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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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불행, 언젠가 행복에 관하여 보민의 [하루꾼]

보민의 <하루꾼>은 새로운 스타일의 작품이다. 이토록 우울한 이야기가 통할까 싶은데 어느새 시선을 사로잡는다. 화법은 낯설고 화면은 지독히 아름답다. 묘하게 설득력 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2013 중단편만화제작지원작이며 ‘2014 대한민국콘텐츠어워드’ 만화부문에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을 수상했다.

2014-12-30 김경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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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민, <하루꾼>, 학산문화사, 2014. 


보민의 <하루꾼>은 새로운 스타일의 작품이다. 이토록 우울한 이야기가 통할까 싶은데 어느새 시선을 사로잡는다. 화법은 낯설고 화면은 지독히 아름답다. 묘하게 설득력 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2013 중단편만화제작지원작이며 ‘2014 대한민국콘텐츠어워드’ 만화부문에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을 수상했다. 

현재 월간 순정만화잡지 <파티>의 디지털 매거진에 연재 중이다. 매달 6일 업데이트 되고 있으며 어플리케이션인 <파티플러스>를 포함해 네이버N스토어, 다음 만화속 세상, 네이트 만화, 미스터블루, 리디북스, 포인트짱, 티스토어에서 볼 수 있다.


남의 불행은 그의 하루

<하루꾼>에는 인간의 불행을 먹고 사는 하루꾼이 등장한다. 그는 사람들의 어두운 시간을 증폭시켜 본인의 하루를 만들어가는 존재다. ‘꾼’답게 남들의 고통, 불안, 우울, 고독에 누구보다 민감하다. 이를 다루는데도 능숙하다. 전지전능한 신에 가까운 것 같기도 하고 어둠에 익숙한 악령과도 닮아 있다. 

작품은 매회 하루꾼이 만난 사람들이 주인공이다. 그가 만난 첫 번째 불행은 소년이다. 하루꾼은 완벽한 불행에 둘러싸인 소년을 만난다. 소년의 어둠을 양분삼아 지내다가 떠나면서 그에게 작은 선물을 한다. 몇 년 뒤 소년과 재회하는데 소년은 여전히 불행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였다. 하루꾼은 다시 소년을 도와준다. 그리고는 다른 사람의 불행을 찾아 나선다.  

이런 이야기 구조는 매회 반복된다. 불행에 빠진 사람, 이를 관찰하는 하루꾼, 그리고 이들을 감싸는 깊고 검은 우울한 기운. 하루꾼은 인간과 접촉하지도 않고 교감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의 곁을 머물 뿐이다. 불행이 끝나면 그도 떠나간다.  

현재인 듯 과거인 듯, 익숙한 주변인 듯, 이국인 듯, 현실적이면서도 몽환적인 곳을 배경으로 불안감을 안고 있는 소녀, 불행의 구렁텅이에서 막 빠져나온 엄마와 아들, 닮은꼴 소녀들, 좋아했던 남자의 죽음을 목격한 여자 등 음울한 얼굴들이 화면을 메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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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꾼이 접근한 인물들은 자신만의 어둠에 갇혀 있다.


S, I, L, E, T, N 등 이니셜로 대변되는 이들은 전혀 모르는 사람일 수도 있고 나의 친구나 가족, 혹은 나의 분신이기도 하다. 이들의 사연은 우리를 스쳐갔던 수많은 하루 중 괴로웠던 기억들이다. 동시에 눈치 채지 못한 채 하루꾼이 가져간 시간이다. 덕분에 오늘이 있는지도 모른다.    


찬란한 고통, 역설의 미학

“모든 행복한 가정은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각각 나름대로 불행을 안고 있다.” 소설 <안나 카레리나>의 첫 문장처럼 <하루꾼>이 보여주는 불행도 다양하다. 작가는 집요하리만큼 불행을 파고든다. 하지만 인물들의 절망감이 깊어질수록, 고독의 시간이 늘어날수록 오히려 선명하게 부각되는 것은 ‘행복’이다. 작품에서 금기어처럼 절대 언급되지 않는 이 단어는 묘하게 인물들 사이로 떠다닌다. 

‘행복이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은 ‘불행은 언제 끝날까’로 대체된다. 사람들은 괴롭고 절망에 몸서리치고 무력감에 빠져 있다. 세상에서 가장 어두운 곳, 자기 마음 속 어두운 시간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시간은 흐르지 못하고 고여 있다. 하지만 불행을 직시하고 마주했을 때 어둠은 걷히고 비로소 의미 있는 시간이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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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로운 순간일수록 공들여 포현된다. 엄마와 아들의 헤어짐, 태아처럼 내면에 침잠하는 소녀의 모습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품고 있다.     


불행의 한 복판에 있는 인물들은 완전히 어둠에 묻히지 않는다. 새로운 하루의 가능성을 품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아름답게 묘사된다. 각 에피소드 제목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1화 밤을 시작으로 2화 저녁, 3화 낮, 4?5화 아침, 6화 새벽으로 이어지며 7화부터는 다시 밤으로 돌아와 시간이 반복된다. 우리의 하루가 어둠에서 시작될지라도 여명의 희미한 빛은 분명히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처럼.

작품은 쉽게 ‘해피엔딩’을 보여주지 않는다. 단지 절망의 시간은 반드시 지나간다고 담담하게 말할 뿐이다. 비록 완벽한 구원은 없더라도. 그래서 위안을 준다. 하루꾼의 말처럼. “사라지는 삶과 남아 있는 삶은 사실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남아서 살아가는 쪽은 언제나 변화하는 하루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언제나, 사람들의 그런 모습을 좋아한다.”


숨이 멎는 장면, 위력적인 한 방

작품의 백미는 하루꾼의 시계가 움직이는 장면이다. 째깍째깍. 사람들이 제대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그간의 불행과 안녕을 고하는 순간이자 하루꾼이 떠나가야 할 시간이다. 바로 그때, 고여 있던 불행이 쏟아지고 그림자에 가려졌던 빛이 폭발한다. 작가는 그 순간을 명화의 한 장면처럼 드라마틱하게 포착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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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속 불행의 끝자락은 그 어떤 장면보다 드라마틱하다. 어둠이 걷히고 침묵하던 사람들의 감정이 넘실댄다. 


작가가 보여주는 불행의 끝자락은 눈부시다. 어둠이 밀려가면서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이 흘러넘친다. 탄성이 나올 정도로 황홀한 순간이다. 사람들은 확신한다. 당장 행복이 시작되는 건 아니지만 이제 내일은 분명 어제와 다른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