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드 인 경상도>
과거를 빌려 현재를 성찰하다
김성훈(만화평론가)
군사정권이 막을 내린 이후, 특히 2000년대에 들어와 ‘지역갈등’ 혹은 ‘지역감정’이라는 단어는 마치 죽어버린 단어처럼 일상에서는 자취를 감춘 듯하다. 그랬던 이 단어들이 부지불식간에 되살아나는 때가 있다. 바로 선거철이다. 국회의원이나 지자체단체장 혹은 대통령 선거 때면 특정 정당에 대한 지지가 우리나라의 지도를 양분해버리는 모습을 지속적으로 접하면서 아직 우리 사회에 갈등의 소지가 적지 않음을 깨닫게 만드는 것이다. <메이드 인 경상도>는 그러한 갈등을 조금이라도 줄여보고자 하는 어느 만화가의 노력이 담겨진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응답하라 1980년대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을 시사만화라고 일컫는 것은 적절치가 않다. 내용 거의 대부분이 작가가 성장기에 겪었던 일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서 오히려 회고담에 가깝기 때문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가정사, 가령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이야기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러한 점을 뒷받침한다. 또한, 독자들과는 전혀 무관한 일들, 이를 테면 지금은 은행에서 일하고 있는 어린 시절의 친구를 아직 만나지 못하고 있다거나 동네에서 유명했던 건달이 일찍 죽은 이유를 모른다는 등과 같은 내용들은 마치 일기에서나 등장할 법한 이야기들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작가 개인의 경험이 독자들에게도 특별한 의미가 될 수 있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그와 관련하여 우선 작품 속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생생한 ‘사투리’다. 작가는 대구 출신이며, 그러니 작가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주인공은 물론 주변 인물 모두 그 지역 사투리를 구사하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어쩌면 해당 지역 출신 독자들에게는 매우 반가운 단어들의 연속이기도 하겠거니와 반면 그곳에서 태어나 자란 독자가 아닌 경우에는 이해 못 할 단어나 문장도 있을 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을 스스럼없이 읽어나갈 수 있다면 그것은 직설적인 사투리 사용의 이유가 타 지역과의 거리감을 늘리는데 일조하는 배타적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경상도라는 지역의 정서에 관해 이해의 폭을 높이려는 의도이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작품 속에 등장하는 날것 그대로의 사투리는 오로지 리얼리티로 존재하며, 그러한 현실성이 ‘경상도’라는 지역을 좀 더 이해할 수 있는 바탕으로 자리하고 있다.
두 번째 키워드는 ‘기억’이다. 즉, 작품은 작가 자신이 머릿속에서 떠올릴 수 있는 시기, 그러니까 (당시 호칭대로 표기하자면) 국민학교 입학 전인 여섯 살 때부터 시작되어 고등학교 입학까지 이어지면서 완벽하게 1980년대를 복원시켜 나간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시기를 지나왔던 비슷한 연령대의 독자들에게 묘한 동료의식을 부여하고 있다. 가령, 어린 시절에 보았던 영화 <람보>나 <쾌찬차>, 혹은 홍콩할매 ???신에 관한 소문, 그리고 야간에 불을 끄고 시행되던 방공훈?? 등에 대한 경험담은 그것을 보는 독자들에게도 한 세대 이전의 시간들을 고스란히 복기하게 만든다. 그렇게 작가 개인의 미시사로 시작된 기억들은 동시대를 지나온 모든 이들에게 함께 적용되는 거시사로 확대된다. 그것은 곧 경상도나 전라도 혹은 강원도나 충청도 등 지역을 불문하게 만드는 경험으로써 - 분열과 갈등을 짊어졌던 부모 세대와는 구분되는 - 같은 시간을 공유하며 성장한 세대라는 교집합을 완성시킨다.
마지막으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사람들’이다. 작가가 자신의 기억을 빌려 작품에서 주로 전하는 이야기는 그 시절에 만났던 사람들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은 다시 세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일단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있으며,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도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가족도 친구도 아닌, 가령 선생님이나 동네 건달, 혹은 아는 형 등과 같이 주인공의 성장기에 약간씩은 영향을 끼쳤을 인물들의 이야기도 그려진다. 이처럼 주인공의 어린 시절 속에 존재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은 독자들에게 ‘경상도’라는 지역을 이해할 수 있는 특징적인 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
우리가 남이가? 남이다!
