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그녀들의 연애담
일단 작품 전체를 가로지르는 큰 이야기는 ‘엄마의 연애’다. 이혼을 하고 아들과 살고 있는 주인공에게는 수년간 만나온 남자가 있다. 그런데 그 남자에게 또 다른 여자가 있었으니, 작품은 두 여자의 만남에서부터 시작된다. 한 남자를 두고 얽힌 두 여자의 갈등은 핸드폰 문자로 욕지거리를 주고받다가 급기야 집 앞 오거리에서 만나 머리끄덩이를 부여잡는 싸움으로 확대된다. 마치 온라인에서 다투다 오프라인에서 결투까지 벌이는 ‘현피’를 떠올리게 하는 모습이다. 이쯤 되면 우리는 궁금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엄마’라는 여자가 저럴 수 있을까?
사실 ‘엄마’와 ‘연애’라는 두 단어의 조합부터 범상치 않다. 따로 떨어져서 보면 특별한 것이 없지만, 나란히 놓고 보면 왠지 어울리지 않는 의미들이다. 즉, 결혼을 한 여성들에게 엄마라는 또 다른 이름이 부여되는 순간 그녀들이 지닌 사랑이라는 이정표는 거의 자식들을 향한다. 그런 측면에서 지금까지 엄마가 될 수 있는 자격은 곧 연애와 단절되는 시점에 부여될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남편의 부재 속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편모 슬하 자녀들에 대한 우리 사회의 편향된 시선을 고려한다면, 아버지 부재 아래 있는 자녀들에 대한 그녀들의 지극정성은 가히 눈물겨운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들은 곧 엄마에게 부여되는 시간 속에는 남자 따위는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 사회의 암묵적인 합의였음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엄마와 연애, 두 단어에 관한 우리들의 심리적 거리감은 거의 조합을 허용치 않을 정도에 가까웠으리라.
그러니 주인공이 ‘엄마로서’ 보여주는 행보는 꽤 파격적이다. 다 큰 아들과 함께 살고 있는 아파트에 남자친구가 수시로 드나들기도 하며, 급기야 남자친구와 편하게 지내기 위해 아들에게 독립을 종용하기도 한다. 고달픈 현실을 잊기 위해 친구들과 나이트클럽에 가기도 하고, 호구 한명을 잡아 이른바 ‘엎어치기’를 하여 웨이터로 일하는 남자친구의 매상을 올려주기도 한다. 부킹해서 만나는 변변찮은 상대방 남자에 관한 속마음이 드러날 때면 엄마이기 이전에 영락없이 한 명의 여자일 뿐이다. 그녀의 친구들 역시 이와 같은 주인공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구내식당을 운영하는 연순이는 아들이 초등학생일 때 미대 교수랑 바람이 났으며, 바람둥이 남편 때문에 마음고생하던 명옥이는 연하남과 교제하다가 버림받는다. 남편이 일찌감치 제구실을 하지 못하던 새침떼기 경아는 주인공 몰래 주인공 남자친구에게 추파를 던지기도 한다. 이들의 모습 그 어디에도 우리가 알고 있던 ‘지고지순한 어머니상(像)’은 없다. 그 많던 ‘진정한 엄마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둘. 그녀들의 일터
작품은 그처럼 ‘인생을 즐기는 여성’이라는 이야기 속에 한편으로 ‘힘겹고 고달픈 속사정’을 보여줌으로써 다시 평범한 우리 시대의 엄마로 복귀하게 만든다. 우선 엄마로서 파격적인 주인공의 현재 속에는 ‘신파’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의 전형적인 ‘우리 시대의 중년 여성’의 과거가 자리 잡고 있다. 아버지로부터 부여받은 ‘이순심’이라는 본명에서는 어쩐지 귀한 아들 대신 내몰림 당하던 근대사 속 여성??의 흔한 위치가 그려진다. 스무 살 때 선을 본 후 결혼하였고, 시집살이에 이어 남편의 바람과 노름이 마치 떼어놓을 수 없는 한덩어리처럼 열거되며 마침내 이혼에까지 다다른다. 그리하여 닿을 내린 그녀의 현재는 ‘청소노동자’다.

이른바 ‘3D 직종’의 대표주자라고 할 수 있는 직업이지만 마음 맞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그녀의 모습은 꽤 만족스러운 느낌이다. 정작 그녀를 힘들게 하는 것은 노동의 고됨보다는 일상 속에서 마주하게 되는 불쾌함들이다. 가령, 화장실에 자주 가게 되니 일하는 시간엔 물도 많이 마시지 말라고 지적하는 소장의 지시는 기본적인 인권이 무시되는 현실을 반영해 보인다. 그런 소장에게 명절만 되면 이른바 ‘떡값’을 상납하기 위해 동료들에게 돈을 모으는 반장의 모습 역시 여전히 변하지 않은 부당한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물론 ‘남편 실직하고 하나 뿐인 아들 사업이 부도난 뒤 소장한테 굽실거리게 된’ 반장 역시 우리 시대 엄마들 가운데 한 명이긴 하다. 어찌됐든 떡값내기를 거부한 동료 언니가 얼마 뒤 해고되고, 이를 소장에게 항의하던 또 다른 동료언니 역시 폭행당한 후 주인공에게 일터는 더 이상 만족스럽게 느껴질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그러니 노조의 필요성이 대두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다. 하지만 중년의 여성청소노동자인 주인공에게 노조라는 단어는 쉽게 다가설 수 있는 이름이 아니다. 주변으로부터 도움을 받아 우여곡절 끝에 노조를 만들지만 소장과 반장이 주도한 어용노조의 등장으로 그녀들의 노력이 한순간에 물거품 되기도 한다. 그렇게 주인공의 도전은 실패했고 그로 인해 그녀 또한 퇴사 압박을 받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은 전혀 위태로워 보이지 않는다. 일터에서 그녀의 위치는 점점 더 위기로 몰리고, 그럴수록 연애 또한 갈피?? 잡지 못하지만 왠지 이소연 여사는 어제와 다름없이 건재하다. 어쩌면 그만큼 우리 시대 엄마들에게 힘겨운 현실은 그저 일상인 듯싶다.
이처럼 <엄마들> 속에서는 더 이상 ‘남편이 벌어온 돈으로 아이들을 키우고 살림’하던 시대의 엄마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맞벌이가 당연해진 현실에서 살림과 육아까지 책임지는 우리 시대 엄마들에게 과거에 고정된 ‘완벽한 어머니상’은 설득력이 없음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족이라는 끈을 놓지 못하는 엄마들의 맨 얼굴이 드러나는 순간은 따로 있다. 바로 전 남편의 어머니, 그러니까 한때 그녀의 시어머니였던 분의 장례식장에서다. 이제는 남남일 뿐인 이의 부음을 듣고 주인공은 고민 끝에 장례식장에 들른다. 그곳에서 아내를 먼저 보낸 시아버지에게 고개 숙여 ‘죄가 죄인이에요’라는 얘기를 건네는 주인공의 모습 속에 현재를 살지만 여전히 과거에 속해 있는 우리 시대 엄마들의 모습 또한 보게 된다. 자식이 잘못되어도, 남편이 다쳐도, 혹은 시어머니가 먼저 돌아가셔도 여전히 그저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우리 시대 어머니들의 모습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