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풍선의 심리 (임상심리사의 만화 읽기)
5화-눈물이 증명하는 것들
이번 가을에는 유난히 우는 일이 많았다. 개인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기에 계절을 타는 건 아니었고, 그저 눈물 나는 콘텐츠를 많이 접했던 것뿐이다. 시작은 극장에 가서 본 『체인 소맨 : 레제별』이었다. 원작에서도 눈물이 나던 에피소드였기에 혹시나 했는데 역시 예상대로였다. 그다음은 『슬램덩크』였는데, 오랜 기다림 끝에 전자책으로 나온 것을 기념 삼아 1권을 펼쳤다가 그대로 쭉 완결까지 정주행하는 와중에 당연한 듯 눈물샘이 마르지 않았다. 그러다 6년 만에 신작을 낸 윤가은 감독의 『세상의 주인』을 보면서도 많이 울게 됐고, 하고 싶은 만화전에 나온 난다 작가의 『드래곤의 사전』을 보고 나서도 또 울었다. 그러고 보니 아내의 추천으로 이제야 보게 된 김규아 작가의 『너와 나의 퍼즐』을 보면서도 눈물을 흘렸었고, 추석 즈음에 보다 한참 울었던 영찬 작가의 『리에종 - 어린이 마음 진료소』도 떠올랐다. 정해나 작가의 에세이가 새로 나와 다시 읽은 『요나단의 목소리』까지. 눈물 마를 시간이 없을 정도로 연이어진 울음 연쇄들로 부은 눈이 가라앉을 틈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난 눈물을 잘 참지 못했다. 야단맞을 때도 잘 참지는 못했지만, 콘텐츠를 감상하다가 유발되는 눈물에 유난히 약했다. 『은하영웅전설』의 양 웬리가 죽는 장면에서 뺨을 타고 흘리던 눈물도, 『서유기 선리기연』을 보며 깔깔대다가 어느 순간부터 서럽게 울어서 같이 보던 친구가 난감해하던 일도, 혼자 『파이란』을 보다 방을 뒹굴며 꺼이꺼이 울던 기억도, 동아리 멤버들과 『반딧불이의 묘』 감상회를 하다 어둠 속에서 눈이 빨개진 때도, 살면서 기회가 있을까에 대해 의심했던 류이치 사카모토 내한 공연을 보며 감격해서 흘리던 눈물도, 홀로 『라라랜드』를 보러 갔다가 너무 울어서 다른 관객 모두가 나간 후에서야 조용히 빠져나오던 일도 떠오른다. 하지만 소설, 영화, 애니메이션, 공연을 보며 눈물을 흘린 일은 살면서 손꼽을 정도로 희귀하기에 자세히 기억나는 것뿐이다. 『아기와 나』를 보며 처음 눈물을 흘린 이후로,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많이 흘렸던 눈물들 대부분은 만화책을 보면서였다.
다른 이들도 이렇게 눈물을 흘리는 일이 많았을지, 그저 이것저것 많이 보다 보니 울 일도 많았을 뿐일지 자신을 돌아보면서 새삼스레 한 가지 의문이 더 들었다. 이미 이야기를 알고 있어서 펼치게 되면 반드시 눈물이 흐를 것임을 알면서도,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만화의 그 장면을 다시 찾아보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내 눈물을 뽑아내는 순간들의 목록을 정리하며, 그 심리적 연유도 찾아보았다.
