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터우즈>의 윈터는 시체의 조각을 이어붙인 인체의 겉모습을 지녔지만 내면은 텅 빈 존재였다. 윈터는 인간들 곁에서 그 내면을 채워나가기 시작한다. 윈터의 내면 채우기, 즉 인간화 과정은 ‘감정’에 집중된다. 비인간을 다룬 SF 장르물들이 그렇듯이 비인간의 인간화 과정에서 반드시 습득해나가야 할 무언가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언어라든지, 추억이라든지 하는 것들 말이다. 보통은 감정을 습득하게 되는데, 어찌되었든 이것들은 모두 인간의 것들이라고 믿는,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자부하는 무언가이기 때문이다. <윈터우즈>의 윈터 역시 인간의 자부심, 즉 감정들을 배운다. 기쁨, 소중함, 감사, 분노 같은 감정을 배우고 마지막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이별의 슬픔까지 체득한다.
윈터의 인간화는 비단 윈터만의 목표는 아닌 것 같다. 조에를 포함해 그들을 둘러싼 주변 인물들 모두 조에와 윈터가 변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변화는 바로 그들이 인간이 되는 것이다. 실험체가 진정한 인간이 되기 위해선 내면의 변화가 필요하다. 결국 조에는 반쯤 성공한 실패작으로, 윈터는 완벽한 성공작으로 결말지었지만, 그들은 완벽한 인간의 형태를 지닌 사라보다 더욱 인간적인 모습으로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 남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지점에서 인간이지만 오히려 비인간적인 모습을 보이는 사라는 윈터와 대척점에 놓인다. 사라에게는 부모의 죽음이라는 동기는 있지만 그것으로는 행동의 개연성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할 만큼 냉혈하고 이기적인 인간이다. 이 작품은 사라를 통해 단순히 겉모습만 인간의 형태를 갖추었다고 인간으로 완성된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하지만 어쩌면 사라가 더욱 인간적인 것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이쯤에서 묻고 싶다. 왜 윈터는 인간이 되어야만 하는가. 왜 윈터와 조에가 인간이 되길 바라는가. 그리고 이것은 누구의 욕망인가. 즉 비인간을 소재로 한 대부분의 SF물이 그렇듯이 왜 비인간은 인간이 되어야만 인간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는가이다. 조에는 자신이 성공작이 되길 원했고, 성공작은 다름 아닌 바로 인간이 되는 것이었다. 윈터는 자신이 제인의 가장 소중한 존재이길 바랐고, 결말에서 그는 완벽한 인간의 모습으로 등장했다. 작가는 인간이 되어 나타난 윈터에게 친절하게 눈썹까지 붙여주었다. 작품 후기에 쓰인 작가의 말에 의하면 눈썹이야말로 감정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인간의 도구이기에 눈썹을 그렸다고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과 비인간의 사랑이 왜 꼭 비인간을 인간처럼 만들어야 이루어질 수 있을까라는 점에 의문을 던져야만 한다. 왜 비인간을 다룬 수많은 SF서사물에서는 여전히 비인간 자체만으로는 인간과 종의 결합을 나눌 수 없고, 반드시 인간화 과정을 거쳐야만 비인간을 인정할 수 있는 것일까. 이것은 결국 비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 차이를 무화(無化)시키는 방법으로, 일종의 또 다른 차별이 내재되?? 있는 것이 아닌지 고민해 보아야한다. 아니면 상상력의 한계이든가.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다만, <윈터우즈>는 순화해 읽고 싶다. 이 작품은 인간이 가지고 싶어 하는 사랑의 욕망을 담은 로맨스이기 때문이다. 작품 속 윈터는 인간이 되었지만, 현실에서 윈터는 비인간적일 뿐이다. 즉, 낭만적 사랑의 실현, 사랑의 환타지가 충만한 유토피아와 같은 세계가 로맨스물의 매력이 아니겠는가. 결국 윈터를 굳이 인간으로 만들면서까지 사랑의 결실을 이루려는 이면에는 숨겨진 인간의 욕망을 읽어낼 수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비인간의 모습, 다르게 말하자면 비인간을 인간화하려는 욕망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윈터가 감정을 배우며 인간이 되어 가는 과정에서 그의 눈에는 오로지 제인 밖에 보이지 않는다. 조형성도 뛰어난 남자 주인공은 오로지 여자 주인공 한 명만 바라볼 뿐이다. 여자 주인공의 흐트러진 모습에도 윈터는 그녀가 반짝반짝 빛나는 존재로 보일 뿐이며, 그녀가 실의에 빠졌을 때도 윈터는 따뜻한 말로 그녀를 위로한다. 마치 모든 우주가 그녀를 중심에 놓고 돌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고 그녀만을 바라보며, 그녀를 지키기 위해 목숨도 내놓을 줄 아는 남자. 그녀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아픈 몸도 돌보지 않고, 보고 있어도 보고 싶다고 말하는 남자. 나 때문에 변하려고 노력하고, 결국 나 때문에 변한 남자. 결국 어떤 조건과 상황에서도 나만을 바라보고 사랑해주는 유일한 남자가 바로 윈터 이다. 윈터는 그야말로 로맨스 물의 이상적인 남자주인공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했다. 그런데 과연 ???런 남자가 세상에 존재할까. 일종의 유토피아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이성으로서 완벽한 남성에 대한 환상과 사랑에 관한 이상주의가 극에 달한 장르가 바로 로맨스물이다. 인간과 비인간의 종의 결합 이전에 여성의 완벽한 낭만주의를 실현시켜 줄 상대가 필요하다. 그것은 종을 초월하기 보다는 오히려 인간적일 때, 현실에서 가지기 힘든 완벽한 인간의 모습일 때 더욱 매료된다. 낭만적 환상에의 추구. 둘의 결합이 인간과 시체라는 고딕(소설)적 상황을 잊게 할 만큼 완벽한 인간이 되었을 때, 비로소 독자의 마음이 그들의 사랑을 용인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윈터우즈>의 그림은 낭만성의 도취를 부추기는 데 한 몫 했다.
2014년부터 2017년까지 네이버에 연재한 <윈터우즈>의 아쉬운 점이 있다면 서사의 진행에서 촘촘하지 않은 스토리가 종종 발견된다는 것과 결국 급하게 전개된 결말로 인해 서사의 결락이 생겼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운이 오래 남는 명언과 같은 대사들과, 로맨스의 달달함과 이별의 가슴시림이 적절한 페이스에 등장함??로써 로맨스 장르물의 결을 흐트러뜨리지 않는다는 점이 이 웹툰의 서사의 허점을 채워준다.
그러나 <윈터우즈>는 색감이 너무나도 예뻤고, 눈이 시릴 만큼 아름다웠다. 캐릭터의 조형성도 뛰어나 로맨스 장르물의 매력에 빠지기에 충분했다. 읽는 내내 단행본으로 소장하고 싶다는 욕구와 웹툰이라 다행이다는 안도 사이에서 갈팡질팡 했다. <윈터우즈>의 이국적 정취와 ‘중세인 듯 중세 아닌’ 신비롭고 아름다운 배경은 현실을 초월?? 버린다. 게다가 종종 등장하는 동화 같은 그림체가 선사하는 몽환성은 독자들을 낭만적 사랑이야기에 빠지게 만들기에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