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풍선의 심리 (임상심리사의 만화 읽기)
6화-타자화된 자아의 초상
오랫동안 덮어두었던 기억들이 있다. 10대에서 20대에 걸쳐져 있는, 앞으로도 쭉 덮어두고 싶었던 어떤 부끄러운 흔적들. 타인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발 앞의 땅만 재촉하며 걸었던 시절, 지지 않기 위해 항상 모나게 반응하던 시절,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용기가 나지 않아 미니홈피만 살펴보던 시절. 내 안의 부끄러움과 혼란을 들킬세라 감추고 연기했던 옛 시절의 기억들, 거기엔 언제나 ‘타인을 갈구하며 나’와 그런 '나를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이 있었다. 돌이켜보면 내가 나를 기억하는 모든 순간이 결국 타인이 나를 보는 시선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왜 그렇게 남들 앞에서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고, 그토록 타인을 의식했던 것일까? 많은 시간이 지나 타인의 마음을 바라보고,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는 방식을 연습해 온 지금은, 그때의 내 모습들은 나와 단절된 것처럼 낯설게 느껴지기만 한다. 그럼에도 어느 날 문득 어떤 계기로 반추가 작동하면, 그 시절의 나를 다시 마주하며 수치심의 늪으로 빠져들도록 만든다.
그 계기는 대개 만화들이다. 최성민 작가가 그려낸 젊은 시절의 자화상 『좁은 방』, 부조리한 웃음 이면에 깔린 자학과 수치심을 직면케 하는 타니가와 니코 작가의 『내가 인기 없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너희들 탓이야!』, 병리적 인간 군상의 깊이 있는 묘사를 보여주는 야마모토 히데오의 『호문쿨루스』까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수치스러워 숨기려 했었던 자아의 기억을 다시금 꺼내 놓게 만드는 작품들이다. 이미 너무 늦었다고 생각은 들지만, 그동안 다룬 다른 작품들보다도 더욱 스포일러 주의가 필요한 작품들이기에 미리 양해를 구해둔다.
『좁은 방』 - 타자화된 자아의 대상관계
지방에서 상경해 좁은 원룸에서 살고 있는 미대 입시생 다예의 생활은 친구도 없는 미술학원과 원룸을 반복하는 것뿐이다. 재수로 인한 입시 부담감과, 거기에 더해진 미술학원장의 추근덕거림으로 스트레스를 받던 와중, 옆집 204호에 이사 온 남자에게 한눈에 반한다. 방음조차 잘 되지 않은 벽을 사이에 두고 다예의 마음은 온통 옆집 남자에게 향하게 되고, 우연한 만남을 기대하는 정도였던 짝사랑이 점점 정도를 넘어서 옆집 남자가 버리는 쓰레기를 뒤지는 등 집요한 모습을 띠게 된다.
"어째서 나의 로맨스는 이렇게 음침한 걸까?"

그림 1 『좁은 방』 / 최성민 / 송송책방
주인공 다예가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이다. 최성민 작가의 『좁은 방』의 표지에는 주인공 다예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어 있다. 표지를 통해 전달 받는 것은 불안이 가득 담겨있는 다예의 흰자위 가득한 사백안이다. 작품 속 다른 인물들이 평범한 눈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과 달리, 다예의 눈은 세상을 바라보는 채로 그 속에서 겪고 있는 위태로운 정서를 동시에 드러낸다. 다예의 눈은 부조리한 세상을 마주하며 세상에 의해 자신이 노출되고 평가됨을 목격한다. 동시에 무기력하게 반응하는 자신을 본다. 그나마 다예가 지내는 좁은 방은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도망쳐 쉴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다.
좁게 다닥다닥 붙어있는 구조 때문에 귀만 기울이면 옆방에서 나누는 말소리의 의미가 탐지되는 침해적인 공간. 하지만 이 좁은 방은 단순히 물리적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다예의 심적 상태를 반영한다. 고립되어 있는 다예에게는 원장의 접근과 학원 동기 인영의 뒷담화에 대한 불만스러운 감정을 표출할 곳이 없다. 교류할 대상이 없기에 다예는 더욱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한다. 표출되지 못한 불만스러운 감정은 가장 만만한 대상, 자기 자신의 내부로 향한다. 강박적으로 손을 씻는 것은 언어화를 통해 표출하지 못한 것에 대해 감정이 행동으로 외재화되며 다예 자신을 다그치는 의식에 가깝다.

