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밋빛 두 뺨의 기억
“옛날 얘기를 하려 한다. 건물 사이를 잇는 석조복도, 출입금지구역인 시계탑, 반짝반짝한 구두를 신고 붉은 리본타이를 살랑살랑 나부끼며 언제까지고 뛰어다녔던 그 시절 우리는 장밋빛으로 두 뺨을 물들인 소년이었다.” “탐미주의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일본의 만화가...
2012-04-25
유호연
“옛날 얘기를 하려 한다. 건물 사이를 잇는 석조복도, 출입금지구역인 시계탑, 반짝반짝한 구두를 신고 붉은 리본타이를 살랑살랑 나부끼며 언제까지고 뛰어다녔던 그 시절 우리는 장밋빛으로 두 뺨을 물들인 소년이었다.” “탐미주의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일본의 만화가 나카무라 아스미코의 대표작 “J의 모든 것”은 신경질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날카롭고 섬세한 선으로 표현된 캐릭터들의 애잔한 심리묘사가 독자들의 감정 깊은 곳을 건드리며 호평을 받았던 작품이다. 1960년대 초반 미국을 배경으로 한 ‘동성애’를 주제로 다룬 만화로 표현 수위가 매우 높고 선정적이어서 한국어판으로 출간될 때에는 ‘19세 미만 구독불가’라는 빨간딱지가 붙기도 했다. 마릴린 먼로를 동경하는 클럽 가수이자 여장남자인 작품의 주인공 ‘J’와 그의 첫사랑이자 영원한 사랑인 유태인 출신의 변호사 폴 앤더슨의 만남과 이별에 관한 이야기가 작품의 핵심적인 줄거리인데, 총 3권으로 이루어진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아주 잘 만들어진 퀴어 영화 한 편을 보는 듯한, 감각적이고 감성적인 디테일이 돋보이는 수작(秀作)이다. “난 폭풍이 지나가길 기다릴 거야” “J의 모든 것”에서는 주인공인 J와 폴 이외에도 매우 눈에 띄는 조연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폴과 J의 가장 듬직하면서 자상한 친구 앤드류 모건, J의 아이를 임신하는 리타 바셀미, J의 고용주이자 클럽 블루 래피드의 사장 아더 유스터스, J의 인생을 취재하며 친구가 된 잡지사 기자 에드먼트 클레먼스, J를 입양한 ‘어머니’이자 폴의 ‘이모’인 미스 카렌즈버그 등등 아주 매력적이고 개성 넘치는 조연 캐릭터들이 등장해 작품의 구성을 탄탄하게 하고 이야기의 디테일을 맛깔스럽게 살려준다. 이런 조연 캐릭터 중에 가장 대표적인 캐릭터가 폴의 동창생이자 J의 선배인 앤드류 모건이라고 할 수 있는데, 동창생인 폴 앤더슨에 대한 알듯 모를 듯 애매한 느낌의 묘한 감정을 지니고 있지만 결코 선은 넘지 않고, 무슨 일이 있다면 항상 그들의 곁에서 든든한 우군이 되어주는 듬직한 느낌의 남자다. 그러나 또 한 편으로 정치가로서 현직 시장으로서 탄탄한 커리어를 쌓고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이기적인 아버지와 체질적으로도 성격적으로도 맞지 않는 자유분방함 때문에 결국 인생의 어두운 길을 걸어가게 되는 슬픈 캐릭터이기도 했다. 학교에서든 동네에서든 누구도 손댈 수 없을 정도의 불량아 노릇을 하는 겉모습을 늘 유지하지만 사실은 매우 자상하고 푸근한 내면을 지닌 캐릭터로 모터사이클과 담배를 사랑하는 자유주의자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J의 모든 것”에서 메인 스토리가 되는 폴과 J의 러브스토리도 괜찮았지만 폴을 연모하면서도 결코 깊게 다가서지 않는, 그러면서도 그의 곁을 꾸준히 맴도는 모건의 짝사랑 이야기는 은은하고 애잔한 느낌으로 다가왔었다. “어젯밤...