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란 인간에 대한 예의를 뜻하는 말이 아닐까?” 실화를 바탕으로 한 창작물들은 ‘순수한 허구’가 주는 감동이나 재미와는 아주 다른 감정, 굳이 문학적으로 표현한다면 묵직하고 절절한,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뜨거운, 말로 설명하기 힘든 ‘어떤 먹먹한 느낌’을 선사하곤 한다. 예술이라는 것을 ‘누군가의 삶’을 바라보는 방편 중 하나라고 정의한다면 다큐멘터리만큼 완벽한 예술은 없을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여기에 소개하는 만화 “우리 마을 이야기”는 바로 옆 나라 일본에서 1966년에 시작해 2012년인 지금까지도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는 산리즈카 마을의 ‘나리타공항 건설 반대투쟁’을 다룬 이야기다. “우리가 하얀 말을 본 그날, 우리와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우리 마을을 부숴버릴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 책의 1권에서 추천사를 쓴 ‘길 위의 신부’라 불리는 문정현 신부는 “너무도 똑같다. 이 만화에서 그려지는 산리즈카 마을의 이야기가 지금 우리나라 제주의 강정마을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너무 닮았다. 아니다. 새만금과 부안 핵폐기장, 미군부대에 땅을 내준 평택 대추리에서 서울 용산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의 국가 권력에 의해 고통 받았고 또 지금도 고통 받는 사람들의 이야기, 바로 그것과 다르지 않다.”라고 추천사 첫 머리에 썼다 자신들의 의지와는 전혀 관계없이, 땀과 눈물로 일궈낸 자신들의 삶의 터전이 ‘국제공항 건설예정부지’로 정해졌다는 이야기를 뉴스에서 보게 된 마을 노인의 황당한 표정으로부터 이 이야기는 시작된다. ‘지키기 위한’ 투쟁이 시작되었고 시간이 흘러갈수록 국가권력의 공격은 거세어지고, 야비해지고, 두려워져간다. 처음의 동지이자 사이좋던 이웃들이 하나 둘 쓰러져가고, 자본의 논리와 공작 앞에 ‘조건파’와 ‘반대파’로 분열되기 시작하며, ‘그저 지키고 싶었을 뿐’인 농사꾼들은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많은 것들을 잃으며 부서져간다. “시장님, 국제적인 공항이 필요하단 것은 잘 알겠소, 하지만, 정부는 우리에게 아직 그 어떤 양해도 구한 바 없소, 이해도, 협력도, 이제 막 시작해야 되는 것 아뇨? 그런데도 신문에 마치 이미 정해진 일인 것 마냥 기사가 나는 건 어째서요? 국가적 대형 공공사업이면...이렇게 우리들의 승낙 없이 추진해도 되는 거요?” 이 만화를 그린 오제 아키라는 우리나라에서도 “명가의 술(원제: 나츠코의 술)”과 “술의 장인 클로드” 등으로 잘 알려진 작가다. 익숙한 그림체라서 반갑기도 하지만, 원래 이런 소재에 드라마틱한 서사와 일본 전통의 정서를 잘 결합시키는 작가라서 읽어가기가 무척 편하고, 한 장 한 장 넘겨갈수록 서서히 저항을 선택한 농민들의 입장에 감정이입을 하게 된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일은 부지기수다. 전국에 개발광풍이 불어 닥치고 ‘공공사업’을 명분으로 토건업자와 국가권력이 결탁하면서 얼마나 많은 공동체들이 삶의 터전을 이런 식으로 잃고, 분열되고, 파괴되었나, 그러나 ‘내 한 몸 살아가기도 벅차다’는 이유만으로 외면해버린 수많은 불의들, ‘저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야’라고 애써 스스로를 안심시키면서 ‘절실히 도움을 갈구하며 울부짖는’ 곤경에 빠진 피해자들을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던 나, 그런 나를 자책하거나 비판했던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이 만화를 천천히 읽다보면 소름끼치는 느낌 하나가 스멀스멀 등 뒤로 기어 올라온다. 