그림 2 『좁은 방』 / 최성민 / 송송책방
관계적으로 고립되어 있던 다예는 204호 남성을 보자마자 한눈에 반한다. 세상에 대한 고립과 세상에 대한 분개의 양극 사이에 놓인 다예에게, 204호 남자의 등장은 스트레스 넘치는 현실을 잊을 수 있는 심리적 도피처가 된다. 외모 말고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지만, 매일 그의 행적을 쫓고 그의 인격과 취향에 관심을 갖게 된다. 다예에게 결핍된 것은 자신감이 아니라 자기감을 유지하기 위한 타인이다. 본질적으로 결핍된 것은 외모나 말재주가 아니라 그저 일상적인 '관계와의 접촉' 자체다. 204호 남자는 다예의 안식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심리적 결핍을 채워주는 거울로 작용한다.
"짝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알고 싶고, 그 사람을 못 갖는 결핍만큼 상대의 뭔가를 소유하고 싶은 충동은 자연스러운 마음일 거야."
"얇은 벽 너머 나란 사람이 살고 있는 걸 인식할까? 나를 알까? 나는 204호를 조금… 많이 아는데."
짝사랑하는 다예가 204호 남자에게 투사한 것은 이상적이고 완전한 자기대상(self-object)의 환상이다. 입시 스트레스, 학원장의 성희롱, 학원 동기들의 배제, 환경적 고립으로 인한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해주고 보호해줄 이상적인 존재로 204호 남자는 점차 이상화된다. 다예는 그의 쓰레기를 뒤지고 그의 담배 꽁초를 주워 피우며 자신이 만든 이상적 대상의 환상의 실체 일부라도 소유하려 한다. 현실의 대상이 이상을 따라갈 수 없기에 그의 흔적만을 소유함으로써 관계의 환상만을 유지해 나간다. 그 모든 과정이 은밀한 것은 다예 스스로도 그것이 자신의 욕망을 투사한 것임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날이 있다. 자신이 너무 싫어서 괴롭히고 싶은 날."
"어쩐지 나에게 못되게 굴고 싶었던 그날. 204호가 버린 꽁초에 불을 붙여 난생처음 흡연을 했다."
짝사랑에 빠진 여자아이의 심리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진정한 관계가 아니다. 204호 남자가 버린 꽁초로 흡연을 하고, 쓰레기를 뒤지는 스토킹을 벌이는 것 모두 다예는 짝사랑이라 이름 붙이지만 자기 안의 필요성에 의해 다른 이에게 투사된 감정일 뿐이다. 이상화된 대상과의 관계는 실제적인 관계로 이어지기 어렵고, 결과적으로 그들에게 다시금 필연적인 공허감을 남기게 된다. 라캉은 우리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자아를 형성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거울 속 이미지조차 이미 나의 외부에 있는 것, 타자화된 나이기에 우리가 결코 직접적으로 자기 자신을 경험할 수 없다고 하였다.
다예는 204호 남자를 통해 현실의 고통을 회피한다. 하지만 그 환상 속에서도 다예는 자신의 음침한 행위를 목격하게 되고, 물리적으로 혼자 있을 때도 초자아라는 내면화된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이제 다예가 느끼는 것은 타인의 시선 아래 대상화되는 공포에 더해 자신의 은밀한 행위들이 상대에게 들춰질 것에 대한 불안의 가속화이다.
다예는 술에 취해 문 앞에서 자고 있는 204호 남자를 발견한다. 남자를 부축하다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그의 집까지 발을 들여놓게 된다. 그리고 다예가 본 것은 자기 자신의 거울이었다. 벽면 가득 집착적으로 붙어 있는 한 여성의 사진들. 다예 자신이 204호 남자의 쓰레기를 모으듯, 그 역시 타자화된 다른 대상을 혼자만의 좁은 방에 가둬 둔 채 쫓고 있었다. 다예가 204호 남자와의 실제 관계보다 그의 쓰레기를 통해 환상적 관계를 유지했듯이, 204호 남자는 이상화된 구원자가 아니라, 자신과 똑같이 좁은 방의 고독한 존재였다.
