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에서 역사 속 소수자를 표현하는 방식 : 웹툰 <녹두전>을 중심으로
서문. 실존하는 소수자, 실화와 허구의 경계를 넘어
소수자는 언제나 존재한다. 이는 현재에도, 과거 역사에도 통용된다. 시대극에서 작가는 다양한 방식으로 소수자를 구현한다. 인물에게 소수자성을 부여하여 그 집단을 상징하게 만들기도 하고, 소수자성을 띨 수밖에 없는 곳으로 공간적 배경을 설정하기도 한다. 앞서 살펴본 <베르사유의 장미>의 로자리 라모리엘이나 <정년이>의 권부용, 윤정년이 그 시대의 소수자를 상징하는 인물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프랑스 혁명을 배경으로 하는 만화에서 로자리 라모리엘은 굶주린 파리 시민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로자리는 그가 짝사랑했던 오스칼이나 남편 베르날처럼 총이나 펜을 들지 않는다. 하지만, 유혈이 낭자했던 프랑스 혁명에도 끈질기게 살아남아 역사를 목도하고 내일을 살아가는 강인한 여성이다. <정년이>의 권부용과 윤정년 역시 그 시대에 억압받았던 성소수자 여성 예술가이다. 그들은 작품 내내 예술가로서 갈등하고 서로를 응원하며 사랑한다.
작가들은 시대극에서 끊임없이 사회에서 소외되는 이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한다. 이들은 역사에서 핍박받는 자를 대표한다. 그들은 함께 여러 사건을 경험하며 부조리한 현실을 깨닫고, 소리치고, 행동한다. 이렇듯 시대극 장르 만화에서 소수자는 작품의 메시지를 독자에게 전달한다. <녹두전(혜진양 작)>은 과부로 변장한 남자와 기생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시대극 만화이다. 하지만 동시에 조선에서 소외되고 차별받던 기생과 과부의 연대가 돋보이는 작품이기도 하다. 본 작품을 중심으로 시대극 만화가 역사 속 소수자를 표현하는 방법에 대해서 담론을 나누고자 한다.
1. 기생과 과부, 그리고 버려진 아이가 모이는 공간의 특수성
우선, 본 작품에 초점을 맞추어 소수자를 구현하는 방식에 대해 논의하기 전에 소수자가 무엇인지 정의할 필요가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사회적 소수자’를 ‘현시대에 신체적, 문화적 특징에 의해서 식별 가능하고, 권력에서 열세이며, 차별적 대우를 받으며, 소수자 집단 성원으로서의 의식을 갖는 사람들’이라고 서술한다. 드워킨은 소수자를 정의할 때 네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소수자는 다른 이들과는 극명하게 구별되는 무언가를 갖는다. 그리고 사회적인 측면이나 경제적인 측면에서, 혹은 정치권력에서 다른 이들보다 열세하다. 소수자는 소수자로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차별적인 대우를 받는다. 소수자는 집단의식을 지닌다. 주류를 이루는 이들이 소수자에게 가하는 폭력과 차별은 지속성과 반복성을 지닌다. 이러한 특징은 소수자의 연대를 강화하며 집단의식을 확장하도록 만든다.
조선시대의 과부와 기생은 앞서 언급한 소수자의 네 가지 조건에 부합하는 존재이다. 과부와 기생은 조선에서 주류가 되는 이들과는 확연하게 구별된다. 과부는 남편을 잃었으며, 기생은 신분이 미천하다. 따라서 식별 가능성을 지닌다. 또한, 과부와 기생은 권력에서 열세하다. 작중에서 과부는 남편을 따라 자결하기를 강요받고, 어떤 기생은 권력자 남성에 의해 살해당한다. 조선에서는 과부이거나 기생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차별적 대우를 받는 상황 역시 존재한다. 마지막으로 과부와 기생이 연대하며 살아가는 마을, ‘과부촌’이라는 공간적 배경은 소수자의 집단의식을 반영한다. 따라서 과부와 기생은 조선시대의 소수자이다.


