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풍선의 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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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닉 드르나소와 감정이 사라진 세계

감정의 부재로 현대인의 불안과 단절을 드러낸다.

2025-11-14 전운

말풍선의 심리 (임상심리사의 만화 읽기)

4화-닉 드르나소와 감정이 사라진 세계

과거의 공포는 붕괴의 이미지로 묘사됐다. 홍수, 지진, 핵전쟁, 전염병. 인류는 종말론의 형태로 공포를 상상했다. 드래곤 헤드역시 세기말에 어울리는 만화였고, 이제는 지나버린 과거의 흔적으로만 남아있다. 세기말의 공포가 문명의 붕괴를 투사한 것이었다면, 지금의 공포는 문명이 지나치게 완벽히 작동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기술은 모든 매체를 하나로 통합해 전 세계 각자의 손에 평등하게 쥐여 주었다. 개인과 세상은 실시간으로 연결되며, 현실은 더 이상 삶의 전부가 아닌 하나의 조각이 되었다.
새삼스럽게도, 사람들은 온라인에서 더 오랜 시간을 보낸다. 남 이야기가 아니라 누구보다 나 자신에게 적용되는 현실이다. 그게 영상이든 만화든 게임이든, 이제 감정의 경험은 현실보다 화면을 통해서 더 많이 벌어진다. 디지털화된 감정이 하이퍼 리얼하게 재현되고 그것을 소비할수록, 또한 현실의 감정은 느끼는 것이 아니라 수행해야 하는 노동이 된다. 이는 서로 간의 진정성에 대한 불신을 넘어 자신의 감정조차 확신할 수 없도록 유도한다. 개인의 주관적 진실조차 확신하기 어려워지고, 실제와 모방된 경험의 경계가 무너질수록 예전과는 다른 양상의 불안들이 떠돈다. 과거처럼 외부 자극에 대한 반응으로 발생하는 불안이 아닌, 실체화된 감정의 결핍으로 발생하는 내적 혼란과 거기에 기인한 불안들. 마크 피셔가 말한 두 개의 감정, 일상의 법칙을 넘어서는 기이함(The Weird)’, 존재해야 할 것이 부재할 때 느껴지는 으스스함(The Eerie)’이 현대의 불안을 설명하는 정밀한 언어가 될 것이다.
이러한 현대화된 불안을 포착하여 정사각의 칸 속으로 옮겨온 것이 미국의 그래픽 노블 작가, 닉 드르나소(Nick Drnaso)이다. 그의 만화는 정서의 부재를 통해 발견되는 낯선 감정으로 독자를 전환하며, 그만의 독자적인 이미지로 불안을 시각화한다. 작가는 일상과 사건 사이에 존재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드 형태의 엄격한 칸 구성과 관조적인 시선을 두른 채, 모순과 역설의 기법으로 담아낸다. 등장 인물들에게는 감정의 그림자가 배어 있지만 그 감정을 일으키려는 연출을 사용하지 않는다. 인물들에게 작동되는 동기도 있지만, 설명되지 않아 그들의 마음은 영원히 알 수 없다. 작가 역시 이야기의 방향이 무엇인지 정확히 가리키지 않는다. 미국을 배경으로 평범한 이들의 일상적 상황을 묘사할 뿐이지만, 기존의 만화에서 당연히 존재하는 감정과 동기, 목표의 부재로 인하여 독자는 드러나지 않는 어긋남과 이유 없는 으스스함을 발견한다. 아이러니로 가득 찬 그의 작품 세계를 하나씩 따라가면서, 그가 말할 듯 말 듯 한 것들을 더듬어 가보고자 한다.

베벌리: 느슨한 위화감의 단면

닉 드르나소 작가의 첫 번째 작품인 베벌리는 작가 자신의 출신지인 일리노이 주의 소도시를 배경으로, 그 안에 존재하는 하나의 풍경처럼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을 그려낸 단편 연작을 모아 완성한 작품이다. 이어지는 듯 무관한 듯 느슨하게 연결된 여섯 개의 작은 이야기들이 결말 없이 수렴되어 보여주는 일상의 단면은 그 자체로 독자들에게 으스스함을 남긴다.

