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가진 두 개의 얼굴, 두 개의 인생
- 진루엔 양 <의화단>
김소원 (만화연구가, 만화포럼 위원)
의화단운동(義和團運動). 청나라 말기 산둥(山東)성과 허베이(河北)성 지역에서 의화단이 일으킨 외세 배척 운동이자 서구열강의 연합군과 벌인 전쟁 혹은 반란이다. 의화단은 서양 선교사들과 외교관, 중국인 천주교도들을 공격했고 베이징까지 진격하지만 연합군의 반격에 봉기는 실패로 끝난다. 영국, 독일, 프랑스, 미국, 일본 등 제국주의 경쟁에 열을 올리던 열강들은 의화단을 상대로 사이좋게 손을 잡았다. 의화단은 연합군에게 대패했고 전쟁은 청나라 측에 일방적으로 불리한 조약과 함께 막을 내린다. 의화단운동은 결과적으로 청나라의 몰락을 재촉했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역사책을 통해 알고 있는 의화단운동의 내용이다.
역사는 언제나 승자의 시선으로 기록되지만 하나의 사건을 바라보는 입장이 모든 이들에게 같을 수는 없다. 진루엔 양의 <의화단>은 ‘소년의 전쟁’과 ‘소녀의 전쟁’ 두 권으로 이루어진 작품으로 전혀 다른 입장에서 의화단운동을 겪은 소년과 소녀의 이야기를 그린다. 의화단운동을 둘러싼 두 개의 시선이라면 가해자와 피해자, 혹은 동양과 서양의 입장을 떠올릴 테지만 작가는 중국인 소년, 소녀의 이야기를 그린다. ‘소년의 전쟁’편에서는 경극을 좋아하는 평범한 소년에서 의화단 단원이 되는 바오가 주인공이고 ‘소녀의 전쟁’편은 천주교에 귀의한 중국 소녀 비비아나의 시점에서 전개된다.
바오와 비비아나는 본인들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운명으로 얽히게 되고 두 개의 이야기는 결국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경극 배우 같은 비비아나의 얼굴을 본 바오는 “난 저 애랑 결혼할 거야. 그럼 집 안이 온통 경극 가면 얼굴을 한 자식들로 가득 차겠지.”라고 생각한다. 바오는 비비아나와 다시 만나지만 자식을 낳고 평범하게 살고자 했던 소원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는다.
장터에서 늙은 찐빵 장수 할머니에게 행패를 부리던 남자를 바오의 아버지가 혼내주고 바오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서 경극 속 위인의 모습을 본다. 그러나 천주교도가 되어 돌아온 남자는 서양인 신부의 비호를 받으며 바오의 아버지가 장터에서 팔고 있던 농작물을 빼앗는다. 급기야 바오의 아버지는 아무 죄 없이 서양 병사들에게 피투성이가 되도록 두들겨 맞기까지 한다. 경극을 보는 것이 큰 즐거움이던 평범한 시골 소년 바오가 목격한 이 어이없는 상황은 청나라 말기 중국의 민중이 처한 모습을 고스란히 대변한다. 국운이 다한 왕조의 말기 중국은 서구 열강들에 의해 산산 조각나기 직전으로 민중들은 부패하고 무능한 지배자와 외세 침탈의 이중고를 겪어야 했다.
마을에 들어온 의화단 단원 주홍등과의 만남은 바오의 인생을 바꾸어 놓는다. 남의 나라 군인에게 고통 받는 백성을 국가는 방관했고 이는 바오에게 의화단이 되는 직접적인 동기를 부여하게 된다. 바오가 의화단에 가담하게 되는 이유는 부청멸양(扶淸滅洋)이니 반(反)그리스도교이니 하는 원대한 목표가 아니었다. 가족과 존경하는 스승의 죽음이었다. 의화단이 되어 봉기에 참여했던 사람들 대부분이 바오처럼 평범한 농민이고 백성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의화단>의 또 한명의 주인공 비비아나는 아들이 아닌 딸, 그것도 넷째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이름도 없이 그저 ‘넷째’로 불린다. 관심이 필요했으며 사랑받고 싶었지만 가족 누구도 그녀를 따뜻하게 안아주지 않는다. 비비아나는 천주교도가 주는 맛있는 과자 때문에 성경을 공부를 하지만 나중에는 가정 폭력과 억압을 피해 집을 나와 성당의 고아원에서 일하게 된다. 비비아나가 천주교에 귀의하게 되는 과정은 단순하다. 종교적 믿음이나 두터운 신앙심이 있어 선택한 것이 아니라 폭력으로부터 안전하게 도피하기 위해서였다. 천주교도가 된 넷째는 드디어 ‘비비아나’라는 세례명을 얻게 된다. 그녀는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부모로부터도 받지 못한 이름을 낯선 종교를 통해 갖게 된다. 이처럼 바오와 비비아나가 의화단과 천주교를 선택하게 되는 이유는 역사가들이 말하듯 거대한 목표나 숭고한 뜻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그저 각자의 삶에 충실했을 뿐이다.