다예가 마주한 거울은 이상화했던 대상이 자신과 다르지 않은 결핍된 존재임을 깨닫는 순간이자, 동시에 자신이 투사했던 '완전한 대상'의 환상이 붕괴하는 순간이다. 자신의 음침한 사랑이 그대로 반사되어 돌아와 자신을 비출 때 비로소 이상화된 타자화 속을 헤엄치던 스스로의 모습을 알아차린다. 독립된 실체인 204호 남자의 시선이 자신이 바라는 것과 다름을, 동시에 다르지 않음을 자신의 눈을 통해 목격하며 분리 개별화한다.
장 폴 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말했다. 타인의 시선은 '나'라는 존재를 욕구의 대상으로 환원한다. 타인의 눈에 비친 나는 이미 나의 주체성을 잃고 사물과 다르지 않다. 다예가 겪은 일은 거기서 더 나아가 타자화된 시선이 거울이 되어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는 순간이다. 자신의 어떤 모습을 스스로가 싫어하는 동시에 자신이 싫어하는 대상의 어떤 부분을 좋아할 수 있다는 것, 심지어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의 어떤 부분을 끔찍히 싫어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이와 자신은 다를 수도 있다는 것, 자신이 싫어하는 대상과 자신이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 파편화된 모습들이 하나로 이어지는 때가 온다. 자신의 모습들에서 죄책감을 경험하기 시작하고, 우울해지기 시작하는 때로 우리 자신의 모습에서 양가성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이다.
다예는 그 비밀스러운 기억을 입시 스트레스의 뒤편으로 묻어둔 채로 입시에 성공한다. 1년이 지나 대학생이 된 다예에게는 친구들이 생겼고, 이성과도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우연히 길에서 204호 남자를 다시 목격한 어느 날, 다예는 창문 너머 담배를 피우는 누군가와 눈이 마주친다. 일방적으로 바라보기만 하던 1년 전과 달리, 이제 다예는 바라보는 동시에 바라보여짐을 수용한다.
『내가 인기 없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너희들 탓이야!』 : 내현적 자기애의 현상과 탈출

그림 3 『내가 인기 없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너희들 탓이야!』 / 타니가와 니코 / 대원씨아이 / 리디북스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과 애니메이션 등의 서브컬쳐에 빠져 성장한 오타쿠 여고생 토모코 쿠로키는 자신이 연마한 기술로 고등학교에 진학하면 자연스레 인기가 많아질 것이라 생각한다. 당연스럽게도 그런 일은 없었고 사교성 부족하고 인기 없는 토모코가 전혀 친구를 만들지 못한 채로 학교 생활 속에서, 혼자만의 번뇌에 빠져 살아가는 일상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내가 인기 없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너희들 탓이야!(이하 내인생탓!)』는 사회성 부족한 외톨이 토모코의 학교 생활 부적응기를 보여주는 피폐 일상물이자 토모코와 얽히게 되는 인연들 간의 분투를 보여주는 학원코미디물이다. 이야기의 주인공임에도 토모코가 겪는 사건들에 크게 동정이 가지 않는 것은, 교우 관계에 대한 노력 없음에 더해 현실에서 괴리된 음란한 공상에 몰입하거나 괴팍한 인격 구조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토모코의 내적 언어들은 자기비하적인 동시에 냉소적이고 가학적이다. 남동생에게는 언제나 제멋대로 굴고, 단 하나의 친구를 만날 때마다 희롱할 생각만 한다. 낯선 친구들 사이에서 그런 생각과 언행이 튀어나오는 것을 막으려다 보니 쭈뼛거리며 의사 표현을 제대로 하지 못하기 일쑤다. 현실에 충실하지 못한 채로 다른 친구들을 무시하며 깔보는 토모코에 대한 지독한 묘사로 인해서 주변에 이 만화를 재밌게 본다고 말하는 것에 자신이 생기지 않을 정도다. 심지어 만화의 제목처럼 그녀는 자신의 언행에 문제가 있다고 인정하지 않고 세상에 대한 억하심정만을 가지고 있다. 물론 만화에서는 자업자득으로 토모코 자신이 저지른 행위의 결과를 스스로 감내해야 하는 벌을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때문에 그런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폭소를 터뜨리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연민과 짠한 느낌이 유발된다.