『슬램덩크』 : 정대만이 극복해 가는 과오
농구 초심자 강백호가 바스켓맨으로 성장하는 완성도 높은 서사는, 『슬램덩크』를 완결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나도 추억하게 만드는 전설적 만화로 만들었다. 10대 시절 내내 단행본을 곁에 두고 손에 잡힐 때마다 읽던 만화였기 때문에 모든 내용을 예상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펼칠 때마다 반드시 눈물을 흘리게 만든다. 항상 눈물의 첫 번째 지점은 정대만의 서사이다. 농구부에게 폭력 시비를 걸어 대회에 못 나가도록 쳐들어오는 불량배로 등장하여, 사실은 부상으로 농구를 못 하게 된 이후의 방황이었음이 드러난다. 다시 농구를 하자고 설득하는 권준호를 밀치며 정대만은 힘을 짜내 외친다. "농구 같은 건 그냥 클럽 활동일 뿐이잖아! 시시해서 그만뒀을 뿐이야!“

그림1 『슬램덩크』 / 이노우에 타케히코 / 대원씨아이 / 리디북스
중학교 MVP던 선수가, 부상으로 자신감을 잃었을지언정 어떻게 농구를 그리 쉽게 외면할 수 있던 것일까? 그 의문의 답에는 정대만의 미성숙한 자아가 존재했을 거라고밖에 볼 수 없다. 승승장구하던 정대만은 부상으로 인한 실의에 빠졌고, 그동안의 주목과 찬사가 무관심과 외면으로 바뀌는 것을 보았다. 그로 인한 내적 우울감은 농구를 못하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실망감을, 타인을 향한 서운함으로 전치하고, 타인으로부터의 걱정 어린 시선을 열등감으로 왜곡하여 받아들였을지 모른다. 마지막에는 자신의 박탈감을 전파하기 위해 농구부를 망가뜨리겠다는 시기심이 폭력으로 표출된 것 아닐까.
멜라니 클라인이 말한 편집-분열 자리라는 설명에서 '시기심(envy)'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좀처럼 주지 않는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분노로, 대상을 나쁜 것으로 간주하고 좋은 속성마저 파괴하려는 미성숙한 자아의 감정이다. 요컨대 시기심의 기저에는 대상에 대한 사랑하는 감정이 깔려 있으며, 원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원망도 발생하는 것이다. 정대만이 농구에 대해 가지고 있던 감정은 근본적으로는 사랑이다. 하지만 부상 후 발생한 양가적인 분열 구조에서 자기 자신을 먼저 추락시킴으로써 농구에 대한 분노를 정당화한다. "시시해서 그만뒀을 뿐"이라는 말은 자신이 실패했다고 인정하는 대신, 농구라는 대상 자체를 깎아내림으로써 상처받은 자존심을 보호하려 하는 것이다.

그림2 『슬램덩크』 / 이노우에 타케히코 / 대원씨아이 / 리디북스
하지만 안 선생님을 마주하면서, 그동안 외면하려 애썼던 농구에 대한 애정을 직면하게 된다. 클라인은 편집-분열 이후에 우울 자리가 온다고 설명했다. 사랑하는 대상의 좋은 특성이 다시 자아로 내사되면서, 고통을 주던 나쁜 대상 역시 좋은 대상의 일부분이었다는 통합이 이루어진다. 그 과정에서 좋은 대상을 시기하고 원망하던 자기 자신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되고, 자아는 반성과 통합을 배우게 되며 성숙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이다. 정대만은 자신에게 고통을 주었기에 파괴하려던 농구가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임을 수용했고, 자기 손으로 손상했던 대상의 좋은 부분들을 복구시키려 죄책감과 함께 자신을 다그친다. 정대만이 빠졌던 시기심과 그 이후의 끝없는 후회는 삶에서 잘못된 샛길로 빠지기도 하는 평범한 우리의 이야기일 지도 모른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며 반성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에, 그것을 처절하게 실현해 가는 사람을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자신 안에서 회복의 감각을 느낄 수 있다. 그렇게 보면 정대만의 서사는 독자가 바라던 내적 회복의 완벽한 달성이다.
『슬램덩크』 : 강백호의 참자기 발견
새삼스러운 이야기지만 강백호는 경거망동하고, 타인에게 무례하고 폭력적이며, 유아적 만족 추구에만 충실한 친구다. 가벼운 개그와 만화적인 허용으로 유쾌하게 무마되고 있지만, 현실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면 인기 없는 이유를 스스로 제공한다. 강백호가 끝없이 채소연에게 멋지게 보이고 싶은 마음으로 조바심을 낼 때, 그에게서 현실과 동떨어진 거짓자기의 모습을 보게 될 뿐이다. 위니콧은 세상의 요구에 따라 아이가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거짓자기(false-self)'라 부르는 자아 구조를 형성한다고 하였다. 거짓자기는 처음엔 환경과 자신의 욕구를 타협하며 만들어지지만, 삶의 전면을 대신할수록 진정한 욕구와 멀어진 채로 세상의 기대에 근거하며 살아가는 공허한 자아 상태가 된다.