본 작품의 시작은 과부 ‘전녹두’로 변장한 사내 ‘이덕’이 몸종 ‘황태’로 변장한 형 ‘이체’와 함께 과부촌으로 향하는 장면이다. 그들은 모종의 이유로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으며, 그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분장을 하고 과부촌에 숨어든다. 그러다 과거에 자신과 얽혔던 동주가 기생으로서 화초를 올린다는 소식을 듣는다. 문제는 박 영감이 상대 남성이었던 것. 그는 기생이 되기 위해 화초를 올리려던 이슬이를 잔혹하게 살해했던 전적이 있다. 결국 이덕은 동주를 수양딸로 삼아서 박 영감에게서 구출해 낸다. 본 작품은 이덕이 동주의 양어머니가 되어 과부촌에 정착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과부촌의 이방인 이덕과 이체가 마을 공동체 일원이 되는 과정이 그려진다. 과부촌은 조선에서 버림받거나 천대받는 여성들이 모여 사는 공간이다. 그들이 교류하는 마을 사람들은 모두 과부와 기생이다. 과부촌이라는 배경은 조선 사회에서 비주류였던 이들이 주류로 전복될 수 있는 특수성을 지닌다. 특히 산 절벽의 과부 바위에 담긴 소수자성은 주목할 만하다. 작중 과부 바위는 절벽에서 자살하는 과부들이 너무 많아서 그들의 넋을 기리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세운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본 작품에서는 과부 바위의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여성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죽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는 이들이다. 남성 중심 사회인 조선에 의해 자결을 강요받거나 살해당할 위기에 처한다. 표면상으로 그들은 스스로 과부 바위 절벽에 오르기를 선택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가부장제가 그들을 그곳으로 이끈 것이다. 그들의 죽음은 자살이 아닌 타살이다.
과부 바위에서 뛰어내린 대표적인 인물은 고사리다. 동주의 양어머니가 된 이덕은 집값이 저렴한 마을 폐가를 얻어서 동주, 이체와 함께 거주한다. 하지만, 집값이 다른 곳보다 저렴했던 이유는 눈깔귀신이 출몰한다는 소문 때문이었고, 그들은 두려움에 떤다. 눈깔귀신의 정체는 고사리라는 이름의 과부로, 폐가에서 살아가는 중이었다. 고사리는 한쪽 눈이 생득적으로 하얗다. 그는 한 남자와 사랑에 빠져 혼인하고, 그의 아이를 갖는다.
그러나, 남자는 고사리를 두고 먼저 세상을 떠나버렸고, 시아버지의 증오는 고사리를 향한다. 고사리는 살아남기 위해 과부촌으로 도주한다. 고사리가 낳은 아이는 딸이었고, 기방 행수였던 친구 백설기에게 아이를 맡긴다. 시아버지는 어쩌면 고사리의 아이가 장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과부촌까지 찾아온다. 하지만, 아이가 죽었다는 말에 시아버지는 고사리가 쓸모없다며 분개한다. 고사리는 시아버지의 바람대로 절벽에서 추락한다. 시아버지는 그 자리에 열녀비를 세웠고, 그 열녀비는 과부 바위가 된다.
하지만, 고사리는 살아남는다. 고사리는 처음부터 절벽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과부 바위의 절벽은 인간이 추락하면 사망할 정도의 높이지만, 그 밑에 떨어지는 사람을 살릴 수 있을 정도로 절벽과 밀접한 바위가 존재한다. 고사리는 시아버지의 눈을 피해 근처 동굴에서 숨어 지내다가 그가 떠나자, 폐가에 거주한다. 고사리는 그렇게 고사리로서의 삶을 마치고 폐가의 눈깔귀신이 된다.
행수 백설기는 이런 방식으로 가부장제에 희생된 과부들을 돕는다. 그들은 과부이기 때문에 자결을 강요당하거나, 어린 나이에 늙은 남자에게 팔려 가서 맞고 살다가 과부촌으로 도망 나온 이들이었다. 그들 죽지 않는다면, 마을 전체가 뒤집힐 위험에 처할 것이다. 그렇기에 행수로서 마을을 지키면서 과부들을 도울 방법으로 과부 바위를 선택한 것이다. 백설기는 자살로 위장한 다음, 그들이 살아갈 수 있게끔 돕는다.