그림 4 『내가 인기 없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너희들 탓이야!』 / 타니가와 니코 / 대원씨아이 / 리디북스
토모코는 끊임없이 상상한다. "생각보다 귀여운 거 아냐?" "나를 이상하게 보는 거 아냐?" 과도한 자기고양과 과도한 자기비하 모두 현실과 괴리되어 있다. 실제로는 다른 이들 대부분은 토모코에게 그만큼 관심을 갖거나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다. 토모코가 두려워하고 또 갈망하는 타인의 시선은 대부분 토모코 자신의 머릿속에만 존재한다.
나르시시즘의 병리적 개념을 현대적으로 정립한 오토 컨버그는 내현적 자기애(covert narcissism)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외현적 나르시시스트가 흔히 말하는 과대하고 과장된 자기를 드러내는 자아도취자의 모습이라면, 내현적 나르시시스트는 표면적으로는 열등감과 수치심, 사교성 부족한 모습을 보이면서, 내면 깊은 곳에는 "나는 특별하다"는 과대 환상을 품고 있는 것으로 정의된다. 토모코의 모습이야말로 만화적으로 그려진 내현적 자기애의 전형을 보여준다.
토모코가 오타쿠 지식으로 무장하듯이, 지적 담론이나 매니아적인 정보, 희귀한 컬렉션 등으로 무장하는 것도 내현적 자기애의 모습 중 하나이다. 게임, 애니메이션, 인터넷 밈 등 서브컬쳐 지식들은 그것을 전혀 모르는 또래 사이에서 내적으로 특별하다는 감각을 유지하게 만든다. 하지만 매체 의존적인 이 지식들은 현실 교우 관계에서는 대부분 통하지 않는다. 매체는 개인을 만족시키려는 목적으로 빠르고 즉각적인 욕구 충족을 시켜줄 뿐, 개인과 개인 사이의 이해를 돕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 교우 관계는 매체의 반대에 있다. 즉각적이거나 욕구 충족적이지 않으며, 복잡하고 상호작용적이면서 깊은 몰입보다는 느슨한 유대에 가깝다.
토모코는 게임에서 유능감이 발휘된 방식대로 행동하려다가 현실과의 괴리만 느끼고, 괴리감이 커질수록 실패의 경험조차 회피하려 한다. 실패가 두려워 현실에 참여하지 않으니 자신의 방식에 교정이 필요하다는 것조차도 깨닫지 못한다. 그렇게 상상 속, 내적 현실에서의 고양감만을 유지하고자 한다. 현실에서는 누구도 말을 걸어오지 않고 스스로도 사회적 상황을 회피하고 두려워하지만, 동시에 "하지만 나는 특별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이 모순을 유지하기 위해 토모코의 내면에서는 끊임없이 타인을 평가절하하며 조소하는 말들이 이어진다. "리얼충들...", "평범한 애들...", "오타쿠들…". 모든 대상이 타자화되어 있는 동시에, 토모코 자신의 욕구 충족에 기여하지 못하기에 그저 비하의 대상으로 격하되는 것이다.

그림 5 『내가 인기 없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너희들 탓이야!』 / 타니가와 니코 / 대원씨아이 / 리디북스
토모코가 보는 타인은 투사된 타인이다. "사람들이 날 무시해"라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토모코 자신이 먼저 타인을 무시하고 평가한다. 이 투사를 통해 토모코는 자신의 공격성을 외부로 돌리고, 상상 속 타인의 시선에 반응하며 혼자만의 연극을 이어간다. 분노하고, 수치스러워하고, 복수를 꿈꾼다. 존재하지 않는 타인의 시선과 싸우면서, 실제 타인은 보지 못한다. 이 안에서 자신이 보는 타인, 타인이 바라볼 자신 모두 예상 가능한 것이기에 내적으로 여러 감정이 발생함에도 불구하고 그녀 내면은 안정적으로 유지된다.