채소연: "농구... 좋아하세요?"
강백호: "네, 아-주 좋아합니다! 난, 스포츠맨이니까요."
채소연과 강백호의 첫 조우는 상대방이 원하는 것에 자신을 맞추는 게 우선인 거짓자기의 전형적 모습으로 시작한다. 다행히 채소연은 강백호가 처음으로 만나는 ‘자기대상(self-object)’에 가깝다. 하인즈 코헛은 자기개념의 발달을 위해선 공감적 반응을 핵심으로 하는 자기대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백호를 알아보고 응원해 주는 채소연은 백호에게 농구해야만 한다는 조건부 인정을 제공한다. 구 때문에 사랑에 빠진 백호가 농구를 도구로 이용하여 채소연의 관심을 받으려는 사심을 보이는 것도, 출전을 못 하거나 활약을 못 할 때 조바심을 내던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우리는 단순 반복 연습을 싫어하던 강백호가 얼마나 농구에 진지해지는지, 얼마나 연습을 즐기는지를 목격하게 된다. 그 결실이 드러난 산왕전 막바지, 백호는 큰 부상을 당하고도 경기를 뛰겠다며 일어선다. 통증에서 정신을 차린 백호는 채소연 앞에 서서 고백한다.
강백호: "정말 좋아합니다. 이번엔 거짓이 아니라구요."
앞서 첫 에피소드에서 강백호에게 물었던 채소연의 질문, "농구 좋아하세요?"에 대한 대답이 되어 강백호가 진정한 바스켓맨이 되었음을 증명하는 대답이다. 이 말은 그동안 농구를 좋아한다고 했던 백호의 말이 쭉 거짓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말이기도 하다. 백호에게 농구는, 소연이에게 보여주기 위해 좋아하는 척하기 위한 도구로써의 운동이었다. 강백호의 재능을 발견한 채소연의 안목은 놀랍지만, 백호가 농구를 못 하게 되면 소연이의 관심에서도 멀어질 가능성을 암시하기도 했다. 다시 말해 농구에 대한 강백호의 관심 역시, 채소연의 조건부적 인정이 변화함에 따라서 언제든지 변화할 수 있는 조건부의 애정이었던 것이다. 소연이를 위한 관심 도구로써 농구를 이용하는 한, 강백호가 농구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림3 『슬램덩크』 / 이노우에 타케히코 / 대원씨아이 / 리디북스
하지만 이제 강백호는 부상으로 농구를 잃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마주하면서, 농구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진실됨을 발견한다. 영원하지 않기에, 언제든 잃을 수 있기에 더욱 절실하게 농구를 사랑함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농구선수의 모습을 연기하던 거짓자기가 붕괴하고, 농구를 좋아하는 자신의 참자기를 발견한다. 위니콧이 말한 ‘참자기(true-self)’는 자신의 진정한 욕구와 느낌에 긴밀하게 교류하게 되며, 허위적인 순응으로부터 해방되는 상태이다. 무엇을 잃는 것이 더 두려운가에 대한 질문에서, 설령 부상으로 인해 앞으로 활약을 못 하게 된다고 하여도 그로 인해 소연의 관심을 잃는다고 해도 농구를 잃지 않겠다는 마음이 분명해진 것이다. 이후의 모든 것이 불분명한 강백호의 미래지만, 단 한 가지만큼은 예상 가능하다. 서태웅 못지않게, 채소연이 자기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상관없이 농구를 갈망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서태웅을 선망하던 채소연은, 그의 내면에 농구만 존재하기 때문에 자신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슬퍼한다. 강백호가 걸어갈 길에서도, 이제 채소연은 필요한 존재가 아니다. 그 때문에 강백호가 감춰온 연심의 고백으로도 보이던 이 장면은, 일방적으로 채소연을 짝사랑하며 유지되던 둘의 관계에 균열을 발생시키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제 백호와 소연의 관계는, 농구라는 공통분모가 존재할 뿐 조건부의 인정을 주고받는 관계가 아니게 된다. 비 조건적인 관계로의 전환을 통해서, 둘의 관계는 이전보다 더 진솔하고 성숙한 관계를 향해 나아갈지도 모른다. 강백호와 채소연 모두, 원하는 이에게 관심을 얻지 못한 갈망의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는, 연대자를 필요로 하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슬램덩크』에는 수많은 눈물의 지점들이 있지만, 가장 눈물 나는 이 두 장면으로 작품의 의의를 설명하기에는 충분하다. 사랑하는 대상을 외면한 채 자신을 속이고 진실하지 못하게 행동했었던 과오를 끝없이 반성하는 정대만. 무엇을 사랑해야 하는지 모른 채로 방황하던 삶에서, 진정한 자신을 맞이하며 앞으로 뛰어나가기 시작한 강백호. 두 사람의 모습들은 자기 안의 진정성을 마주하기 위해 오랜 시간을 돌아 다시 길을 찾은 방랑자의 모습이며, 그 과정을 목격하는 독자로서도 더 삶의 방랑 속에서 길을 돌아보고자 하는 마음이 고양된다. 그렇게 본다면 『슬램덩크』와 같은 만화를 펼치는 행위는 자신 안의 참자기를 확인하기 위한 의식적인 작업이 아닐까.