그림1  베벌리/ 닉 드르나소 / arte / 리디북스

잔디 둔덕

공원 청소 아르바이트를 하는 소년 팀과 살의 이야기로, 살은 성실하게 일을 하지만 사회적 관계가 서툴다. 팀은 여학생 무리와 함께 일하고 싶어서 관리자에게 다른 구역에서 일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 말은 관리자에게 살의 사회성에 대한 불평으로 전달되고, 살은 해고된다. 팀은 여학생 무리와 끼지만, 카라로부터 가난한 동네 출신이라는 말을 들으며 대화에서 소외된다. 팀과 여학생들은 공원을 나가는 살의 일그러진 표정과 마주한다.
살은 고립적 특성이 이유가 되어 집단의 암묵적 배척 속에서 차별받는 모습을 조명한다. 누구도 악의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무언가가 잘못되어 가는 이 기이한 평온함이 미국 교외 사회의 배타성과 무감각을 하이퍼 리얼하게 드러낸다.

 

가장 슬픈 이야기

TV 마니아인 카라의 엄마는 방송국에서 받은 시트콤 파일럿 테이프에 신이 나서 딸과 함께 시트콤을 시청한다. 카라 엄마는 흥분해 설문에 임하려 하지만 설문이 모두 광고 관련인 것을 알고 크게 실망해 무기력해진다. 엄마 곁에서 아무런 말도 없이 있던 딸 카라는 방에 올라가 조용히 울음을 짓는다.
겉보기에 평화로워 보이는 모녀 관계지만, 카라의 엄마는 자신의 관심사에 빠져 일희일비할 뿐이며 딸과 실질적 교류 없이 자신의 만족을 위해 일방적으로 자녀를 사용한다. 방송국이 시청자를 소비자로 다루는 것에 좌절하는 그녀 역시 자녀를 반응의 도구로만 대하는 모순성을 조명한다. 결과적으로 자녀인 카라는 감정이 단절된 채로 무기력을 학습한다.

 

리틀 킹

카라 가족이 여행을 떠난다. 부모는 신혼여행지를 다시 찾아 가족 사이 의미를 되새기려 하지만, 자녀들은 가족 여행에 비협조적이다. 말이 없는 사춘기 소년 타일러는 내면에 성적인 상상과 잔혹한 상상이 일어나는 강박사고를 품고 있지만 가족들은 알지 못한다. 타일러가 카라의 속옷으로 자위를 한 일이 들키면서 가족 여행은 더 혼란스러워진다. 아버지는 타일러를 꾸짖고 또 이해한다며 위로하지만, 타일러는 자신을 복면 쓴 성인으로 상상하며 끝까지 침묵을 유지한다.
카라 부모는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여행을, 자녀들을 위한 것으로 포장하는 위선을 드러낸다. 타일러가 보이는 침묵의 배경에는 가족 전체의 단절이 있다. 작가는 타일러의 폭력적 상상을 도덕적 판단 없이 존재하는 것으로 제시한다. 그렇게 카라 가족은 여행지에서도 각자의 욕망에만 몰두하며 단절을 재확인한다.

 

푸딩

티나는 친구 웨스를 데리고 어린 시절 푸딩이라 부르던 친구 샬럿의 파티에 참석한다. 티 나는 친구 이상의 관계였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려 하지만, 샬럿은 부유해진 현재에 만족하며 과거 시절을 떠올리는 것을 거부한다. 자신을 모욕한 것으로 받아들인 티나는 만취해 폭언을 남기고 파티를 떠난다. 무면허인 웨스는 귀가를 위해 티나를 태우고 불안하게 운전하고, 그들을 지나간 경찰차는 교통사고 현장에 도착한다. 그곳엔 카라로 보이는 여성이 쓰러져있다.
우정인지 사랑인지 서로 간에 정확히 명명되지 않은 티나와 샬럿, 웨스라는 세 등장인물을 통해서, 서로 간의 관계가 각자의 공허한 순간을 견디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였을 보여준다. 에피소드들을 느슨하게 연결해 주던 카라의 죽음은, 공허하게 연결된 관계 사이에 놓인 이들의 결말을 암시하는 듯하다.