나는 폴에게 키스했다.” / 글 : 유호연 여기에 소개하는 “장밋빛 두 뺨의 기억”은 바로 이들, 폴 앤더슨과 앤드류 모건이 J를 만나기 전, 둘이 동창생으로 세인트 카렌즈버그에 입학해서 룸메이트였던 시절의 이야기다. 본편인 “J의 모든 것”의 Side story라 할 수 있는데 일종의 외전(外傳)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책 소개 띠지에는 이렇게 써있다. “『동급생』작가 나카무라 아스미코가 선사하는 세인트 카렌즈버그 중등부...우리들이 함께했던 더 없이 소중한 시간들...‘폴’과 ‘모건’의 만남을 그린 ‘J의 모든 것’의 전일담(前日譚, Prequel), 드디어 한국 상륙!! 그 시절 소년들의 아련한 연정...장밋빛 두 뺨의 기억”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어떻게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거냐?” 작품은 세인트 카렌즈버그의 중등부 입학식으로 시작해서 폴과 모건의 첫 만남부터 시작한다. (다소 진부하고 전형적인 설정이지만,) 상급생들에게 찍혀 입학 첫날부터 린치를 당하러 끌려간 모건이 갖고 있던 나이프로 상급생 한 명의 귀를 자르는 사고를 치고, 흥분한 상급생들에게 모건이 끔찍한 린치를 당하려 하는 찰라, 폴이 기지를 발휘해 그를 위기에서 구해준다. 이 때 둘은 서로 처음으로 대화를 나누게 되고 모건은 폴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약이 오를 대로 오른 상급생들이 복수를 꾸미게 되고 결국 폴은 팔이 부러지는 부상을 당한다. 더 끔찍한 일을 당하기 전에 무언가 조치를 취하라고 모건은 폴에게 충고하지만 폴은 모든 것에 무심한 느낌으로 아무런 반응이 없다. 결국 폴에게 알리지 않은 채 모건은 혼자서 상급생들에게 맞서러 가고, 과격한 싸움을 펼치다 위기에 몰리자 아버지의 권력을 팔아서까지 강제적으로 상황을 종료시킨다. 그리고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 폴에게 살며시 기대어 잠이 들며 “빚은 갚았다”라고 조용히 속으로 뇌까린다. “아아, 그래. 나는 이 녀석을 좋아하는 거다, 하지만 이미 늦었어.” 이 작품은 “J의 모든 것”을 읽고 나서 봐도, 읽지 않고 봐도 아무런 영향이 없는 독립적인 이야기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든 이 작품과 인연을 맺은 사람이라면 “J의 모든 것”을 읽어보길 권한다. 두 작품 사이에서 연결되는 많은 것들이 독자들을 기쁘게 해줄 것이다. 특히나 본편에서는 주인공인 J의 삶을 기술하는데 많은 것들이 치중되어 다소 설명이 부족했던 느낌이 든 폴이나 모건의 이야기가 아주 만족스럽게 정리되어 있어서 매우 기쁘다. 왜 폴은 그렇게도 타인에게 마음을 열지 못했는지, 왜 모건은 그렇게도 아버지와 대립했는지, 그들이 어떻게 그 애매하고 위태로운 감정을 쌓아나갔는지가 아주 잘 정리되어있다. 본편에서도 꽤나 묘한 분위기를 연출했던 두 사람이고 마무리가 무척이나 훈훈했던 그들이기에 독자나 팬들만이 아니라 작가도 이 두 사람만의 이야기를 한 번 그려보고 싶었나 보다. 특히나 이 책의 마지막에 행복하게 살아가는 폴과 J가 등장하고 출소하고 2년 만에 그들을 찾아온 모건의 모습이 등장하며 끝을 맺는데, 아주 잔잔한 느낌을 전해주는 좋은 마무리였다. 마치 힘들고 불행했던 모두가 이제는 모두 행복해진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