그림4 『슬램덩크』 / 이노우에 타케히코 / 대원씨아이 / 리디북스
『룩백』 : 만화를 보고 그리는 기쁨과 슬픔
후지모토 타츠키의 『룩백』은 교지에 4컷 만화를 그리던 후지노와 등교 거부 학생 쿄모토가 각자 만화를 그리다가 만나게 되면서 시작하는 이야기다. 펼칠 때마다 눈물이 나는 걸 알면서도 다시 찾게 되는 만화로, 아마도 최단 시간에 눈물을 뽑아내는 만화 세 손가락 안에 들 것이다. 쿄모토를 만난 후지노가 비 맞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처음으로 연대자를 만난 기쁨을 온몸으로 표현할 때도, 쿄모토가 후지노에게 "방에서 나오게 해줘서 고맙다"고 감사하는 순간에도 눈물은 흐른다.

그림5 『룩백』 / 후지모토 타츠키 / 학산문화사/DCW / 리디북스
하지만 언제나 눈물이 쏟아지는 장면은 쿄모토가 사고를 당한 후, 쿄모토의 방문 앞에 늘어선 스케치북의 대열을 마주한 장면이다. 후지노는 "쿄모토는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면, 죽지 않았을 텐데”라며 자신이 쿄모토를 만났던 것, 4컷 만화를 그렸던 일까지 후회와 자책에 빠지게 된다. 상실에 대한 애도 반응 중 죄책감이 일어나는 것은 흔한 일이다. 클라인은 우울 자리에 대한 설명으로, 편집-분열 자리에 빠졌을 때 시기심이 대상을 파괴했다는 인식의 결과로 죄책감이 발생한다고 보았다. 궁극적으로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죄책감을 통해 자아를 통합하는 원동력이 마련되기에 죄책감의 발생은 성장을 위해 필수적이다. 그러나 죄책감에 휩싸인 후지노는 자신이 만화를 그리고자 했던 열렬한 욕구 이유가 쿄모토를 잃은 원인이 되었다는 해석 때문에 만화를 그려야 하는 의욕을 상실해 버린다.
하지만 후지노와 쿄모토가 만나지 않고 성장한 평행 시간 속에서, 쿄모토는 혼자서 계속 그림을 그렸고, 가라테를 배운 후지노에게 도움을 받으면서 둘은 만난다. 여기에서는 쿄모토는 후지노와 상관없이 그림을 계속 그렸지만, 오히려 쿄모토라는 응원자가 없었던 후지노가 더 만화를 그리지 않았었다는 것이 드러난다. 누구보다 연대하는 동료가 필요했던 것은 오히려 후지노 자신이었던 것이다. 평행 시간에서 후지노의 도움으로 생존한 쿄모토가 그린 4컷 만화는, 만화의 독자 반응이 되어 다시 원래 세계의 쿄모토를 잃은 후지노에게 닿는다.