 

동정녀 메리

밤늦게 아르바이트하던 마리아라는 소녀가 아랍계 남성에게 납치당했다는 소식이 퍼지며 작은 마을은 분노로 들끓는다. 피해자를 주인공으로 한 무성한 소문 속에서 이민자들에 대한 공공연한 차별이 지역 사회의 유희로 번져가던 중, 경찰은 마리아와 남자 친구가 꾸민 자작극이었음을 밝힌다. 진상이 드러난 후 마을은 어떤 자성의 모습 대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조용해지고 피해는 모호해진다.
사건은 미국의 인종차별을 넘어, 소시민적인 조용한 공동체의 내면에 도사린 배타성과 공격성을 포착한다. 언제든 배타성을 표출할 준비가 된 주민들은 계기가 주어지기만을 참고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나를 왕으로

복면을 쓴 성인 남자가 한적한 다운타운의 밤길을 걷고 여성은 그를 의식하며 도망간다. 그는 성장한 타일러다. 도망치던 여성을 지나쳐 마사지를 받으러 간 곳에서 타일러는 베벌리라는 안마사가 응대하는데, 누나였던 카라와 닮은꼴이다. 타일러는 대화를 나누며 자신을 엔지니어라 소개하지만, 대부분의 말은 거짓말이다. 집으로 돌아가던 중, 한 여성이 복면을 쓴 스토커를 피하기 위해 타일러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준다. 그녀가 집에 들어간 후, 타일러는 그녀의 집을 한참 주시한다.

그림2  베벌리/ 닉 드르나소 / arte / 리디북스

성인이 된 리틀 킹의 주인공 타일러의 동선을 따라가며 조용한 마을에 자리한 잠재된 범죄의 불안에 대한 질문을 제기한다. 타일러는 사회적 실패와 고립, 남성성이 만들어낸 자기애적 환상, 타인에 대한 불신으로 인한 침묵, 유대 관계의 부재까지 그 모든 걸 품은 채로 복면을 쓰고 밤거리를 걷는다. 타일러가 어린 시절 가지고 있던 잔혹한 상상의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독자는 성인이 된 그에게 잠재된 어떠한 불안의 그림자를 본다.
겁이 나서 달아나는 여성을 타일러가 무심하게 지나가는 모습은, 현대 미국 사회가 가지고 있는 일상의 으스스함을 시각화한 모습이다. 타일러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잔디 둔덕의 살이 겪었던 것처럼 자신의 비사회성으로 인해 사회로부터 의심받으며 재고립된다. 그가 잠재적 가해자로 이행된다면 그 원인은 타일러가 피해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앞선 인물들이 겪었던 고립과 단절을 모두 이어받은 결과물이다. 평범한 미국 교외에서 누구나 될 수 있는 인물로서, 피해자의 불안이 가해자의 가능성으로 이행하는 구조를 체현한다.
그럼에도 작가는 인물들을 판단하지도, 문제라고도 말하지 않는다. 인물의 내면은 함부로 상정할 수 없는 것이며 비판적으로 비출 뿐이다. 작가의 의견 주입이 없는 대신 현실을 작품으로 가져올 때의 여과 장치도 없기에 베벌리의 세계는 현실 속에 만연된 긴장감이 그대로 녹여져 있다. 아무도 악하지 않지만, 모든 것이 조금씩 잘못되어 있다. 독자는 불안을 투여할 대상을 확정하지 못하며 무엇이 부재한 것인지도 발견하지도 못한다. 이야기에서 독자가 인식하고 느낀 것들은 과연 확실한 사실일까? 위화감을 가지고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때, 작가는 타일러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지에 대한 질문을 독자에게 되돌린다. 미국 교외의 단절을 바라보던 시선은 다음 작품으로 이어져 미국 사회 전체로 확장된다.