작가는 과부 바위 절벽이라는 공간을 영리하게 이용한다. 과부 바위의 절벽은 소수자들의 저항과 생존을 위해 가부장 중심 사회의 과부라는 신분을 탈피하고 다시 태어나도록 돕는다. 죽을 위기에 처해 있던 이덕 역시 과부 바위를 이용하여 과부 전녹두로서의 생을 지운다. 이덕은 친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다. 이덕은 임진왜란 중에 태어난 광해군의 아들이었지만, 광해군은 숨이 꺼져가던 이덕을 살해하라고 명령한다. 이덕을 충분히 살릴 수 있었음에도 정치적인 이유로 그를 죽이려 한다.
하지만, 정윤저와 이시발의 도움 덕분에 이덕은 목숨을 건진다. 정윤저는 이덕을 자기 아들로 키운다. 하지만, 이덕의 존재가 광해군에게 알려져서는 안 되었기 때문에 이덕이 성장을 위해 필연적으로 해야 하는 요소들을 전부 막는다. 글공부를 못 하게 하며, 마을과 멀리 떨어지는 곳으로 나가는 것도 금한다. 정윤저의 동생 정윤목은 이덕의 장가를 핑계로 그를 한양으로 보내 광해군을 만나게 하려고 한다. 하지만, 정윤저는 이를 막기 위해 동네 어린아이였던 미미를 이용한다. 미미와 이덕을 혼인시키려는 것이다.
이덕은 정윤저의 도움 덕분에 자신이 왕의 아들이라는 것을 유추해 낸다. 또한, 미미와 혼인할 수 없었던 이덕은 이체와 함께 혼인 전날 도주하여 과부촌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동주를 만나고 서로를 알아보며 사랑에 빠진다. 동주와 이덕은 자신끼리 혼례를 올리고 미래를 약속하지만, 광해군이 이덕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고 과부촌까지 찾아온다. 심지어는 과부 전녹두가 자기 아들이라는 사실까지 간파한다. 결국 이덕은 광해군이 보는 앞에서 과부 바위 절벽에 몸을 던지고 현실의 속박에서 탈피한다. 새로운 삶을 얻은 이덕은 동주와 함께 살아간다.
작가는 주인공 이덕 역시 조선 사회의 제도와 권력에 의해 밀려난 존재로 상정한다. 드워킨의 네 가지 조건에 어느 정도 부합하는 인물이다. 이덕은 살아남기 위해 조선에서 강요하는 성역할을 거부한다. 심지어 호적에도 올라와 있지 않기에 이 세상에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존재이다. 이덕은 그렇기 때문에 다른 이들과 차이를 갖는다. 또한, 당시 왕세자였던 광해군보다 권력이 열세하여 살해당할 뻔했으며, 그로 인해 양아버지 정윤저에게 그의 존재를 은폐 당하는 삶을 지속한다.
타인에게 차별적 대우를 받은 경험은 작중에서 묘사되어 있지 않지만, 그가 여장남자라는 점과 광해군의 친자라는 점이 밝혀지면 죽음을 면치 못하는 상황이다. 또한, 이덕은 위기에 처한 동주를 구해주고, 기생들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구제받기도 한다. 소수자들의 공동체인 과부촌에 소속되는 경험은 이덕의 소수자 연대 의식을 강화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덕은 어떤 시각에서는 소수자라고 정의 내릴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이자 조선의 왕이었던 광해군에게 버림받고 정윤저의 호적에조차 오를 수 없었던 이덕이 과부촌으로 향한 것은 필연이다. 이덕은 과부 행세를 하면서 동주와 이체, 그리고 고사리와 함께 마을에 정착해 나가고 마을 주민으로서 소속감과 연대 의식을 감각한다. 광해군에게 정체를 발각당하고 살해당할 위기에 처하자, 기생과 과부의 도움을 받고 과부 바위 절벽에서 추락한다.
