미라 작가의 <남성해방대작전> (1997), 황미나 작가의 <레드문> (1994) 등을 고유의 팬덤과 함께 한국 SF의 경쟁력을 유지해 왔었다. 그리고 그때의 작품과 현재의 SF는 논리와 이성보다는 감성과 정에 더욱 끌리는 한국의 SF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서구의 것에 비해 덜 냉소적이며, 개인을 중심에 놓는 영웅주의보다는 집단적 생존과 화해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결국 오랜 기간 이어지고 축적된 현장성과 유연성, 독특한 절제에서 튀어나오는 예측 불가능성과 디테일한 감성이 바로 한국만의 스토리텔링으로 현대에 완성되고, 인정받고 있는 것으로 느껴지고 있다.
part 02. 웹툰만의 연출 미학은 새로운 언어인가? 기술적 콘텐츠인가?
이제 스토리 속 한국적인 감성과 유연성은 미학과 미디어의 변화까지 이끌고 있다. 한국의 웹툰은 모바일 환경의 '세로 스크롤' 포맷을 통해 만화의 본질을 '페이지'라는 공간 예술에서 '시간' 예술로 전환시킨 혁신적인 발상과 변화를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독자적인 연출 미학은 글로벌 콘텐츠 시장에서의 강력한 경쟁력이자 성공의 이유로 작동하고 있다.


웹툰 연출 미학의 독자성, 웹툰의 미학은 ‘시간’의 예술이다
단순히 종이 만화를 디지털로 옮긴 형식이 아니라, 만화를 ‘공간의 예술’에서 ‘시간의 예술’로 전환한 혁신이라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일단 페이지를 넘기던 감각이 세로 스크롤로 대체되면서, 웹툰은 세로 스크롤 속에서 시간의 흐름을 연출하는 새로운 서사 양식으로 조금씩 진화한 것이다. 독자는 더 이상 ‘한 장면을 보는 독자’가 아니라 ‘시간을 체험하는 독자’가 된다. 이 변화가 바로 웹툰이 일본 만화와 미국 코믹스와 구별되는 핵심 미학이다.
만화의 미학은 단순히 그림체나 스타일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매체가 무엇을 가능하게 하고, 무엇을 제한하는가가 각국 만화의 미학을 규정한다. 즉, 일본은 종이의 공간, 미국은 페이지의 순간, 한국은 스크롤의 시간 위에서 각기 다른 서사 리듬과 미적 언어를 발전시켰다. 일본·미국 만화와의 비교를 통해, 웹툰이 어떻게 독자적인 ‘시간의 미학’을 구축했는지를 살펴보자.
일본 만화, 공간의 밀도와 감정의 정적
일본 만화의 미학은 공간의 밀도와 정적인 감정 표현에서 출발한다. 흑백으로 인쇄된 단행본은 세로로 제본되어 있으며, 독자는 페이지를 넘기며 시선을 좌에서 우, 위에서 아래로 이동시킨다. 이러한 읽기 구조는 단순한 시선 이동을 넘어, 독자가 공간을 해독하며 이야기를 ‘탐색’하게 만드는 특유의 공간적 체험을 형성한다. 서사적으로 일본 만화는 기승전결(起承転結) 구조를 따르는 긴 호흡의 서사, 그리고 페이지를 넘길 때 발생하는 극적 ‘넘기기 효과(めくりの効果)’가 특징이다. 이는 독자가 페이지라는 공간을 ‘해독’하며 의미를 찾아가는 예술이라는 걸 말해준다. 하지만, 이 구조는 물리적으로 페이지 수, 인쇄 비용, 편집 리듬이라는 내부적인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다. 결국 종이 기반의 한계는 ‘시간적 흐름’보다는 ‘공간적 해석’을 강조하게 만든다. 사건 중심의 플롯보다는 인물의 내면과 감정 변화를 세밀하게 다루며, 이야기의 흐름보다는 감정의 깊이에 초점을 맞추는 쪽으로 진화하게 된다.