노골적이고 자세하게 묘사된 토모코의 거친 내적 언어들이 나를 기시감으로 이끈다. 토모코의 내면을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마도 언젠가 어느 때 나의 내면에서도 일어나던 일이기 때문이다. 타인의 관심을 바라면서도 그 관심의 진심을 믿지 못하고 동정이지 않을까 의심의 눈으로 보았다. 관심을 받아본 적도 없으면서 드물게 관심을 가져주는 타인에게 등급을 매기듯 까다롭게 따져댔다. 상대의 인정을 바랄 때마다 자연스럽게 유발되는 열등감의 처지가 싫었다. 스스로의 위치를 높이려 노력하기보다는, 그들을 격하시키는 것에 자신의 내면이 익숙하다는 사실이 수치스러웠다. 그에 비하면 토모코는 자신의 모습을 자신의 개성으로 만들어 간다.
잊혀져 있던 어떤 기시감을 토모코에게 발견하게 되면서, 나에게 분별력 없이 폭주할 뿐인 개그 캐릭터로 존재하던 토모코의 성장을 바라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 토모코는 2학년까지 현실 충돌의 자학적인 전개를 거친 후, 이야기의 노선이 변화하면서 갑작스럽게 인기의 중심인이 되는 만화적 환상에 가까운 학창 시절로 진입한다. 토모코 자체의 인격은 변화하지 않았다. 여전히 어색하고, 여전히 이상하다. 하지만 친구들이 토모코에게 관심을 갖고 알아가기 시작하면서 토모코 역시 더 눈치 보고, 더 조심하고, 아주 조금은 신중한 행동을 만들며 적응해 간다. 그런 이야기가 꼭 만화적이라고만 할 수도 없는 것은, 주변인들과의 작은 교류가 쌓이며 변화하는 것이라고, 나의 경험 역시도 전적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타인들은 생각보다 '나'라는 자아에 관심이 없다. 때문에 과도하게 의식해서 반응하지 않아도, 크게 마음 두지 않기도 한다. 그저 자주 만나고 교류하면서 유대해 나간다. 토모코에게 처음부터 필요했던 것도 자기를 필요 이상 숨기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있는 그대로 자기를 공개하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림 6 『내가 인기 없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너희들 탓이야!』 / 타니가와 니코 / 대원씨아이 / 리디북스
『호문쿨루스』 : 왜곡된 눈으로 바라보는 왜곡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성 나코시 스스무는 낮에는 신주쿠 공원에서 노숙자들 사이에서 교류하고, 밤에는 자신의 고급 외제차 안에서 시간을 보낸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경계선의 존재인 나코시를 관찰하던 의대생 마나부가 기묘한 제안을 한다. 두개골에 구멍을 뚫는 '트리퍼네이션'이라는 수술을 받으면 거액을 주겠다는 것. 수술 이후, 나코시의 눈에는 기괴한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야마모토 히데오 작가의 『호문쿨루스』는 뇌 수술 후 타인의 무의식을 반영하는 상징적 이미지를 보게 된 주인공의 여정을 통해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원적 질문을 던지는 심리 스릴러이다. 인지심리학에서 말하는 ‘대뇌피질 호문쿨루스(cortical homunculus)'는 뇌에 분포된 신체 운동-감각 신경세포의 크기를 반영하여 인간 형상으로 재구현한 뇌 속 신체지도 모형이다. 만화는 개개인의 심리적 성장에 따라 뇌의 감각 피질 구조가 다르게 발달된다면, 뇌 속 신체지도 역시 그 형체가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라는 가정을 바탕으로 그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그림 7 『호문쿨루스』 / 야마모토 히데오 / 대원씨아이/DCW / 리디북스
병원 임상심리실에서 수많은 환자들의 심리검사를 실시하게 되면 『호문쿨루스』에서 보이는 모습과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는데, 실제로 환자들의 심리적 요인들이 그림에서 특징적으로 다르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나코시 자신이 설명하듯이, 그가 보게된 것은 초능력이 아니라 상징화된 심상으로 결국 상징이며 그것을 바라보는 자의 해석이 필요한 것인데, 심리검사 역시 그런 해석 단계를 거침을 고려하면 작가의 관점은 임상심리학적임을 알 수 있다. 즉, 트리퍼네이션으로 얻게 된 나코시의 능력은 심리평가를 상징하며, 나코시가 호문쿨루스들과 접촉하며 변화를 이끌어 내는 것은 심리치료 과정의 시각화에 가깝다. 때문에 만화 속에서 주요한 이야기 전개의 근거가 되는 내용들은 다른 어떤 작품들보다 임상심리학의 이론들을 많이 적용해 볼 수 있다.