작가는 의화단도 의화단에 희생된 천주교도들도 절대선과 절대악의 이분법으로 나눠 놓지 않는다. 바오 일당이 천주교도들을 살해하는 과정에서 여성과 아이들이 희생된다. 작품 에는 십자가 뒤에 숨어 악행을 정당화하는 비겁한 천주교도가 등장한다. 작가가 바오와 비비아나를 통해 최대한 균형 잡힌 태도를 유지하려 노력할수록 극중 인물들은 절대적인 옳고 그름으로 나눌 수 없는 상황에서 고민한다. 이들은 의화단과 천주교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바오는 자신의 행동을 국가를 위한 것으로 정당화 시키지만 비비아나는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좀처럼 찾아내지 못한다.
그래서 이들의 또 다른 자아를 상징하는 것으로 등장하는 것이 진시황과 잔다르크이다. 바오는 의화단이 되면서 진시황의 환영과 만나고 적들과 싸울 때에는 진시황이 되어 강인한 영웅의 모습을 보인다. 종교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되면서 비비아나가 보는 것은 잔다르크의 모습이다. 그들이 택한 길은 그 또래 소년 소녀들에게는 무겁고 험난한 것이었다. 과연 이 길이 옳은 것인가에 대한 물음, 정체성의 혼란의 결과는 역사적으로 위대한 인물로 평가받는 이들을 통해 빌려온 자아이다. 진루엔 양의 작품에서는 이렇게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항상 큰 화두가 된다.
작가는 중국계 부모님을 둔 미국인이다. 미국에서 태어났고 자랐지만 동양인의 외모를 하고 있는 그는 미국인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이러한 자신의 경험을 그린 것이 <진과 대니>이다(원제는 ). 동양인이 매우 드문 학교로 전학을 온 진은 학생들로부터 은근한 따돌림과 편견어린 시선을 받는다.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부모님이 중국계라는 이유로 미국인이 될 수 없던 진이 선택한 것은 대니라는 백인 소년의 모습을 한 또 다른 자아였다. 그리고 작가는 진이 백인이 되기 위한 노력을 손오공이 인간이 되고자하는 열망으로 빗대어 풀어낸다. <의화단>과 <진과 대니>는 전혀 다른 모습의 두 개의 자아가 등장하는 것도, 중국 고사를 통해 이야기를 보다 매끄럽게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방식에서도 서로 흡사하다.
<진과 대니>에서 손오공 이야기를 가져왔다면 <의화단>에서 작가는 경극의 주인공들을 작품 속으로 불러낸다. 바오와 그 동료들이 무술을 수련하고 싸움에 임하기 전 주문을 외우자 진시황, 관우, 손오공 등 중국의 역사와 고전에 등장한 영웅들로 변신한다. 권법 수련을 하고 주문을 외우면 총과 칼에도 죽지 않는다는 믿음이 의화단원들에게 존재했던 것을 작가는 이렇게 풀어낸다. 아무리 주문을 외우고 조상들의 넋이 보살핀다 해도 사람의 몸은 총과 칼을 막아낼 수 없다. 의화단의 믿음은 무지했고 신식무기로 무장한 서양 군대에 대한 어떠한 대책도 치밀한 전략도 없었다. 그러나 작가는 의화단이 신봉했던 이러한 믿음을 조롱하지 않는다. 의화단 단원들이 경극 속의 영웅호걸이 되어 총을 앞세운 서양 군대에 맞서 용감히 싸우게 된다는 것은 다분히 판타지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에서 역사적 사실 앞에 객관성을 유지하면서 이야기의 흥미로운 전개도 포기하지 않으려한 작가의 고민을 엿볼 수 있다.
바오는 진시황과 만나 그에게 철학과 사상을 배운다. 하나 된 중국을 만들어낸 위대한 군주인 동시에 백성에게 가혹한 폭군으로 기록된 진시황처럼 바오는 한림원 도서관을 불태운다. 진시황의 분서(焚書)의 재현이다. 결국 소년의 전쟁은 실패한다. 그러나 마지막의 대반전은 소년과 소녀의 전쟁이 어느 한쪽의 승리나 패배로 평가할 수 없음을 이야기한다. 작가는 바오와 비비아나가 운명적으로 마주한 비극을 통해 중국의 복잡한 역사를 매우 철학적이면서도 이해하기 쉽게, 그리고 무엇보다 매력적으로 그려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