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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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순이 내 사랑

웃음과 드라마, 액션과 판타지김성훈(만화평론가)2005년에 단행본으로 출간된 은 출간 전 서울애니메이션센터에서 주관한 사전제작지원공모에 선정된 작품이다. 사전제작에 관한 지원심사가 소량의 원고와 작품에 관한 기획안을 통해 이뤄...

2017-07-26 김성훈
<영순이 내 사랑>
웃음과 드라마, 액션과 판타지
 
김성훈(만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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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에 단행본으로 출간된 <영순이 내 사랑>은 출간 전 서울애니메이션센터에서 주관한 사전제작지원공모에 선정된 작품이다. 사전제작에 관한 지원심사가 소량의 원고와 작품에 관한 기획안을 통해 이뤄진다는 점을 상기해본다면 이 작품은 이미 기획 단계에서부터 사람들을 매혹시킬만한 무언가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제작지원에 선정되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작가에게 기쁜 일이요, 작품 활동에 대한 주요한 동기부여가 될 것이다. 그런데 작품 후기에서 작가는 지원이 결정된 이후 원고 진행이 순조롭지 못해 스스로 선정 취소를 요청했었다고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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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큼 힘들고 어렵게 탄생한 작품이라는 얘기도 될 것이지만, 또한 그런 만큼 이 작품은 작가에게도 그리고 독자에게도 소중한 작품이 될 만하다. 작가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필모그래피에 있어 첫 번째 단행본으로서 독자들에게 이름을 알리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며, 독자들로서는 이처럼 유쾌하고 발랄한 작품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웃음과 드라마
 
이 작품은 크게 두 개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단락에서는 주요인물에 대한 설명을 세 개의 에피소드로 진행해 나간다. 우선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작품의 주인공인 영순에 대한 소개가 펼쳐진다. 이름이 가지는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이미지(?!)를 고려할 때 많은 이들이 여성이라고 짐작할 수 있겠지만, 뜻밖에도 주인공은 남성이다. 게다가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으로 등장하는 그는 손님들로 하여금 불편함을 넘어 위협감마저 느끼게 될 만큼 남성적인 얼굴을 지닌 캐릭터다. 그렇게 독자들의 머릿속에 은연중에 자리 잡고 있었을 영순=여성에 관한 고정관념은 매우 남성적인 외모의 주인공으로 인해 산산이 부서진다. 세상에 존재하는 선입견에 대한 전복이자, 동시에 세상에 존재하는 영순이라는 이름을 지닌 모든 남성들에게 미안해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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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그와 같은 외모로 인해 채용 하루 만에 해고되는 그의 모습은 우리 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외모지상주의의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나아가 그를 자르는 사장님의 얼굴 역시 잘생김보다는 못생김에 가까운 형편이라서 상황이 주는 해학과 위트 또한 극적이다. 그러니 작품은 도입부에서 이미 주인공에 대한 소개, 현실에 대한 풍자 그리고 만화가 지녀야 할 웃음까지 세 ???리 토끼를 잡고 있다.
 
이어지는 두 개의 에피소드에서는 영순의 룸메이트이자 절친인 미국과 과거에는 영순의 여자친구 였지만 현재는 미국의 여자친구가 된 정자에 대한 소개가 등장한다. 배경이 되는 곳은 영순이 살고 있는 어느 달동네 여인숙.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시작한지 하루 만에 잘리고 힘겹게 방으로 들어서며 영순을 미국을 부른다. 야근이??서 늦을 줄 알았는데 방에 불이 켜져 있던 것이다. 헌데 환한 방안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웬일인가 싶은 것도 잠시, 방 한편에 위치한 장롱으로 주인공의 눈길이 머물고 잠시 후 장롱 속에 절친과 전 여자친구가 함께 숨어있는 것을 발견한다. 통속적인 드라마에서 나올법한 흔한 관계 설정이지만, 실연을 경험한 독자들에게는 두 배신자에 대한 분노보다 영순에 대한 안쓰러운 감정이 먼저 생기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일 듯하다. ‘죽고 싶은 심정이라고 하면 딱 맞는 표현일까. 서글픈 현실을 마주한 주인공이 자신을 조롱한 두 남녀와 일분일초라도 더 마주하고 있는 것은 치욕스러운 일일지니 그 길로 뛰쳐나가 도로를 질주하는 영순의 뒷모습에 우리는 짠한 감정을 막을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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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주인공 영순과 두 명의 친구들에 대한 소개를 고달픈 현실그리고 처절한 배신이라는 키워드로써 집약해나가던 작품은 이제 주인공에게 그래도 살아야 하는 길을 제시한다. 이때 제시되는 또 다른 모티브는 외계인이다. 지금까지 보여준 독한 서사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선택된 구제책이다. 하지만 만화라서 가능한 상상력이기도 하다. 쌀쌀한 날씨에 맨발로 뛰쳐나온 영순은 그 길로 공사 중인 건물 옥상에 오른다. 익히 짐작할 수 있듯이 세상에 미련이 남지 않은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보편적 방법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세상을 등지려는 그의 의도 속에는 매우 합당한 이유가 있음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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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불안, 주거불안, 그리고 연애불안의 삼중고는 (이 작품이 발매되고 나서 1~2년 후에 유행처럼 번졌던 단어인) ‘88만원 세대의 지독한 현실이 그대로 담겨져 있는 것이다. 거기에 마침내 인내심의 한계를 보게 만든 절친의 배신은 영순에게 살아야 할 어떠한 이유도 찾기 힘들게 만들었으리라. 그런 생각들을 하며 올라왔을 건물 옥상에서 그는 뜻밖에도 외계인을 만난다. “영순 씨 같이 착한 사람을 도우러 온 외계인이라며 자신을 소개한 그녀는 영순에게 자신이 지니고 있던 따뜻한 목도리를 선물한다. 덕분에 안정을 찾게 된 영순은 다시 ??신의 방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그리고 자신에게 미안함을 전하는 미국에게 오히려 둘 다 좋아하는데 둘 다 잃을 뻔했다며 미국과 정자의 관계에 대해 인정해주는 포용력을 보여준다.
 