미학적으로는 여백을 ‘침묵의 미학(間)’으로, 컷을 ‘정지된 사유의 공간’으로 다룬다. 컷과 컷 사이의 정적인 간극 속에서 감정은 폭발하지 않고 응축되며, 독자는 작가의 감정과 사유에 ‘머무르며’ 공감한다. 이러한 것은 일본 전통 미학인 ‘무(無)와 와비사비(侘寂)’, 즉 ‘불완전함 속의 아름다움’과 ‘여백의 정서’를 반영한다. 결국 일본 만화는 정적인 감정의 공간 예술, 즉 감정이 흘러가기보다 머무르는 예술로 정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디지털 환경, 종이라는 한계에서 벗어나고, 미디어에 의해 다시 규정되는 환경에서는 그동안 축적되고, 놀라운 성공을 이끌었던 ‘공간의 미학’이 오히려 읽기 흐름을 단절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미국 코믹스, 시각의 역동성과 순간의 폭발


미국 만화는 순간의 폭발적 에너지와 시각적 역동성을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 지금 미국은 정치적으로 이민자를 막으려고 하지만, 사실 미국은 이민자들의 국가이다. 유럽과 아시아에서 건너온 수많은 이민자에 의해 정착민들을 몰아내고 세워진 국가였다. 그리고 문화도, 생활도, 말도 틀린 수많은 이민자는 신문과 찌라시 속 그림과 만화를 통해 정보를 얻고 소통하였다. 그렇게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만화는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국가적인 열망과 기대(영웅에 대한) 그리고 불안을 해소하는 판타지가 되었으며, 매주 새로운 이야기를 신문잡지의 유통망을 통해 만나게 되었다. 이는 풀 컬러(Full Color) 인쇄와 잡지형 연재, 그리고 이슈(issue) 단위 판매라는 미국 코믹스의 형식적 기반이 되었다. 그리고 이런 특징은 독자로 하여금 각 장면에서 즉각적인 시각 자극을 경험하도록 만든다. 당연히 만화의 연출은 감정의 흐름보다 한순간의 ‘임팩트’를 전달하는 데 초점을 맞추게 되는 것이다.
서사 구조는 명확한 3막 구성(Setup–Conflict–Resolution)을 따르는데, 한 회마다 어느 정도 완결성을 가지며, 영웅의 탄생과 성장, 그리고 정의의 실현이라는 고전적 영웅 서사 구조가 중심인 게 일반적이다. 미학적으로는 ‘그리드(Grid) 시스템’과 ‘스플래시 페이지(Splash Page)’, 클리프행어(Cliffhanger)가 반복되는 것이 특징이다. 패널의 크기와 배치를 통해 시각적 쾌감을 극대화하고, 여백보다는 충돌과 동작의 힘을 강조한다. 감정보다는 액션의 리듬, 사유보다는 시각적 속도감이 우선하며 강렬한 장면 중심의 연출은 서사의 리듬보다 ‘순간의 자극’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자연히 감정의 여운이나 호흡의 깊이는 상대적으로 약하다. 이러한 특징은 미국적 문화 철학인 ‘개인주의·자유·정의의 신화(Myth of Heroism)’와 맞닿아 있다고 한다.