이덕이 과부 전녹두의 차림으로 절벽에서 뛰어내리면서 과부 바위라는 공간의 상징성을 강화한다. 과부 바위는 기존 질서에서 배제된 이들이 자신의 존재를 지우려고 하는 세상에게 저항하는 곳이다. 그들을 억압하는 족쇄를 벗어던지고 새 삶을 얻을 기회가 주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이 모든 과정은 소수자들의 연대를 통해 이루어진다. 행수와 고사리, 화수가 한 마음으로 이덕을 돕는다. 이덕은 마을 공동체의 연대를 경험하며 과거의 삶을 청산하고 과부 바위에서 다시 태어난다.
이렇듯 작가는 본 작품에서 과부촌이라는 공간적 배경을 내세우면서 소수자의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상정한다. 또한 사회적 소수자인 기생과 과부를 주요 인물로 내세워 그들이 사고하고 능동적으로 행동하며 연대하도록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과부 바위라는 장치는 소수자 연대와 집단의식의 상징이자 가부장제로부터 탈피하는 수단으로 읽힌다. 그들은 가부장제에 살해당하고, 과부 바위를 통해 처음부터 다시 살아갈 기회를 얻는다.
2. 방한림과 전녹두, 고전소설과 웹툰을 초월한 저항 정신
어떤 형태의 이야기이든 집필 시기와 작중 배경의 영향을 받는다. 이덕이 남성의 몸으로, 과부로 변장하고 조선 사회에서 강요되는 여성상을 답습했듯이, 고전 소설 <방한림전> 또한 여성의 몸으로 태어난 방관주가 남성으로 변장하고 명나라 당대의 남성상을 이어간다. <낙성전>이라고도 지칭되는 <방한림전>은 조선 후기에 집필된 소설이며, 당시의 여성 영웅소설의 특징을 지녔으면서도 구별되는 양상을 보이기 때문에 아직도 학술적 담론이 이어지고 있는 작품이다.
본 작품의 주인공 정이덕의 이야기는 방관주의 이야기와 닮았다. 두 작품의 주인공 모두 자신의 본모습을 숨기기 위해 변장을 이용한다. 남자는 바지를, 여자는 치마를 입어야 한다는 성별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에 갇힌 사회 속 이방인이 된다. 방관주의 거짓말은 담대하다. 여자의 몸으로 한림이라는 관직에 오르고 남성과 결혼하기 싫어하는 아가씨 영혜빙과 결혼한다. 또한, 고아 낙성을 입양하여 기른다. <방한림전>은 여성이 남장을 하고 적과 싸워 이긴 후에는 다시 바지를 벗고 치마를 입는 여타 고전 소설과는 다른 끝을 맺는다. 방관주는 임금에게 자신이 여성이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하지만, 임금은 방관주의 거짓말을 용서한다. 방관주와 영혜빙은 끝까지 부부 사이를 유지하다가 요절한다.
방관주와 영혜빙의 결혼 생활은 남성 중심 사회를 탈피하는 두 사람의 저항으로 읽힌다. 또한, 오늘날에는 <방한림전>을 방관주의 성정체성과 성적 지향을 중심으로 해석하는 연구가 지속적으로 논의되고 있으며, 이는 충분히 유의미하다. 남장여자라는 여성 영웅소설의 문법을 따르면서도 동성혼을 통해 전형성에 균열을 낸다. 이러한 <방한림전>의 소수자성이 작품의 주제 의식을 강화한다. <방한림전>은 전형적인 것에 새로운 것을 더해 여타 여성 영웅소설과는 다른 전개와 결말을 지향한다. 그렇게 작가는 방관주와 영혜빙을 가부장 중심 사회에서 해방한다.
본 작품 또한 마찬가지다. 본 작품은 전형적인 남녀 간의 로맨스 플롯을 이용하여 스토리를 전개하면서도 소수자성을 띤 공간을 통해 사회에서 소외된 이방인들의 연대를 강화한다. 두 작품은 인물들이 살아남기 위해 하는 변장과 거짓말을 소재로 삼으면서도 가부장적인 사회에 저항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다.