쿄모토의 방문을 열고 들어간 후지노는, 쿄모토의 방에 남겨진 물건들에서 쿄모토가 홀로 그림을 그려온 흔적으로 가득 차 있음을 발견한다. 어린 시절 쿄모토가 만화를 읽고 기뻐해 주었던 추억을 떠올리며, 자신이 쿄모토와 함께하지 않는 시간 동안에도 줄곧 쿄모토가 해준 응원의 힘으로 만화를 그려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렇게 두 사람이 방 안에서 함께 그리고 각자의 만화를 읽어주던 순간들 속에서, 왜 힘든대도 만화를 그리는지를 상기한다. 작가 자신은 슬픔을 참고 홀로 외롭게 그려내더라도, 독자는 작가가 그려내는 작품의 뒷모습에서 작가의 고독과 고립, 슬픔과 애도, 누군가와의 못다 한 가능성까지 상상하며 마음에 품어 낸다. 그런 독자들이 모여 작품을 나누고자 반응하는 새로운 힘을 만들어 내고, 그 힘은 외롭게 작업하는 고립된 작가에게도 전달되어 혼자만의 슬픔과 고통을 딛고 일어서게 만든다. 『룩백』은 연대를 잃은 이의 애도 과정을 담아냄으로써 그걸 목격하는 독자들에게 새로운 연대를 만들어 내고, 궁극적으로 연대의 확장을 공유한다.

그림6 『룩백』 / 후지모토 타츠키 / 학산문화사/DCW / 리디북스
『도서관의 대마법사』 : 떠나는 이를 위한 배웅의 눈물
책을 좋아하는 가난한 소년 시오는 마을에서 박해받는 이민족인 탓에 마을 도서관조차 출입하지 못하도록 차별받는다. 자신이 주인공인 이야기를 꿈꾸면서도 현실과의 괴리감에 좌절하기만 하던 시오였지만, 마을을 방문한 책을 지키는 전문가 '카프나' 세드나와의 조우로 변화가 생긴다. 세드나는 시오에게 '페이지를 넘기는 것은 다름 아닌 너 자신의 몫'이라며, '자신의 힘으로 이야기를 움직이고 세계를 바꾸라'고 말한다. 의기소침해 있던 시오는 카프나가 되기 위한 꿈을 갖고 성장해 나간다.

그림7 『도서관의 대마법사』 / 이즈미 미츠 / S코믹스 / 리디북스
이즈미 미츠 작가가 그린 『도서관의 대마법사』는 어린 소년 시오가 책을 지키는 전문가 '카프나'가 되기 위해 성장하는 판타지 모험 대서사시이다. 처음에는 마을 사람들에게 배척당하며 자신의 가능성을 의심하던 시오였지만, 꿈을 가진 시오의 진심은 사람들을 변화시켰다. 그들의 조력들이 모여 시오를 성장시켰고 카프나 시험을 통과하는 밑거름이 된다. 시오에게 체력을 키우게 만들고 세상의 지식을 전해준 마이스터 가넌, 어린 시오를 편견 없이 대해준 석공소 동료들, 시오가 더 넓은 세상을 향할 수 있도록 모든 지원을 해주던 시오의 누나, 여자애들이 책을 읽지 못하는 작은 마을에서 시오와 책을 나눠 보며 성장한 샤키아, 괴롭혔던 과거를 사과하고 친구이자 라이벌이 된 아키토, 일각수 쿠쿠오까지 모두가 작은 소년 시오가 큰 꿈을 가질 수 있도록 힘이 되어 준 연대자들이었다. 클리셰 가득하게 보이는 이야기가 특별하게 다가오는 것은, 그들이 꿈꾸던 많은 가능성을 작가가 공들여서 보여주기 때문이다.
모든 모험물에서, 주인공이 작은 세상이었던 고향 마을을 뒤로 하고 더 넓은 세상을 향해서 길을 떠나는 장면이 클리셰로 존재한다. 이 만화에서의 시오 역시 카프나가 되기 위해서 마을을 떠나게 되는 때가 온다. 그리고 그 장면이 다가올수록, 나는 시오를 떠나보내기 싫은 마을 사람들의 심정에 몰입하며 눈물이 흐르기 시작한다. 장대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 가는 시오를 보고 싶은 독자의 욕구와 별개로, 작가가 마련한 이 작별의 순간에서 시오를 붙잡고 싶은 마을 사람들 한 명 한 명의 시선에 머물며 눈물이 고이는 것을 막지 못한다.