결국 미국 만화의 본질은 순간의 미학, 즉 ‘행동 그 자체가 미학(Action as Aesthetics)’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시각적 충격과 영웅 서사가 한 페이지 안에서 폭발하며, 독자에게 즉각적 자극을 제공하지만, 스토리의 ‘시간적 흐름’을 체험하기는 쉽지 않은 구성이며 그걸 기대하지도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한국 웹툰, 스크롤의 리듬과 감정의 시간화
한국 웹툰의 미학은 시간의 리듬과 감정의 흐름에 있다. 모바일 기기의 세로 스크롤 구조 위에서 읽히며, 독자는 페이지를 넘기지 않고 화면을 아래로 ‘내려가며’ 이야기를 따라간다. 따라서 시선의 이동은 ‘선형적(linear)’이고, 읽기 행위는 곧 ‘시간의 체험’이 된다. 서사적으로 웹툰은 회차 단위의 빠른 전개와 매주 연재되는 리듬을 지닌다. 각 회는 독자의 주의를 끌기 위해 후킹(Hooking)과 클리프행어(Cliffhanger)를 적극 활용하며, 작가는 컷의 크기와 여백의 길이를 조절해 감정의 호흡을 세밀하게 설계한다. 미학적으로 웹툰의 여백은 단순한 공백이 아니라 ‘시간의 숨결’로 기능하며, 스크롤의 움직임은 곧 ‘감정의 리듬’으로 작용한다. 여백이 길수록 시간이 느려지고, 감정의 여운은 길게 남는다. 이는 독자가 스크롤을 내리는 행위 자체가 마치 영화의 줌인, 줌아웃이나 좌우로 이동하는 패닝(Panning) 또는 상하로 이동하는 틸팅(tilting)에 가까운 시간적 연출로 볼 수 있다. 또한 인물의 동작선, 시선 처리, 액션의 동선이 컷의 형태와 배치에 직접적으로 반영하며, 풀 컬러와 블러(Blur) 효과, 그리고 모션의 시각화 등을 통해 감정의 미세한 진폭을 시각화함으로써, 독자는 정지된 이미지를 보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흐르는 ‘시간의 예술’을 경험하고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문화적 차원에서 웹툰은 한국 특유의 정서인 한(恨)과 정(情)의 리듬감을 자주 담아낸다. 감정은 적절히 억제되거나 응축되다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화하고 해소되며 공감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웹툰은 ‘감정의 시간화(Emotion as Flow)’를 이루어낸 예술로 평가되기도 한다. 웹툰의 본질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연출하는” 예술에 있다는 말이 그래서 가능한 것이다.
‘시간의 예술’은 단지 기술의 산물인가?
일각에서는 웹툰의 성공을 ‘모바일 인터페이스가 낳은 소비형 콘텐츠’로 본다. 이것은 화면 크기, 스크롤 구조, 플랫폼 알고리즘이 독자의 시선을 규정한다는 것이다. 이 관점이라면 웹툰은 예술이라기보다 기술적 형식에 종속된 콘텐츠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단순한 기술 발전과 그 활용만으로 감정의 몰입과 서사적 긴장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 기술 편의적인 시각은 웹툰의 본질을 놓치게 한다. 기술은 단지 ‘무대’일 뿐, 웹툰을 통해 전달되는 ‘감정의 시간’을 설계하는 것은 작가의 의식이기 때문이다.
웹툰은 기술을 이용해 ‘감정을 조형하는 예술적 의지의 산물’이며, 또한 독자와의 쌍방향 서사 구조를 통해 독자의 반응을 읽고 다음 회차의 감정선을 다시 편집하기도 한다. 이런 상호작용은 전통적 예술의 ‘완결된 창작자’ 개념을 흔들며, “예술이란 누구의 경험인가?”라는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이는 또한 관객과의 대화를 통해 즉흥성과 유연성으로 완성된 한국적인 스토리텔링 서사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서사적인 맥락이 준비되어 있더라도 각 장면의 연출은 소통과 감성의 민감한 작용과 포착을 통해 완성되는 것이다. 어쩌면 1인 창조의 종합시각예술인 웹툰은 그런 의미에서 시간적인 격차를 가지는 행위예술의 한 방법을 보여주는 것으로도 보인다.
결국 우리가 ‘웹툰’이 새로운 시각언어이자 새로운 예술이자 콘텐츠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기술을 넘어 컷과 컷으로 또 다른 템포(Tempo)를 발생시키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기술은 도구일 뿐, 그 도구 위에 서사의 문법을 다시 쓴 것은 작가들이 ‘시간의 조형’이라는 새로운 예술 언어라는 것이다. 하나의 컷으로 넓은 풍경을 보여준 뒤 다음 컷에서 인물을 급격히 클로즈업하는 등 컷과 컷 사이의 리듬감은 의도적인 설계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를 통해 시각적 충격이나 감정적 임팩트를 주는 서사의 ‘리듬’과 ‘감정의 시간’이 전달되는 새로운 미학과 커뮤니케이션을 구축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웹툰의 종주국이라고 외치는 것은 먼저 시작했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예술적인 언어와 표현과 소통의 방식을 새롭게 제시했기 때문인 것이다.