그 느낌의 정체는 바로 이 것이다. “이건 남 일이 아니야! 어쩌면 나도 이런 일을 당할 수 있어, 아주 갑작스럽게 말이야” “자식에게 물려줄 생각은 읎어, 농사꾼 따위 내 대에서 끝내야 혀, 공항이 들어서건 아니건, 쫄쫄 굶어가며 날이 깜깜해질 때까지 땅만 파면서 20년...수중에 남은 건 손바닥만 한 채소밭이랑 빚 뿐이여, 세상 사람들은 근대농업 시대 개막이니 뭐니 떠들지만 우리네와는 상관없는 얘기여, 먹고 살 수가 읎어, 농사꾼으로는......우리가 땅을 파는 게...그리 나쁜 일일까? 땅을 팔고 빚을 갚는 게...애들 좋은 학교에 보내주는 게 말이여...” “우리 마을 이야기”는 당시 산리즈카에서 전개된 나리타공항 반대투쟁의 초기 상황을 그려낸 만화다. 작가인 오제 아키라가 1991년 ‘나리타공항 문제 심포지엄’ 참석을 계기로 이 문제를 취재해 만화잡지 <모닝>에 1992년부터 1993년까지 연재하였으며 이번에 출간된 한국어판은 전체 7권의 분량 중 1~3권이라고 한다. 이 만화를 읽어가면서 ‘남 일 같지 않다’고 느낀 것은 나도 시골 출신이어서 ‘농민’이라는 사람들의 정서를 깊이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일 것이고, 두 번째 이유는 몇 년 전에 일어난 끔찍했던 용산의 참사와 서울 전역에 휘몰아치며 오래된 공동체들을 ‘작살’내던 ‘뉴타운’광풍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해서 교묘히 파고들어 자신의 목적을 확실히 달성하고야 마는 ‘자본’의 검은 속성, 사람이 사람을 속이고, 서로를 불신하게 만들며, 끝내는 서로 증오하고 누군가의 죽음까지도 불러오는 이 엄청나고 두려운 사태는 바로 내가 사는 도시, 그것도 옆 동네에서 일어난, 결코 ‘남의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땅은 말이여...원래 그 누구의 것도 아니란다. 이 땅은 우리의 것도 공단 것도 아니여, 옛날부터 그저 여기에 있었을 뿐...그것을 인간이 제멋대로 선을 긋고 제 것이라고 우기기 시작한 거여, 우리도 마찬가지여, 하지만 말이다, 누구의 것도 아닌 땅을 일구고 갈고 씨앗을 뿌려서 비옥한 흙으로 만든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여, 천천히 천천히 몇 년씩 들여서 비료를 주고 수확이 점점 늘고...그건 참으로 말로 표현 못할 기쁨이었지, 나와 늬 애비는 땅을 흙으로 일구고 나서야 비로소 이곳이 우리 것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흙이여, 그냥 땅이 아니여, 그냥 땅바닥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지만 이 흙은 우리가 만든 거여, 매일매일 이 흙과 얘기를 나누며 살아온겨...만져봐라, 흙이 참말로 부드럽고 따뜻하구나, 이건 그냥 땅바닥이 아니여....” 현재 발간된 한국어판 3권까지 단숨에 읽어가면서 참으로 오랜만에 고향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직도 큰 형님은 고향에서 농부로 살아가고 계시다. 나와는 나이차도 많이 나고 살아가는 방식도 너무 달라서 여전히 대하기 어렵기만 한 큰 형님이지만, 저번에 구제역 사태에 대한 보상 문제와 FTA반대 집회 때문에 서울에 왔다고 쑥스럽게 전화하신 기억이 문득 떠올라서 갑자기 가슴 한 구석이 먹먹해졌다. 이 책이 많은 사람들, 특히 도시에서 살아가면서 무언가 삶에 있어서 중요한 걸 잊고 사는 나 같은 이들에게 널리 읽혀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