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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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생각나

타인의 연애를 지켜보는 즐거움김성훈(만화평론가)여기 우리가 흥미롭게 지켜볼 만한 연애담이 있다. 주인공의 이름은 ‘장미래’. 그녀는 프리랜서로 활동하면서 만화가가 되려고 준비 중이다. 블로그를 통해 자신의 작품들을 사람들에게 선보이기도 ...

2017-06-27 김성훈
<자꾸 생각나>
타인의 연애를 지켜보는 즐거움
 
김성훈(만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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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우리가 흥미롭게 지켜볼 만한 연애담이 있다. 주인공의 이름은 장미래’. 그녀는 프리랜서로 활동하면서 만화가가 되려고 준비 중이다. 블로그를 통해 자신의 작품들을 사람들에게 선보이기도 하며, 그 과정에서 현역 만화가들과도 네트워크를 만들어가고 있다. 그녀가 특히 주목하는 만화가는 최도일이다. 그의 만화를 보고 난 후 그에 대한 관심이 생겼고, 호감도 지니게 되었다. 몇 번의 약속이 어긋난 후에 마침내 두 사람은 오프라인에서 만남을 가지게 된다. 또 다른 만화가 백승태까지 더해져 첫 만남 자리는 공통의 관심사를 지닌 이들끼리의 의기투합이 되었고, 동시에 방향을 점칠 수 없는 연애가 시작된다.
 
, 언제까지 탈 것인가
 
여기서 잠깐! 장미래에게는 남자친구가 있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남자친구의 이름은 정상인’. 만화가 지망생과 공무원 수험생의 만남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쩐지 썩 어울리는 조합은 아닌 듯하다. 한편, 만화가로서는 알 만한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있는 최도일에게도 여자친구가 있다. 그녀의 이름은 유명지. 최도일과는 어릴 때부터 알아온 고향친구이자 지금의 두 사람은 동거하고 있을 만큼 매우 친밀한 관계다. 그러므로 미래와 도일의 만남은 현실적으로 보자면 동업자끼리의 정보공유 차원이어야 하며, 도의적으로 보아도 같은 목표를 둔 동지 이상이 되어서는 안 되는 셈이다. 적어도 상인과 명지에 대한 예의를 지킨다면 마땅히 그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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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처음부터 미래와 도일 모두가 서로에게 사심(私心)’이 있었다는 점이다. 미래는 도일과의 만남을 약속할 때마다 기대감에 부풀어 올랐고, 그 약속이 깨질 때마다 적잖이 실망감을 보였다. 명지와 이미 한지붕 아래 살고 있는 도일 역시 호시탐탐 미래와의 만남을 도모했으니, 두 사람 사이에는 ??업자 혹은 동지와 같은 의미를 넘어 다른 감정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몇 번의 어긋남 끝에 마침내 찾아온 만남의 기회에 대해 미래는 남자친구와의 선약쯤은 백색 거짓말로 제쳐버리는 적극성을 보였고, 그날 만남 이후 도일 역시 수시로 미래와의 재회를 노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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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 대한 사심은 승태에게도 있었다. 첫 만남의 술자리에서 미래에게 출판사를 소개시켜주겠다며 더듬이를 뻗치던 그는 그녀에게 남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도 미련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 서울 강북에 살던 그가 늦은 밤 택시를 타고 서울 강남에 살고 있는 그녀를 굳이 바래다주는 속내에는 어쩌면 자신이 남자친구를 대신할 수도 있다는 일말의 기대가 자리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한 기대는 교감을 바탕으로 한 썸은 아니었기에 그녀로부터 몇 번의 통화거부와 읽씹을 당한 후 그는 함께 창작하는 동지의 자세로 돌아간다. 물론 그 이후에도 결코 줄어들지 않는 그의 오지랖은 미래와 도일 그리고 도일과 영지 사이에 끊임없이 발현되면서 타인의 연애에 대한 뒷담화가 어떤 민낯을 지니고 있는지 가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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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서로의 감정을 조금씩 살펴나가던 미래와 도일은 급기야 하룻밤을 함께 보낸다. 그로부터 썸은 끝이 나고, 이제는 밀당이 시작된다. 썸이 끝나고 밀당이 바로 등장하게 된 것은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즉 두 사람에게는 상인과 영지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남자친구와 여자친구로 존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도일과 함께 밤을 지새운 후 상인의 자취방에 가서 도일을 회상하는 미래의 모습은 도덕적으로 정당하지 못하다. 영지가 보증금을 낸 월세방으로 귀가하는 도일 역시 떳떳하지 못한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일까. 두 사람의 관계는 완벽한 연인의 모습을 갖추지 못한 채 시간이 흘러 다시 의 형태로 복귀한다. 그것은 각자가 상인과 명지에게 이별을 고한 후에도 마찬가지다. 특히, 명지에 대해 완벽히 정리하지 못한 도일의 감정과 행동들은 내내 미래를 괴롭히는 원인으로 자리 잡는다.
 