또한 웹툰은 디지털화된 미디어 환경과 글로벌 소비 환경에 최적화된 콘텐츠의 형식을 제시해 준다. 주 1회 연재 주기에 맞춰 플롯을 빠르게 전개하고, 스마트폰 화면 크기에 맞춰 설계되어 있다. 출퇴근 시간이나 자투리 시간에도 부담 없이 한 회차를 소비할 수 있는 스낵컬처 문화에 최적화된 콘텐츠인 셈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결국 '시간'을 효율적으로 다루는 연출 덕분이다. 웹툰은 공간의 구도에 갇힌 만화를 해방하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감정을 조형하는 예술로 진화했다. 이제 독자는 페이지를 넘기지 않는다. 그들은 스크롤 속에서 시간을 ‘흘려보내며’ 읽는다. 이 감각의 전환이야말로 웹툰이 산업으로 자리 잡으며 세계 시장에서 독보적 경쟁력을 지닌 이유가 된다.
결_한국적인 스토리텔링과 미학 그리고 웹툰의 방향
사실 단지 미디어의 변화뿐만 아니라 시각의 흐름이 수평에서 수직으로 변한 것은 근대 이후 구축되어 온 시각적인 언어와 커뮤니케이션의 방식을 흔드는 일이기도 하다. 기술로도 오로지 엘리베이터를 제외하고는 그 어느 것도 수직으로 움직이지는 않지만, 엘리베이터 역시 수평적인 시선의 단면을 중심으로 보고, 보인다. ‘카메라 루시다’가 발명되면서 근대적 시선 체계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카메라 루시다는 대상을 객관적이고 사실적으로 재현하려는 근대의 열망 속에서 탄생하고 활용된 도구로서, 원근법에 기반을 둔 근대적 시선 체계를 시각예술 분야에서 공고히 한 것이다. 그리고 근대적 시선은 우리의 일상생활을 좌우하고 있음을 또한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의 눈은 있는 것은 언제나 보는 것이 아니며, 없는 것은 절대 보지 않는 것은 아니다. 바꿔 말하면 우리는 있는 그대로 보지/못 보지 않는다. … 여기서 있는 것을 못 보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은 하나의 시점에서 통일적으로 볼 수 있게 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없는 것을 보는 이유도 분명하다. 그것은 거리감을 표시하는 규칙에 따라 그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는 사람 역시 그런 규칙에 따라 보기 때문이다. 이 규칙을 알다시피 ‘투시법’ 혹은 ‘원근법’이라고 부른다.
다시 말해 우리는 모두 특정한 방식으로만 본다. …정말 우리는 보는 것을 믿는다. 그런데 우리의 눈이 특정한 방식으로만 볼 뿐이라면, 또한 우리는 특정한 방식으로만 인식하고 믿게 되리란 것을 뜻하지 않을까? 이런 점에서 시선, 내지 시각을 다룬다는 것은, 볼 수 있는 것(le visible)과 볼 수 없는 것(l'invisible)을 가르고, 보아야 할 대상과 보는 방식을 정의하며, 그에 따라 특정한 방식으로 보도록 만드는 체제(régime)의 문제다. 나아가 … 시선의 체제(정권)와 그 안에서 작동하는 시선의 권력.“ _ <근대적 시선의 체제와 주체의 시선>, 이진경
웹툰은 모바일이라는 달라진 세상의 박스 속에서 새로운 시각언어를 시도하고 있다. 그리고 독자적인 언어의 방식을 보여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게 완성된 ‘언어’이자 표현방법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예술은 본질적으로 구축된 것에 대한 반항과 의문에서 시작되기 때문이고, 진화하고, 변화하는 이유와 과제가 경제적으로, 문화 예술적으로 계속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수직적인 세계 속에서 깊이와 방식은 계속 새롭게 창조되고 있다. 웹툰은 그렇게 사유하고, 보고 보일 수 있음을 세상에 보여줬고, 가장 효율적인 방식을 세계에 소개한 것이다. 이제 근대적인 원근법과 시선의 흐름이 세로로 이어지는 칸의 새로운 언어 속에서 어떻게 변주할 것인가를 찾고, 확장하는 것이 바로 다음 예술의 과제이자 역할이 되고 있다. 어쩌면 웹툰의 창조라는 지난 10년의 여정에 우리가 도취해 있는 게 아닌지 되돌아봐야 할 때이기도 하다. 혁신의 창조는 또 다른 문법이자 규칙이 되어 무의미하게 반복되면서, 언어로서의 매체와 스토리를 규제하는 틀이 되고 있는 게 아닌지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언어의 방식이 형성되고, 감성적인 표현이 거기에 적용되었지만,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라는 그레샴의 법칙처럼 본질적으로 코리안 삑사리라 불리는 스토리텔링의 경쟁력과 전통이 무시되고, 사라지고 있다는 위기감이기도 하다.