특히 시오를 내심 짝사랑하던 샤키아가 자신의 연심을 참고 배웅하면서, “나를 잊지 말아줘”고 나직이 말하는 장면에서는 쏟아지는 눈물을 참기 어렵다. 샤키아는 세상을 향해 나가려는 시오의 꿈을 위해서, 시오에게 중요한 대상으로 남아 평생을 함께하고 싶은 자신의 감정적 욕구를 전부 참아낸다. 그렇게 시오의 기억 속 일부분만을 작게 소망하는 모습 자체에서 큰 꿈을 실현할 시오의 가능성을 믿는 샤키아의 사랑을 느끼게 된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을 통해 사랑이 보호하는 것이며, 책임 있게 행동하는 것이며,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것이며, 더 알아가고자 노력하는 것이라고 했다. 더불어 ‘사랑은 본질적으로 주는 것’이라고 했던 그 정의에 샤키아의 모습은 정확히 부합한다.
마을 사람들의 시오에 대한 감정은, 한편으로는 각자마다 소망했던 꿈에 근거한다. 각자 작은 마을에서 소시민적인 현실에 적응해 살지만, 큰 꿈을 꾸며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시오를 통해서 꿈의 연대자가 되는 것이다. 독자인 나 역시 시오의 연대자가 되는 장면들 속에서 자신이 꿈꿔왔던 것들을 다시금 돌아보게 된다. 어린 시절 언젠가는 시오의 광활한 시야나 샤키아와 같이 강한 마음들이 있었던 때가 존재했었지만, 지금은 현실에 치이며 안주한 듯한 아쉬움이 남아있다.
눈물을 참을 수 없는 건, 내가 자리한 현실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세상을 향하는 시오의 시선보다는 떠나는 시오를 바라보는 마을 사람들의 시선에 더 가까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가는 그런 마을 사람들조차 단순히 현실에 안주한 존재들이라 소홀히 대하지 않고, 하나하나의 이야기를 준비해 두었다. 샤키아가 가진 꿈이 작은 마을 안에 갇혀 있다고 해서, 시오가 가진 꿈보다 작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시오가 떠나더라도 마을 사람들은 이제 단순 배경이 아닌 시오가 꾸는 꿈의 연대자로 남는다. 덕분에 이 지점에서 흐르는 눈물들은 내 안에서 떠나보내거나 잊힌 것들에 대한 애도를 마주하면서, 동시에 그 안타까움을 참아내고 도전하는 이를 향한 응원에 가까울 것이다.

그림8 『도서관의 대마법사』 / 이즈미 미츠 / S코믹스 / 리디북스
『안녕이란 말도 없이』 : 전하지 못한 작별의 눈물
우에노 켄타로 작가의 『안녕이란 말도 없이』는 작가가 아내를 급작스럽게 떠나보내며 겪었던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상을 상세하게 기록한 작품이다. 서점에서 이 만화를 처음 접했을 때 즉시 구매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제목만으로도 이미 내 마음과 기억 속 어떤 감정들이 요동쳤기 때문일 것이다. 작품을 읽던 시점에서 3년 전쯤, 나는 둘째 누나를 떠나보냈었다. 누나의 사망 이유도 켄타로 작가의 아내와 비슷했다. 더불어 그때의 난 사귀던 연인으로부터도 이별을 통보받은 상태였다. 그런 상실의 감정 배경에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책을 읽으며 집에 오는 내내 홍수처럼 흘린 눈물을 기억한다. 만화에는 하나하나 나의 마음을 박제해서 옮겨 놓은 듯한 글들이 나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림9 『안녕이란 말도 없이』 / 우에노 켄타로 / 미우(대원)
장례 절차를 밟고 주변에 연락을 돌리는 등 사회적 의례를 따르지만, 작가는 현실감을 느끼지 못한다. 아내가 없는 집, 텅 빈 공간에서 그는 자신이 만들어 온 온전한 정체성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홀로 남겨진 그에게 현실이란, 어린 딸을 위해서 부지해야만 하는 괴로운 현실을 겨우 지탱해 가는 것에 가깝다. 그러다 작가는 자신의 경험을 만화로 그리겠다는 결심을 한다.