액션과 판타지
 
이처럼 첫 번째 단락에서는 주요인물에 대한 소개가 주를 이루었다면, 두 번째 단락은 첫 번째 단락을 토대로 주인공에게 새로운 이야기를 부여한다. 다시 말하면, 첫 번째 단락에서 소개된 주인공의 처지와 배경을 바탕으로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간다. 이때 두 번째 단락에서 보이는 서사의 분위기가 첫 번째 단락과는 뚜렷이 구분된다. , 첫 번째 단락이 치정(癡情)이 주가 되는 단편 드라마에 가까웠다면, 두 번째 단락은 주인공을 그대로 가져온다는 측면에서는 옴니버스 구성이자 동시에 음모와 추리 그리고 액션이 뒤섞인 하드보일드 드라마의 모습도 지닌다. 가령, 주인공이 변변한 직업 없???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던 것은 그가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음악을 위한 일종의 방편이었고, 룸메이트 미국 및 전 여자친구 정자의 관계도 애초에 음악을 통해 형성되었음을 자세히 소개한다. 그리고 이들이 생계를 위해 공연하던 업소에서 사기를 당하고, 그 일에 대해 사과를 받으려는 과정에서 더 큰 음모가 개입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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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밤업소에서 공연을 하다가 일자리를 잃게 된 영순이 다른 곳을 소개해준다는 업소 부장 말에 솔깃하여 소개비까지 건네주게 된다. 하지만 영순은 새로운 영업장에서 오디션을 보자마자 바로 잘리고, 뒤늦게 소개비까지 주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미국은 영순을 대신해 업소부장을 찾아가 담판을 지으려 한다. 하지만 미국은 큰 상처를 입고 병원으로 실려 가고, 이번에는 영순이 미국의 부상에 대해 사과받기 위해 업소부장을 찾아간다. 결국 영순 역시 큰 싸움에 휘말리게 되는데, 사상자가 발생하여 경찰이 수사에 들어간다. 경찰??? 추격을 피해 달아나던 영순이 모든 사건의 발단이 된 전문킬러와 맞닥뜨리게 되면서 이야기는 최고조에 이른다. 이처럼 두 번째 단락에서는 뒷골목 세계의 음모를 이야기 전면에 배치함으로써 첫 번째 단락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만들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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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첫 번째 단락과 두 번째 단락이 전혀 다른 분위기를 만들어가고 있다면, 영순이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 외계인의 존재는 작품 전체에 있어서 판타지라는 또 하나의 성격을 부여한다. 영순이 영희라는 이름을 부여한 이 캐릭터는 첫 번째 단락에서 친구와 연인에 대한 배신감으로 인해 옥상에서 뛰어내리려고 했던 영순을 죽음으로부터 막아낸 동시에 두 번째 단락에서는 때로 영순의 외로움을 달래주기도 하며, 때로는 혼란을 가중시키는 역할을 수행한다. 그것은 곧 영순에게 닥친 지독한 현실뒷골목의 음모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두 가지 이야기에 대해 주인공의 시선에서 하나의 이야기로 일관성을 지켜주는 역할까지 담당하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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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순의 입장에서는 두 단락이 만들어낸 모든 서사들이 영희라는 캐릭터를 통해 달아나고 싶은 힘겨운 세상이었던 셈이다. 결국 영순은 영희를 떠나보냄으로써 지금까지 자신을 괴롭혔던 세상과도 화해를 시도한다. 이제 자신이 도망칠 수 있는 판타지가 사라졌지만, 덕분에 지나온 시간보다 더욱 충실한 현실의 오늘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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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훈

만화 칼럼니스트
《만화 속 백수이야기》, 《한국 만화비평의 선구자들》 저자
http://blog.naver.com/c_m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