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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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소년

세상은 어떤 곳일까. 무섭고, 외롭고, 슬픈 곳일까. 아니라면 당신은 다행이다. 그렇더라도 거기서 안도하면 안 된다. 세상을 그렇게만 보는 사람이 있으니까. 바로 곁에, 아이조차도.소년은 말이 없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세상을 투정하며 늘 다툰다. 학교에선 거...

2014-12-09 이명진
가면소년 제호.PNG

세상은 어떤 곳일까. 무섭고, 외롭고, 슬픈 곳일까. 아니라면 당신은 다행이다. 그렇더라도 거기서 안도하면 안 된다. 세상을 그렇게만 보는 사람이 있으니까. 바로 곁에, 아이조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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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말이 없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세상을 투정하며 늘 다툰다. 학교에선 거지라고 놀림 받는다. 그래서 “나 따윈,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 편이 좋았을지도 몰라….”라고 생각한다. 어느 날 아침에 소년의 눈에 들어온 이상한 생김의 아저씨. 오늘도 학교에서는 놀림 받고, 집에서는 부모님이 싸우는 걸 뒤로 하고 나온 소년은 놀이터에서 그 아저씨를 다시 만난다. 가까이서 본 아저씨는 가면을 쓰고 있다. 잠깐 쳐다보고 있자니 아저씨는 그네 위에 가면만 덩그러니 놓고 사라진다. 가면을 집어 쓴 소년. 순간 소년은 자신이 원하던 소원을 이룬다. 다른 사람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 그리고 현실과 상상을 오가며 여행을 시작하게 된다. 가장 먼저 쾌변신을 만나 만화책을 소개 받는다. 골목길에서 한껏 멋을 내는 고양이와 얘기하고, 인생무상을 되풀이하는 토끼 아저씨를 만난다. 지구에 불시착해서 먼 고향별로 되돌아갈 날만 손꼽는 멍멍이의 사연도 듣게 된다. 밤이 깊어서는 유니콘과 같이 잠을 청한다. 두 눈에서 레이저를 쏘는 거대한 쥐를 만나고, 그 쥐는 로봇과 싸운다. 

도대체 이런 상상은 어디서 나올까. 생각해보면 이런 생각은 나도 하던 생각이 아닌가. 친구들과 하던 얘기이기도 하고. 골목에서 우리는 지구를 지키는 영웅이고, 고양이와 멍멍이한테 이야깃거리를 찾고, 전자오락실에서 로봇을 만난다. 그런데 그 이미지는 그려질 수 있을까. 골목길에 고양이가 어슬렁거리고 사연 있는 멍멍이가 옆에 있고, 오락실 간이 의자에 엉덩이를 반만 걸친 채 우주전함을 모는 소년들의 꿈을 형상화하는 게 가능할까. 더욱 밤이 되면 건물이 부서져 쏟아지다 별이 돼 반짝이는 상상까지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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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상을 오롯이 펼쳐낸 것이 <가면소년>이다. 작가는 책의 표지부터 맨 마지막 뒤표지까지 이야기를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간다. 그리고 이야기를 담아내는 도구를 다양하게 사용해서 상상을 끝 간 데 없이 펼쳐 보인다. 각 장마다 도구를 달리해서 사용한 것이다. 작가가 가장 많이 쓴 도구는 컴퓨터 화면에서 컬러를 한 이미지이다. 익히 알려진 대로 아메바피쉬는 샛노랑과 핑크 컬러로 여백 없이 촘촘하게 얽어맨 일러스트로 유명한 작가이다. 이 책에서도 이런 그림이 중심이다. 그런데 이런 그림 말고, 이야기의 흐름에 맞게 다양한 도구를 사용한 게 이 책에선 눈에 띈다. 수채화가 먼저 눈에 들어오고, 사진을 만화 칸에 그대로 넣어서 이야기를 풀어가는 장도 있다. 어떤 장에서는 크레파스로 앞에서 특유의 얇은 선으로 그렸던 이미지를 다시 묘사했고, 다음 장에서는 색종이로 뜯어 붙인 것 같은 그림 연출도 시도했다. 