일반적이지 않은 작가의 결심은, 작가의 경험이 일반적인 상실이나 애도 상황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아내가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서 어떤 작별의 말도 나누지 못했으며, 이후에 이어지는 극심한 죄책감, 마지막 순간조차 마지막인 줄 몰랐다는 혼란과 후회의 플래시백까지 작가가 감정을 추스르거나 천천히 적응할 수 있는 여지가 없었다. 상실 자체가 심리적 외상의 요소를 포함하지만, 작가가 겪은 것은 일반적인 상실과 애도의 수준을 넘어선 갑작스러운 트라우마 사건에 가까운 것이다. 작품 자체의 의도가 트라우마를 치료하는 기법의 하나로 자신의 외상 사건의 서사를 자세히 기록해 나가는 내러티브 치료의 방향과도 일치한다.
누군가를 상실한 사람의 일상도 모두와 똑같이 이어지고, 누군가를 떠나보낸 슬픔도 현실의 뒤로 밀려난다. 작가 역시 재혼하면서 새로운 가정을 꾸리게 된다. 더 많은 상실의 경험들이 쌓이고 난 지금, 나 역시도 슬픔에 무뎌진 탓일지 다시 만화를 읽더라도 전처럼 눈물을 참지 못할 정도의 감정이 생기진 않는다. 이제는 중간중간 무덤덤하게 바라보는 장면들도 많다. 하지만 그런데도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서는 또 눈물을 참기 힘들다.
결국 작가가 고통스러운 기억을 마주하며 작품을 그려낸 목적은, 아내와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채로 떠나보낸 것에 외상과 후회를 직면하는 것, 그리고 제대로 작별 인사를 하지 못한 기회에 대해 애도하기 위함이다. 작가 자신의 외상을 극복하기 위한 기록에 가까운 이 만화가 남기는 의미가 특별할 수밖에 없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겪는 상실의 모습이 안녕이라는 말조차도 나누지 못하게 너무나 갑자기 찾아오기 때문일 것이다. 『안녕이란 말도 없이』는 충분히 애도하지 못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는 독자 모두를 위한 작별의 시간을 마련해준다. 할 수 있는 건 만화를 보며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것밖에 없지만,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이들과 감정으로 여전히 교류하고 있다는 증거로써 눈물은 남는다.
눈물을 통한 회복
'상담자들은 힘든 이야기만 들어야 하는데 힘들지 않나요?'라는 질문을 받기도 한다. 실제로 타인의 슬픔과 고통을 함께 체험하게 되는 치료자들은 대리 외상(vicarious trauma)을 겪는다고도 알려져 있다. 하지만 동시에 상담자는 내담자들이 궁극적으로 자신의 외상과 슬픔을 극복하는 과정에 참여하고 회복을 목격하는 일을 한다. 덕분에 타인의 회복을 통해 더 희망과 에너지를 발견하는 대리 회복(vicarious resilience)도 발생한다. 눈물이 나는 만화를 보는 이유 역시 같은 이유일 수 있다. 슬픈 만화를 보는 행위는 슬픔을 대리로 겪는 일일 수 있지만, 이야기들은 궁극적으로는 슬픔을 극복해 나간다. 전부 해소하지 못한 현실의 슬픔조차도, 만화는 대라 회복을 통해 극복될 것을 예고해 준다.
만화 속 인물들이 흘리는 눈물, 그리고 그들을 보며 우리가 흘리는 눈물은 각기 다른 결을 지니고 있다. 다양한 종류의 이 모든 눈물은 결국 무언가를 떠나보내는 '애도'의 과정이다. 상담실에서 많은 이들이 눈물을 참지 못할 때, 감정을 통제하지 못한 실패의 증거라 여긴다. 하지만, 이 만화들은 우리가 눈물을 통해 달성해 내는 것들을 보여준다. 자신을 직면하고, 상실을 마주하고, 과거의 나를 이해하며, 기억 속의 존재와 다시 연결되며, 현실을 수용하면서 회복으로 향해가는 무척이나 고결한 작업이라는 것을. 그 눈물들은 나의 정서 체계가 여전히 건강하게 살아있으며, 자신을 회복시킬 힘이 남아있음을 증명하는 가장 인간적인 증거이기도 하다. 우리는 우는 만큼 회복한다. 그렇기 때문에, 눈물이 날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책을 펼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