나코시가 첫 번째로 접촉한 손가락을 자르는 로봇의 호문쿨루스를 보고 그의 심리적 트라우마를 해소해주게 되면서, 상담자와 내담자의 구도로 심리치료적인 이야기로 전개된다. 나코시가 치료자의 입장에서 호문쿨루스를 볼 때, 나코시는 상대방의 가장 은밀한 비밀을 들춰 보는 절대적인 인식론적 우위를 가지게 된다. 보지만 보여지지 않는 위치를 점유하게 되며, 거기에 머문다면 그것은 결국 관음증의 욕구와 다름없다. 하지만 라캉은 시선이 언제나 양방향적이라고 지적했다. 내가 세계를 볼 때, 세계도 나를 본다. 당신이 심연을 들여다본다면, 심연도 당신을 들여다본다. 나코시 역시 호문쿨루스와 접촉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자기 과거의 이야기를 꺼낸다. 나코시가 타인의 왜곡을 볼 때, 그는 자신의 왜곡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림 8 『호문쿨루스』 / 야마모토 히데오 / 대원씨아이/DCW / 리디북스
이후 모래인간 호문쿨루스 여고생과 나코시에게 트리퍼네이션을 해줬던 마나부의 호문쿨루스와 접촉하는 과정 속에서 나코시는 스스로도 깨닫는다. 자신이 호문쿨루스들의 상징과 기호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그것들이 자신의 마음 안에도 똑같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타인의 호문쿨루스를 본다는 것은, 결과적으로는 자기 안의 기호로 만들어진 호문쿨루스의 시선을 통해서 상대를 바라보는 것이다. 나코시는 자신이 보는 기괴한 모습들이 결국 자신의 것임을 깨달으면서, 자신의 왜곡된 내면을 마주하고자 하는 마음과 회피하고 싶은 불온한 마음의 양가성 사이에서 방황한다.
치료자와 환자의 경계선에 서 있던 나코시는 마나부의 호문쿨루스를 탐색하던 중 결국 자신의 과거가 튀어나오게 된다. 회상을 통해 드러나는 나코시의 모습은 극단적이다.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뱉은 못생겼다는 말로 인해 추남이라는 열등감으로 아무런 추억조차 없이 땅만을 바라보며 살았다. 잘 생겨지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여 성형을 해서 과거를 지운 채로 유능한 샐러리맨으로 살았다. 하지만 삶이 거짓말에 물들면서 자신의 얼굴조차 완전히 잊어버린 나코시는 다른 이들이 사랑하는 것이 자신의 모습인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었고, 그토록 원했던 성공적인 삶을 거머쥐었지만 어떤 이와도 정서적인 접촉을 하지 못한 채로 자위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림 9 『호문쿨루스』 / 야마모토 히데오 / 대원씨아이/DCW / 리디북스
나코시에겐 그나마 추남이던 자신을 사랑해주고 마음을 바라봐준 나나코라는 여자친구가 있었음을 깨닫지만, 그녀 역시 추녀였기 때문에 기호화된 욕망을 포기할 수 없던 나코시는 결국 성형을 해서 나나코에게 도망쳐 과거를 지운 뒤 사회적으로 성공한다. 나코시는 호문쿨루스를 통해 자신의 문제들을 직면하게 되고, 나나코를 찾아내며 화해한다. 하지만 나코시 스스로가 자신을 사랑한 적이 없었고 타인을 도구로만 취급하는 모습은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타인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때문에 결말에서 드러나듯, 나코시가 선택한 것은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단절되어 자기에 대한 사랑의 시선으로만 가득 차있는 상상으로의 도피였다. 호문쿨루스를 통해 타인의 상처와 공명하는 능력을 발견했지만, 자기를 아끼지 못하는 시선으로 타인을 바라보는 것은 관계가 아니라 공허한 자기위로일 뿐이다.