또 하나의 썸
 
썸은 사전적(?)으로 남녀가 본격적인 연애를 시작하기 전 미묘한 관계로 풀이된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의 핵심은 미래와 도일의 끝을 알 수 없는 이라 할 수 있다. 그와 함께 작품 후반부에 슬쩍 자리 잡은 백승태와 여성만화가 김겨자의 밀고 당기기 또한 이 작품 전체를 연애담으로 구분 짓는데 있어서 힘을 실리게 한다. 헌데 썸의 정의에서 남녀라는 주어를 빼고 본격적인 연애를 시작하기 전 미묘한 관계라는 측면에서만 보자면, 이 작품 속에서 또 하나의 썸을 발견할 수 있다. , 주인공 장미래와 그녀의 꿈인 만화와의 관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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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초반부터 그녀의 인생 목표는 만화가로 설정되어 있다. 외주 일을 하면서도 틈틈이 습작을 하였고, 그것을 블로그에 올려 사람들과 소통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로 인해 최도일이나 백승태처럼 실제로 만화가 직함을 달고 있는 작가들과 네트워크도 형성했다. 또한 백승태의 추천으로 습작들을 모아 출판사에 가져가 보기도 했으며, 만화에 매진하기 위해 공동작업실에서 나와 혼자서 작업해보려고도 했다. 이러한 모습들은 그녀가 만화에 대해 지녔던 애정들이 이른바 그린라이트로 발현되는 지점들이다. 하지만 만화를 통해 알게 된 최도일과의 관계가 실제 썸으로 이어지면서 그녀와 만화의 썸은 방향을 잃는다. 최도일에 대한 감정이 그녀를 지배하면서 만화에 대한 그녀의 목표의식은 설자리를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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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만화에 대한 그녀의 썸이 나갈 방향을 잃어버린 모습의 정점은 새로운 만화잡지가 창간됨에 따라 백승태의 적극적인 추천에 힘입어 창간호 작가진에 포함되었을 때다. 데뷔의 꿈이 이뤄질 수 있는 기회이건만, 정작 그녀는 자신의 만화에 대해 자신감이 없다. 그녀의 그와 같은 소극적인 자세에 대해 창간호 작가진 가운데 한 명인 김겨자는 그런 사람들은 도대체 왜 만화 그리려고 하는 거야? 만화가 소리 듣고 싶어서?”라며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한다. 만화 작업에 몰두하기 위해서라며 도일이 낙향해 머물고 있는 지방에까지 내려가 보지만, 정작 만화는 제대로 그리지도 못한 채 도일과 감정싸움만 벌인다. 그것은 곧 만화와의 썸에서 멀어져버린 그녀의 모습을 명확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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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그녀와 관계된 두 개의 썸은 하나의 썸이 온전히 작동되지 못함으로써 다른 하나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가령, 도일이 서울을 떠나 머물고 있는 고향마을은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여전히 생명력을 지니고 있는 시골이다. , 도일에게 있어서 동네 아저씨와 아줌마들은 모두 어렸을 때부터 알던 사람들이고, 그것은 곧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으면서 묘령의 여인과 함께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그 동네에서 공공연히 알릴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미래로서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애인이라고 당당히 소개하지 않는 도일이 서운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미래는 자신의 처지를 냉정히 돌아볼 필요가 있다. 연애도 제대로 되지 않고, 만화도 멀어지고 있는 현실에 대해 그녀는 과연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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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하지만, 이 작품은 연애담이다. 미래와 도일의 썸 외에 미래에 대한 백승태의 더듬이질도 있었고, 김겨자와 백승태의 느린 교감도 더해지면서 연애담으로서의 내용은 더욱 풍성해진다. 그 속에서 주인공에게 던져진 만화에 대한 화두는 이야기에 다채로움까지 갖추게 한다. 휴대폰이나 조명 등 불빛이 투과되는 곳에서만 노란색이, 그리고 인물들의 피부가 드러나는 곳에서만 살색이 사용되는 매우 제한적인 컬러의 노출은 인물들의 감정을 읽어나가는데 있어 오히려 몰입감을 높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사각 틀에 갇혀있지 않는 컷의 배열은 자신들의 감정에 충실히 따르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보다 효과적인 연출로 보인다. 그렇게 작품은 주도면밀하게 타인의 연애를 지켜보는 즐거움을 완성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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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훈

만화 칼럼니스트
《만화 속 백수이야기》, 《한국 만화비평의 선구자들》 저자
http://blog.naver.com/c_m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