사브리나: 정서의 공백을 드러내는 시선

그림3  사브리나/ 닉 드르나소 / arte / 리디북스

사브리나라는 이름의 여성이 실종된 뒤 한 달째, 그녀의 연인 테디와 동생 산드라는 급성 스트레스 상태에 빠진다. 테디의 가족은 그의 정신을 추스르게 하도록 오랜 친구이자 군인인 캘빈의 집을 찾게 하지만, 사브리나의 죽음이 담긴 영상이 온라인에 퍼지며 사건에 대한 수많은 음모론이 등장한다. 테디는 현실과 단절되어, 사건을 정부의 조작이라 주장하는 라디오 방송에 집착한다. 캘빈은 친구를 보살피려 하지만, 음모론에 빠진 테디는 오히려 그를 의심하고 경계한다. 캘빈이 언론 취재를 막는 장면이 온라인에 퍼지고, 음모론자들은 캘빈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캘빈은 자신을 지켜보는 협박들 속에서 동료나 주변인들조차 믿기 어려워진다. 어느 날, 더 큰 범죄가 터지자, 사람들의 관심은 이동한다. 몇 달 후, 어려운 상황에서도 아내로부터 지지받지 못한 캘빈은 특수임무에 자원해 홀로 이사를 간다. 마을을 벗어나던 캘빈은 편지 더미 속에서 어디로 향하는지 다 알고 있다는 음모론자의 협박 편지를 발견한다.
부커상 후보가 되어 유명해진 작품인 사브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깔린 불안을 개인에서 사회 전체로 확장하여 조명한다. 작품은 테러 범죄가 전부 정부의 조작이라고 주장하는 음모론 라디오를 모델로 하여, 실제 일어난 사건을 매개하는 편집증적 음모론이 일반 시민들을 어떤 방식으로 고립시키고 또 누군가가 어떻게 편집증에 물들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알 수 없는 진상과 사건을 둘러싼 말들은 과잉으로 발생하며 존재할 필요가 없는 허구의 정보만이 끝없이 재생산된다. 음모 속에서 사건의 피해자는 음모의 주체가 되고 가해자는 피해자로 전복된다. 주변인 누가 음모론에 빠져 자신을 감시하는 자인지 모를 으스스한 정적 속에서 피해자들의 일상은 침식당한다.

그림4  사브리나/ 닉 드르나소 / arte / 리디북스

드르나소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매체인 만화를 관찰의 매체로 변화시키는 작업을 해왔는데, 사브리나에 이르러서 그 지점이 더욱 분명해진다. 등장인물을 자세하게 관찰하되 내면을 보여주는 장치를 배제하려는 작가의 의도는 더욱 강하게 드러난다. 우리가 알던 일반적인 만화들의 칸 안과 칸 밖의 많은 기법들이 여기에도 존재하지만, 그 내적 기능들은 원래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말풍선은 전부 동일한 형태로 고정되어 있으며, 균등한 그리드의 칸 구성은 이야기 흐름의 속도나 시선의 변화를 주지 않는다. 고정된 포커스와 일정한 채도, 명암이 배제된 무미건조한 색감은 관찰 카메라의 모습으로 인물들을 기록하려 할 뿐 독자의 감정에 개입하려는 의도를 무미건조하게 배제한다. 동생인 산드라는 언니의 사건으로 가장 고통받는 인물이지만, 그녀가 일상을 버티며 살아가는 모습은 그저 나열된다.