지나간 시간 속에 자리 잡은 특징적인 기억들을 현재로 소환해 이야기를 완성시키는 많은 작품들은 대체로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킨다. 가령, 영화 <건축학개론>이 그렇고, 드라마 ‘응팔 시리즈’가 그렇다. 이와 같은 서사들은 그 시간들을 지나왔던 많은 이들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성공적인 콘텐츠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이러한 측면은 <메이드 인 경상도>에서도 어느 정도 작용하고 있어 보인다. 요컨대 작가가 전하는 기억은 1970년대에 출생하여 1980년대에 ‘국민학교’를 거쳤던 세대들이라면 모두가 공감할 만한 이야기를 기본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사이렌이 울리면 책상 밑으로 숨어야하?? 민방위 훈련이나 저녁 즈음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 하던 일을 멈추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했던 기억 등은 1980년대에 유소년기를 지나왔던 이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에피소드들이다. 분명 군사정권에 의해 통제되고 획일화를 강요받던 시간이었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에 대한 정서적 감응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보다 중요한 부분은 저자가 간직한 그와 같은 유년시절의 경험으로부터 ‘경상도 출신’이라서 짊어지고 있는 부채의식에 관한 것이다. 이 지점에서 이 작품은 ‘감성팔이’와는 전혀 다른 방향을 설정한다. 가령, ‘텃세’에 관한 에피소드를 살펴보자. 1980년대 당시 주인공의 아버지는 화장지 도매상을 운영하고 있었고, 아버지로부터 화장지를 받아 손수레를 끌고 여러 동네를 돌아다니며 소매하는 다수의 판매원이 등장한다. 판???원들 가운데 몇몇은 자신의 고정적인 영역을 확보하고 있는 ‘텃새’도 있었던 반면, 확실한 판매처를 갖지 못해 떠돌아다니며 판매해야 하는 ‘철새’와 같은 처지도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텃새’의 영향력을 ‘텃세’에 비유하며 그것을 특권의식이 아닌 ‘나의 영역을 침범당할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해석하는데 있다. 그리고 그러한 시각은 전라도 사람들에 대한 경상도가 지니는 지역감정으로 이어진다. 즉, 텃세의 바탕에는 일종의 불안감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작가는 이 단어에 대해 “세상이 모르는 단어였으면 싶고, 없어진 말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한다.
그런 측면에서 작가가 전하는 유년시절의 기억은 감정이 응축된 ‘드라마’가 아니라 조금은 덤덤한 ‘보고서’에 가깝다. 그리고 그와 같은 특징은 지극히 정치적 수사로 사용되는 ‘우리가 남이가?’라는 경상도 사투리에 대해 ‘남이다!’라는 이야기를 꺼내는 것으로 귀결된다. 가령, 아무리 가까운 친구 사이일지라도 결국 타인이며, 서로를 좋아하더라도 다르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래서 친구지만 똑같은 길을 갈 수 없으며, 거꾸로 말하자면 서로 달라도 우리는 서로를 충분히 좋아할 수 있다고 전한다. 나아가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 대해서도 “부모님의 노파심을 굳은 마음으로 끊어낼 수 있어야 한다.”면서 “내가 나의 삶을 살아낼 때 부모님을 더 사랑할 수 있??.”고 역설하고 있다. 그렇듯 작가 개인의 경험에서 비롯된 이야기는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편견에 맞서며 보편적이며 타당한 관점을 지향해나간다.
결과적으로 작품은 우리가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는 그릇된 현재의 모습들을 성찰하게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 작가가 취한 방법론은 개인의 경험 속에서 지역감정이 어떻게 자리 잡았는지를 찬찬히 되???아보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1980년대를 가로지르며 작가가 경험한 대구의 과거 속에서 광주라는 이름이 그리고 전라도라는 이름이 어떻게 각인되어 왔는가를 되짚어 본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안에 마치 좀비처럼 죽지 않고 살아있을지도 모를 지역감정에 관한 부적절함과 그것의 무용함에 대해 깨닫기를 희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