새로운 형식의 변주는 이제 평면이 아닌 입체적인 수준에서 논의되고, 발전해야 하는 시대가 되고 있다. 인공지능과 가상현실은 년과 월이 아니라 하루 단위로 우리에게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가상현실의 공간은 페이지를 모바일로 해방했듯이, 수평과 수직으로 움직이던 시선을 360도의 세상으로 이끌고 있다. 이는 빨라진 숏츠와 함께 웹툰이 직면한 도전이기도 하다. 폭발적으로 성장한 숏츠가 위협인 건 대중적인 인기 때문이 아니다. 항상 영화나 TV나 인터넷 등 새로운 환경의 도전에서도 만화는 새롭게 진화와 적응을 해왔다. 다만 숏츠는 우리에게 달라진 대화의 방식과 속도를 요구한다는 점 때문이다. 글과 다르게, 만화와 웹툰은 서사적인 연출과 작화의 시간적 간격을 필요로 하는 예술이다. 무작정 따라갈 필요는 없지만 그 안에서 자신만의 존재 이유를 찾아야 하는 게 사실이다. 그런 변화 속에서 웹툰이 자신의 존재 이유를 만들어왔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만화와 웹툰이 도전을 피했던 적은 없다. 피할 수 있는 세상이나 문화도 아니었고, 축적된 경험과 전통을 경쟁력으로, 놀라운 유연성과 속도를 무기로 새로운 산업과 분야를 창출해 냈었다. 이제 새로운 시대와 도전에 맞서 우리의 스토리와 시각적인 언어는 어떻게 대화해 나가고, 진화해 갈 것인가를 고민하고, 기대해 본다.
[출처]
1. 산업통상자원부, 「2020년 상반기 유통업체 매출 동향」, 『산업통상자원부』, 2020.07.28.
2. 영화진흥위원회, 「2020년 한국 영화산업 결산」, 『KOFIC(영화진흥위원회)』, 2021.04.19., 3-4쪽.
3. 문화체육관광부, 「2021년 콘텐츠산업조사」, 『문화체육관광부』, 2022.03.17.
4. 정보통신정책연구원(KISDI), 「세대별 OTT 서비스 이용 현황」, 『KISDI』, 2022.09.28.
5. 정부 관계 부처 합동, 「디지털 뉴딜 문화콘텐츠산업 성장 전략」, 『문화체육관광부』, 2020.09.23.
6. 한국콘텐츠진흥원, 「2021 만화·웹툰 이용자 실태조사」, 『KOCCA』, 2022.01.12.
7. 한국콘텐츠진흥원, 「2022 만화·웹툰 이용자 실태조사」, 『KOCCA』, 2023.01.06.
8. 네이버웹툰, 「2025년 상반기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 공시 자료」, 『Naver Webtoon』, 2025.
9. 한국콘텐츠진흥원, 「2024년 만화·웹툰 이용자 실태조사」, 『KOCCA』, 2024.
10. 한국콘텐츠진흥원, 「2024 웹툰산업 실태조사」, 『KOCCA』, 2024.
[공동 저자]
박연조
- 만화출판, 웹툰, 애니메이션 창작자
- 광운대학교 정보과학교육원 만화예술전공 주임교수
- 광운대학교 스마트융합대학원 메타융합콘텐츠학과 교수
- 공공기관 웹툰 및 AI 교육자
- <웹툰연출기법>, <다음 화가 궁금해지는 웹툰 연출>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