그림5  사브리나』 닉 드르나소 / arte / 리디북스


독자가 전달받는 것은 캘빈과 산드라, 테디가 겪는 고통스런 사건들과 그것에 반응해 나가는 모습들에 대한 관조이다. 사건의 묘사 속에서 그들이 겪는 감정은 표현되지 않기에 결과적으로 작품 전체에는 정서적 공백이 도드라진다. 그 공백의 의문점을 메우기 위해 칸과 칸 사이, 에피소드의 사이에서 등장 인물들에게 작용하는 부조리한 힘이 무엇인지를, 독자에게 스스로 유추하도록 요구한다. 불가해 보이는 이야기 속에서 독자가 그 모든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결국 작품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회의 메커니즘 또는 독자 자신의 관념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그렇게 작가는 이야기보다도 이 이야기의 의미를 찾으려고 혈안이 된 우리의 렌즈를 비춘다. 사브리나에서 비극을 자신의 신념과 음모론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이들의 모습은 과연 우리들과 무관한가? 작가는 독자에게 타인의 고통을 단순한 감정적 체험으로 소비할 윤리적 권리가 있는지를 날카롭게 질문한다. 사브리나는 세상에 대한 작가의 견해를 분명하게 드러내지는 않지만, 당연하게 여기던 일상의 규칙들에 의문을 가진 시선을 낯설게 체험할 수 있다.


연기 수업: 역할의 분열과 자아의 파국

90년대 미국의 작은 소도시, 각자의 외로움과 불안을 마음의 배경에 품은 열 명의 사람이 무료 즉흥연기 수업에 모인다. 수업을 주도하는 존 스미스는 참가자들에게 즉흥적인 연기를 지도하며 일상적 역할에서 벗어나도록 주문하고, 이를 통해 인물들은 억눌린 욕구를 드러내며 카타르시스를 경험한다. 수업이 현실에 영향을 미치며 감정의 분출은 곧 혼란과 불안으로 바뀌고, 조금씩 자아의 경계가 침범당하기 시작한다. 어느새 수업 공간은 초현실적인 무대로 변하며, 인물들은 자신이 연기를 하는지 실제로 무너짐을 겪는지를 구분하지 못한다. 마음의 공허를 채우려던 참가자 일부는 결국 자기도취적인 연기에 빠져 현실을 등진다. 마지막 수업 후 스미스는 다음 단계로 가자며 수료자들을 차에 태워 어딘가로 떠난다.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인지 의문을 남긴 채로, 남은 이는 현실과 허구가 뒤섞인 세상에서 살아간다.