왜 작가는 이런 다양한 재료를 동원했을까. 아마도 그것은 소년의 눈으로 세상을 보여주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소년이 보는 그대로, 듣는 그대로, 생각하는 그대로를 보여주기 위해 작가는 골목길에서 낯익은 장면을 카메라로 손수 찍고, 여기에 소년과 등장하는 인물을 그려 넣었다. 사진을 배경으로 쓴 장은 우리의 현실 그대로이다. 거기서 소년과 만나는 상대는 노랑 끈의 야옹이, 한방의 뽑기 아저씨, 인생무상을 외치는 토끼 아저씨, 담배 피는 꽥이 아저씨, 장롱 안에서 우는 아이, 우주에서 온 멍멍이 등이다. 사진과 만화적 상상력의 재밌는 말걸기이다. 일상의 사진 속에서 상상력은 더 돋보인다. 버려진 장롱 안에서 우는 아이라니. 이런 생각이나 형상화는 아메바피쉬만이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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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소년>의 소년은 개발 논리에 밀려 곧 허물어지게 될 도심 속 귀퉁이의 재개발지구에 살고 있다. 벗어나고 싶은 것은 피폐한 도시일 수도 있지만, 소년은 자신한테 말 붙이지 않는 사람들의 눈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었던 것이다. 소년은 그만의 상상의 세계에서 현실로 돌아왔지만, 눈앞에서 자기가 살던 집이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보게 된다. 부서진 건물의 잔해들은 파편처럼 하늘로 떠올라 별이 되고, 높은 고층빌딩이 하늘을 향해 치솟아 오른다. 이건 상상일 수도 있지만, 현실일 수도 있다. 우리 현실에 발붙이고 있는 재개발에 대한 거대한 욕망에 대한 보고이다.  

맨 마지막 장은 수채화로 그려져 있다. 소년은 자신을 알아보는 소녀를 만난다. 소녀 역시 가면을 쓰고 있다. 소녀는 소년을 지켜봐 왔다고 말한다. 또 사람들이 소년을 보지 못한 것은 “보려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알려준다. 돌아가고 싶지 않은 예전의 그곳이지만 소녀가 친구가 돼서 손을 내밀자 소년은 손을 잡는다. 용기를 내서, 둘이 함께. 가면을 쓰고, 도망쳐왔던 세상 속으로 다시 돌아간다. 

“외로움의 가면을 벗겨준 당신에게….”
책 맨 마지막 장에 있는 작가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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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자칭 그래픽 아티스트라 우기며 일러스트, 만화, 디자인, 전시 등의 다양한 분야 주변으로 떠돌며 오늘도 상큼 재미난 작업을 찾아 헤매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작가의 말대로라면 이 작품은 ‘그래픽에세이’쯤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런 장르가 있는지, 이런 말이 가당키나 한지 모르겠지만,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 딱 그렇게 느껴진다. 멋진 실험적인 전시 공간을 미로처럼 뚫고 나온 기분이 든다. 

작가는 언더웹진 에서 ???동했고, 만화잡지 <영 점프>를 통해 ‘로봇 소년과 토스터 소녀의 아주 사소한 일상’이라는 단편으로 데뷔했다. 2004년부터 <계간만화>에 ‘겨울눈 생산 주식회사’ ‘잭(Jack)’ ‘51구역 도로의 무더운 어느 오후’ 등의 단편을 발표하며 만화작업을 이었다. 로봇을 테마로 한 전시 등 여러 전시회를 직접 주도했고, 단편집으로 <로봇>이 있다. 
 
작가는 현재 암투병 중이란 안타까운 소식이 있는데, 페이스북을 통해 사람들과 대화를 하고 있다. 노랗고 핑크빛 원색이 발광하던 그의 일러스트가 웹툰으로 그려지면 어떨까는 생각을 해본다. 자기 정체성이 강렬했던 작가의 발언이 계속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