따라서 본 작품 역시 기존 질서에 대한 저항 정신을 갖는다. 이야기 자체는 흔한 시대극 로맨스이다. 본 작품은 광해군의 아들이라는 비밀을 감춘 남자와 기생이 될 운명에 처한 여자의 사랑 이야기로 요약할 수 있다. 하지만, 주인공 이덕이 비밀을 숨기기 위해 소수자들의 공간인 과부촌으로 향하고, 그곳에서 여러 사연을 가진 기생과 과부를 만나며, 과부 바위가 갈등을 풀어나가는 핵심 장치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본 작품은 차별성을 갖는다.
<방한림전>의 방관주가 여성의 몸으로 바지를 입고 과거급제를 했듯이 본 작품의 정이덕 역시 남성의 몸으로 치마를 입고 과부행세를 한다. 방관주는 바지를 통해 여성에게 주어지지 않았던 사회 진출 기회를 획득하고 정이덕은 치마를 통해 조선 사회와 단절된 공간인 과부촌에 입주할 기회를 얻는다. 두 사람은 편협한 사람들의 시선을 이용해 원하는 바를 쟁취한다. <방한림전>에서는 남장여자 방관주가 영혜빙과 혼인하는 동성혼이 그들을 억압하는 기존 질서를 향한 저항으로 그려진다. 본 작품에서는 과부 바위에서 자살하는 과부들, 그리고 그 여인들이 죽음을 통해 새로운 생을 얻을 수 있도록 돕는 기생들의 모습을 통해서 저항이 이루어진다.
<방한림전>에서는 방관주와 영혜빙, 그리고 관주의 유모 유랑과 관주의 양아들 낙성이 가족이 되어 살아간다. 관주는 여성의 몸으로 관직에 진출하고 전쟁에서 승리하며 가장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관주가 여성이라는 것을 모르는 제삼자가 방 씨 일가를 보았을 때는 보편적인 가족이다. 가장의 역할을 수행하는 주체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은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존재가 된다.
본 작품 역시 <방한림전>과 닮은 구석이 있다. 타인이 보기에는 과부 전녹두가 기방의 소녀 동주를 입양하여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과부촌의 사람들은 ‘양어머니와 동주의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데도 모녀의 사이가 매우 돈독하다’라고 평한다. 하지만, 전녹두의 정체는 정이덕이었고, 성적 학대를 당하고 살해당할 뻔한 것을 구하기 위해 입양이라는 핑계를 대어 동주를 기방에서 빼낸 것이었다. 동주와 이덕, 그리고 이체와 고사리 넷은 가족구성원이 되어 유대관계를 형성하고 사랑을 싹틔운다. 거짓말로 시작된 관계이지만 그 끝에는 진정한 가족이 된다는 점, 그리고 그들이 수행하는 성역할과 생물학적 성별이 다르다는 점. 두 가지 측면에서 <방한림전>과 본 작품은 비슷한 결을 지닌다.
물론, 본 작품은 <방한림전>만큼의 균열이나 저항 정신은 가지지 못한다. <방한림전>의 방 씨 일가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커다란 균열을 냈다. 그렇기에 소수자들의 저항 의식을 명확하게 표출한다. 또한 아직도 방관주의 성정체성과 성적 지향에 대한 담론과 연구가 꾸준히 진행 중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 작품과 <방한림전>은 소수자의 연대와 저항을 담은 이야기라는 교집합을 지니지만, 주제 의식적인 측면에서 두 작품의 교집합과 합집합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본 작품은 주인공 이덕이 가부장제와 단절되기 위해 소수자들이 모여있는 공간으로 향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덕은 드워킨의 네 가지 조건에 어느 정도 부합하는 상황에 부닥치기는 했으나, 왕권 다툼에 밀려 희생된 존재일 뿐 과부나 기생처럼 가부장제라는 사회 제도 자체 때문에 차별받거나 소외되는 경험을 하지는 않는다. 여성이 바지를 입고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것들을 누리며 다른 여성과 혼인을 올리기까지 하는 <방한림전>과 과부와 기생이 모여 사는 곳에 남성이 여장을 한 채로 입주하며 수양딸과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그린 본 작품이 완벽하게 공통되는 주제 의식을 가진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본 작품이 품은 기생과 과부의 저항 정신은 가부장제에 도전한다는 의미로 판단하기에 충분하다. 또한, 생물학적 성별과 다른 성역할을 수행하는 주인공이 등장하여 성별 이분법적인 사회에 교란을 일으킨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 작품은 <방한림전>과 명징하게 일치한다고 볼 수는 없지만 적어도 방관주의 저항정신을 이어받은 시대극이다.