그림6  연기 수업/ 닉 드르나소 / 프시케의 숲

심리극 또는 사이코드라마라는 치료 방법은 무대 위에서 자신의 심리적 문제를 연출해 가지고 있던 감정과 욕구를 표현하며 카타르시스를 경험케 한다. 만약 연극을 통해 어떤 이의 심리적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고 한다면, 반대로 악화시키는 것 역시 가능하지 않을까? 작가는 과거 연기 워크숍 수업을 들었는데 타인의 시선 앞에서 감정을 드러내도록 요구받는 경험이 자아가 무너지는 듯한 불안이었고, 이것이 연기 수업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한다.
연기는 배우가 되어 주어진 상황의 역할을 하는 행위다. 연극이나 롤플레잉 게임을 즐기지 않는 사람이더라도, 현대인은 이미 수많은 역할 연기 속에 살고 있다. 직장에서의 사회적 자아, 가족 또는 친구와 함께 할 때의 관계적 자아, 혼자일 때의 내적 자아가 존재한다. 수행해야 하는 요구들이 세분화할수록 더 많은 자아의 구분이 필요해질 것이다. 상황에 맞춰 조금씩 다른 표정과 목소리, 인격으로 조형해 낸 자아의 모습을 페르소나라고 한다. 모든 상황에 적용되는 단일 페르소나가 없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으며, 상황의 요구에 맞춰 적응해 나간다. 페르소나를 쓰는 것은 심적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다. 역할이 많아질수록 페르소나를 바꿔가며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마음의 공백도 커진다. 어떤 이는 같은 페르소나만 반복되는 것에 지루함과 피로감을 느끼기도 한다. 심리극은 이런 역할 수행과 그로 인해 발생한 자아의 균열을 메우기 위한 목적으로 도입된 치료 방법으로 존재한다. , 심리극을 할 때 타인 앞에서 연기를 하는 주체들은, 타인의 역할에 들어갈 때보다 거기에서 빠져나올 때 스스로 심리적 상처가 남지 않도록 더 주의 깊은 과정을 거치게 된다. 우리 뇌는 행위가 연기인지 아닌지를 특별히 구분하지 않고, 변화에 적응한 과정으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연기 수업은 상처받은 자들의 심리적 균열을 메꾸지 않고 균열을 더 크게 만드는 악의를 가졌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심리적 파국을 묘사한다.
전작들은 미국 사회의 분열적인 단면과 모순성을 냉담하게 관찰하던 작품들이었다. 작품에서 그들의 내면에 서린 고통은 표현되지 않지만, 독자는 그들의 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반면, 연기 수업에서 국가나 지역적 감각은 희미해져 있다. 대신 단절된 개인들의 불안정한 심리들, 그로 인해 발생하는 내적 균열부터 최종적으로 정체성이 대체되어 가는 모습을 시각화한다. 작가는 더 이상 등장인물들을 관찰 카메라로 엿보는 태도를 취하지도 않는다. 여전히 경직되어 보이기는 하지만 정사각형의 격자는 대신 조금 더 자연스러운 만화적 컷의 흐름에 가까워졌다. 등장인물들은 이제 웃고 울고 실망하며, 겁먹거나 분노를 드러내는 등 더 많은 표정을 가지게 되었다. 작가의 시선도 인물들의 배경, 원경, 근거리, 내면까지를 자유롭게 오가며 그들의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이전 작품들이 정서적 공백을 통해 간접적인 으스스함을 유발했다면, 연기 수업은 부적절한 감정의 과잉된 묘사나 비전형적인 해리 증상의 이미지화를 통해 독자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의 존재에서 오는 으스스함을 유발하는 결과를 낳는다. 독자는 등장인물들이 현실과 환상을 오가며 겪는 혼란스러운 심정을 상상하기 어려우며, 그것을 정서적으로도 이해가 어려운 지점에 닿는다. 기억상실, 이인증, 둔주 같은 해리성 장애의 증상들이 일반인들에게 흔히 경험되어질 만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존 스미스의 역할 조작은 대중들이 상상하는 최면에 가까운 공상의 영역이지만, 실제로 역할의 혼란이 유발하는 일상의 침해는 충분히 있을 법도 하다. 일상이라 여기던 직장의 안정성을 의심케 하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의 평온함은 깨지고, 파국적 불안에 빠지는 것도 쉽게 볼 수 있는 현실이다. 이 정도로 정체성이 무너짐을 경험하는 데 있어서, 이제 실제 사건도 필요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의 정체성은 각자가 로그인하는 수많은 사이트와 커뮤니티, SNS 등에 흩어지고 조각나 있으며, 익명을 가진 누군가로 인해 언제든 조롱당하거나 조종당할 수 있다. 거기에는 저열한 의도나 대단한 악의 신 그저 한낱 유희나 과시적 욕구, 이윤의 추구가 존재할 뿐이다.

그림7 Acting Class/ Nick Drnaso / The Comics Journal Acting Class Review

사람들을 지도하던 존 스미스는, 창문 너머 청소하고 있는 근무자를 보면서 이런저런 상상을 하고 내뱉는다. “이 유리 너머에서, 그는 제가 결정하는 대로 존재하죠.” 결국 무서운 것은 이득만 된다면 타인을 언제든 이용할 수 있다는 자본주의적 의도, 개인이 경험하는 고통을 각자 극복할 일로 여기는 차가운 현실, 그런 일상에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는 우리들 자체일 지도 모른다. 드르나소의 작품들에서 느껴지는 불안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런 우리의 모습을 거울처럼 재현하는 이들을 목격할 때의 불쾌감이다. 무표정한 시선 속에서 우리 자신이 그 세계의 일부가 되었음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가 그려내는 으스스함조차도 더 이상 낯선 감각으로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필진이미지

전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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