여기까지의 나코시의 이야기 대부분이 라깡의 이론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심리 묘사에 적용 가능하다. 라깡에 따르면 인간이 상상계의 발달로 자아를 감지하지만, 그것은 허상에 불과하며 생각은 세상으로부터 주어진 기호이며 자아 역시 증명할 수 없는 환상이라 주장한다. 기호로 이루어진 현실의 상징계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삶에서, 자아가 욕망이라 여기는 것들은 실제로는 외부로부터 주입되고 교육된 기호이다. 자아를 발달시키는 중대한 존재인 부모와 사회가 자신들의 가치에 따른 욕망을 아이에게 투영하여 학습시키기 때문이다. 그렇게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타인을 모방하는데, 이때 자아는 타인보다 타인의 욕망을 기호화하며 내재화는 것이다. 기호화된 욕망들은 프로이트가 말한 결핍으로 인한 추동의 욕구와는 달리 충족할 수 없는 근원적 결핍이 존재한다. 프로이트는 성욕을 삶의 근원적 욕구인 리비도로 보았지만, 라깡은 성욕조차도 기호화된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성관계를 통해 획득하는 것은 각자 자신의 기호화된 욕망이지 서로를 만족시키지 못한다고 보았다.
나코시가 결국 마주해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호문쿨루스였다. 자신이 텅 비어있는 사람이라는 것, 거짓 자기로 자신조차 속이고 살아왔다는 것, 자신은 허위이면서 상대에게는 진심을 바랐다는 것, 상대가 진짜 자기를 바라봐주기를 원했지만 정작 자신은 여전히 자신의 문제를 타인과 세상에게 전가하고 있었다는 것. 마지막까지 나코시는 타자의 시선을 내재화하지도,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지도 못한 채로 세상에 책임을 돌린 결과로 비극에 빠진다. 나는 타인을 대상으로 볼 수 있지만, 나 자신을 주체로서는 경험할 수 없다. 나의 존재를 정당화하려면, 결국 타인의 시선과 눈을 마주치고, 타인에게 자신의 자아를 보여주어야 한다.

그림 10 『호문쿨루스』 / 야마모토 히데오 / 대원씨아이/DCW / 리디북스
각자의 좁은 방에서 나오기
다예, 토모코, 나코시의 모습에서 나는 나를 본다. 상담 장면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타인의 시선을 두려워하고, 타인을 경멸하면서도 인정에 목말라하는 모순의 모습을 흔히 본다. 그 모순은 나에게도 있다. 도움이 되고자 노력하는 상담 장면에서 도움을 주는 뿌듯함을 느끼면서도 자신의 무력과 부끄러움, 치부를 흔히 직면한다. 내담자의 투사를 받아주면서도 동일시되지 않고, 이상화를 비추면서도 불완전함을 드러내고, 공격을 견디면서도 관계가 파괴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은 어렵다. 상담자는 내담자와 다른 시선을 가진 존재가 아니며 그저 같은 시선으로 바라볼 뿐이다. 하지만 그런 이 상호적 시선 속에서 타인의 시선 아래 있으면서도 주체성을 잃지 않을 수 있음을 경험한다. 그건 상담자인 나에게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피할 수 없는 조건이라면, 조금 더 타인의 시선이 가진 무게를 가벼이 여길 필요가 있다. 자신이 가진 욕망이 기호화된 것, 타자화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런 기호에 빠져 있는 이유를 나열하는 것에도 의미가 있다. 타자화된 기호들의 욕망의 집합들 안에도 세분해 살펴보려 애쓰다보면 그 안에 담겨 있는 개인 고유의 감정과 정서, 감각들을 발견할 수 있다. 타인은 지옥이다라고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타인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이 역설을 받아들이는 것, 보는 동시에 보여지는 것을 견디는 것. 그것이 좁은 방에서 나오는 길이다.
다예와 다르지 않게, 우리 각자에게는 자신만의 좁은 방이 있다. 최성민의 『좁은 방』, 타니가와 니코의 『와타모테』, 야마모토 히데오의 『호문쿨루스』를 통해 그 시절의 자신을 반추할 수 있었다면, 그 좁은 방은 우리를 성장시켰다는 증거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