결론. 역사 속 비주류, 작품 속 주류로 전복되다
만화는 허구이지만 독자가 현실을 들여다보는 매개체로 작용한다. 작가는 만화를 통해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유도하고, 그들의 존재를 피력한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비주류가 주류가 될 수밖에 없는 공간적 배경을 설정하여 비주류를 주류로 전복하는 것이다. 본 작품은 그러한 방식을 차용한다. 광해군의 숨겨진 아들과 기방에서 자란 여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조선시대 로맨스가 본 작품의 메인 플롯이다. 하지만, 과부촌과 과부 바위를 공간적 배경으로 이용하며 과부와 기생을 작품 속 공간의 주류로 전복시킨다. 결국 작가는 소수자의 이야기를 담을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만화를 전개해 나간다.
주인공 이덕은 과부 전녹두 행세를 하며 과부촌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집단의식과 연대를 경험한다. 과부 바위는 소수자가 폭력과 차별로부터 탈피하는 공간으로 작용한다. 가부장제와 남성 중심 사회에 의해 희생되었던 과부들은 살아남기 위해 과부 바위에 오른다. 그들은 과부 바위 절벽에서 추락함으로써 억압되었던 삶에 작별을 고하고 새 삶을 획득한다. 이덕 역시 마찬가지다. 부모에게서 버려진 아이였던 이덕은 자신을 죽이기 위해 찾아온 아버지 광해군에게서 달아나기 위해 그가 보는 앞에서 과부 바위에서 뛰어내린다. 이덕 또한 과부 바위에서 숨을 거두고 새 인생을 시작했던 과부들처럼 광해군 아들로서의 생을 끝내고 동주의 남편으로서의 생을 얻는다.
따라서 본 작품의 공간적 배경인 과부촌은 시대극 만화가 역사 속 소수자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작용한다. 과부촌은 과부와 기생을 집중적으로 조망하는 데 효과적이며, 과부 바위는 과부촌의 소수자성을 강화하는 장치이다. 자살을 강요받는 과부들이 과부 바위를 이용해서 죽음을 위장하고, 이를 기생이 연대한다. 행수 백설기는 과부 바위를 마을의 소란을 막는 도구이자 과부를 살리는 수단으로 이용한다. 작가는 과부촌과 과부 바위를 통해서 역사에 실존했던 소수자를 효과적으로 구현해 낸다. 또한, 그들이 집단의식을 가진 공동체 안에서 사회에 저항하도록 작품을 설계한다. 이를 통해서 작가는 주류와 비주류를 전복시킨다. 사회의 비주류가 주류를 이루는 공간적 배경은 작품이 소수자를 표현하는 장치로 작용한다.
본 작품은 조선을 배경으로 당대에 존재했던 소수자의 저항을 다룬다. 과부촌이 주는 공간적 특수성, 거짓말로 시작된 가족 관계, 당대의 성역할 규범에 균열을 내는 주인공,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의 연대 의식은 조선 사회에 반기를 드는 요소가 된다. 이러한 저항 의식은 고전 소설 <방한림전>과 비슷한 층위를 가진다. 따라서, 본 작품은 고전 소설인 <방한림전>의 저항 정신을 계승한다.
본 작품은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사회적 소수자 문제를 다룬다. 역사 속의 소수자였던 과부와 기생이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발화하는 모습을 그린다. 과부가 남편을 따라서 자결하는 구시대적 관습과 기생이라는 신분은 오늘날에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도 여전히 소수자가 존재하기 때문에 본 작품은 시의성을 지닌다. 그렇기에 본 작품은 동시대적이며,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여 독자에게 닿는다.
*이미지 출처 : 혜진양, 「녹두전」, 네이버 웹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