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부터 2014년까지 네이버 웹툰 ‘아이들은 즐겁다’를 통해 본격적으로 장편 만화를 연재하기 시작한 작가 ‘허5파6’은 2015년부터 2017년까지 네이버 웹툰을 통해 선보인 ‘여중생A’를 통해 많은 이들에게 자신의 필명을 각인시키게 되었다. 허5파6의 작품은 얼핏 보기에는 무척이나 단조로워 보인다. 간결한 그림체에 작화에 사용한 색 역시 부분적인 포인트로 삽입된 원색이나 파스텔톤의 색채를 제외하면 무채색을 주로 사용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의 작품은 오히려 간결한 표현이 있기에 더욱 빛을 발할 수 있었다. ‘아이들은 즐겁다’는 초등학생의 시선으로, ‘여중생A’는 제목대로 중학생의 시선을 통해 극중 인물들의 일상을 기록하고, 그 안에서 주인공을 비롯한 등장인물들이 성장하는 과정을 그려내면서 호평을 받았다. 아직 완전히 성숙하지는 못했지만, 사회 안에 놓이며 조금씩 자신의 사회적 위치와 존재를 알아가는 어린 주인공들의 이야기는 허5파6 특유의 미니멀리즘적인 작화가 있었기에 더욱 진솔하게 독자의 안으로 파고들었다. 특히 ‘여중생A’의 경우, 한국 사회의 중요한 분기점이 된 1990년대 후반 ~ 2000년대 초반의 사회 문화, 그리고 당시부터 싹이 자라던 ‘온라인 게임’과 ‘웹소설’을 비롯한 인터넷 중심의 대중문화를 서사와 연출에 적절하게 배합하며 당대를 거치며 자라난 세대들에게 큰 주목을 받았다.
그렇다면 2019년 초부터 새롭게 선보인 신작 ‘오라존미’는 어떨까. 허5파6이 그린 두 편의 전작과 달리 ‘오라존미’의 주인공들은 청소년이 아니다. 그러나 작품의 주인공들은 나이만 20대일 뿐 아직 불안정한 존재라는 점에서 ‘성장하는 주인공’이라는 특성은 여전히 유지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주목할 지점은 ‘여중생A’에 이어 본격적으로 ‘시각’을 통한 정체성의 문제를 작품의 연출에 본격적으로 드러내는 작품이라는 점에 있을 것이다.
‘여중생A’에서는 ‘온라인 게임’이 작품의 중요한 장치가 되었다. 학교에서 이렇다 할 존재감이 없고, 집에서도 끊임없는 가정 폭력에 시달리는 ‘여중생A’의 주인공 ‘장미래’는 온라인 게임 ‘원더링 월드’만이 유일한 삶의 원천이 된다. 게임 속 가상의 아바타로 자신을 규정지을 때, 장미래는 현실의 굴레에서 벗어나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로 자신을 여길 수 있었다.
반면 ‘오라존미’의 경우, 이러한 시각적 정체성의 문제를 더욱 복합적으로 접근하며 작품의 주된 구조로 삼는다. 주인공 ‘영재’는 얼굴에 남은 큰 흉터 자국 때문에 타인을 극도로 기피한다.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인해 대학에도 가지 못했지만, 영재에게는 끊임없는 노력으로 기른 만화 창작 실력이 있다. 반면 영재와 같은 고교 동창인 또 다른 주인공 ‘수빈’은 영재와 정반대의 입장에 서있다. 수빈은 영재와 달리 얼굴에 티 한 점 없이 아름다운 용모를 지녔지만, 영재가 지닌 만화 창작 실력이 수빈에게는 없다. 외모의 차원에서는 수빈이 영재보다 나을지 몰라도, 창작으로 드러나는 이미지의 차원에서는 영재가 수빈보다 훨씬 앞서 있다.
서로 상반되는 특성을 지닌 둘은 대학 졸업 이후 우연한 계기로 다시 만나 웹툰 작가 데뷔를 위해 노력하지만, 결국 오랫동안 갈고닦은 실력을 선보인 영재만이 공모전에 당선되고 수빈은 탈락했다. 그러나 시상식 무대 위에 오르기로 한 순간, 영재는 수빈에게 전혀 생각지도 못한 제안을 한다. 영재가 사람들 앞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너무나도 무서웠던 나머지 수빈이 영재인 척 활동해달라는 부탁을 한 것이다. 그 순간부터 모든 것이 꼬이고, ‘오라존미’의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계속 웹툰 작가가 되길 원했던 수빈은 영재 대신 대외적인 활동을 하며 그토록 바라던 작가로서 대접을 받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허상에 불과하다. 외모 콤플렉스로 인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는 영재는 수빈 덕분에 외부에 자신을 숨기고 만화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이미 조금씩 일상에는 균열이 생기고 있다. 외모적인 조건, 시각적 이미지를 만들 수 있는 실력적인 조건이 모두 엇갈린 상황에서 영재와 수빈은 아직까지는 지금의 이중생활에 만족하고 있지만 이 행복은 결코 오래가기 쉽지 않아 보인다.
‘여중생A’의 주인공 ‘미래’는 온라인 게임 속 자신의 또 다른 모습에만 만족하다, 다시 온라인 게임을 통해 조금씩 세상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며 주체를 형성할 수 있었다. ‘여중생A’ 이상으로 복잡한 상황에 놓이고 만 ‘오라존미;의 두 주인공, ‘영재’와 ‘수빈’은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바라보며 성장할 수 있을까. 그리고 허5파6의 작품에서 계속 강조된 ‘겉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익숙하지만 결코 지키기 쉽지 않은 명제를 어떠한 과정을 거치며 인식할 수 있을까. 앞으로 전개될 영재와 수빈, 그리고 연재가 진행될수록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주변 인물들 사이의 이야기에 많은 독자들은 마음을 졸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