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담한 유년의 기억과 첫 사랑 - 크레이그 톰슨 <담요>
김소원 (상명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학과 외래교수, 만화포럼 위원)
독실한 기독교도인 부모님의 보수적이고 강압적인 교육에 순응하며 어떻게든 편안해지고 싶었던 소년 크레이그. 학교에는 가난뱅이라고 따돌리는 친구들이 있고 집에는 말을 듣지 않는 어린 아들을 먼지와 벌레가 가득한 어두운 벽장 속에 가차 없이 가둬버리는 무서운 아버지가 있다. 부모님의 명령으로 겨울방학 때마다 마지못해 다니던 성경 캠프에서조차 따돌림을 받던 크레이그를 구원한 것은 신도 기도도 아닌 첫 사랑 소녀 레이나였다. 학교의 학생들 모두가 알고 있는 소년의 가난과 아버지의 괴팍함은 크레이그를 상상의 세상으로 숨어들게 만들었다. 그렇게 회색빛이었던 삶에 처음으로 색깔이 입혀지듯 등장한 레이나는 크레이그가 가슴 속에 묻어뒀던 감수성을 밖으로 꺼내준다. 레이나는 부모님의 불화와 이혼으로 고통 받고 있었고 둘은 사춘기의 예민한 감수성을 공유하며 서로를 위로한다.
이 작품은 엄숙한 기독교도인 아버지와 비슷한 부류의 어른들의 모습을 수도 없이 보여준다. 그들이 얼마나 모순 적인지, 그리고 그러한 모순이 아이들을 얼마나 상처 입히는지. 크레이그는 직접적으로 그들을 비난하거나 자신의 고민과 방황이 당신들 때문이었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만 담담히 보여줄 뿐이다. 어린 크레이그에게 유일한 피난처였던 침대 위, 담요 속에서 상상으로 만든 천국 속으로 달아나던 어린 형제의 모습을 작품 중간 중간 함께 보여주는 것으로 유년기의 우울함은 더욱 선명해진다. 주인공은 성장하면서 끊임없이 질문하고 그 답을 찾으려고 한다.
<담요>는 미국의 그래픽 노블 작가인 크레이그 톰슨이 열 살 무렵부터 성인이 되기까지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작품 전체에서 크레이그는 자신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고 끊임없이 질문하지만 좀처럼 대답을 찾아내지 못한다. 그리고 결국 현재의 나에 대한 불안 속에서 나름의 해답을 얻어낸다. 이와 같이 작가의 성장기를 그린 자전적 이야기임에도 감정의 과잉이나 모자람 없이 여러 시점의 이야기를 짜임새 있게 엮어가는 솜씨는 탁월하다. 스토리 구성만이 아니다. 흑백 만화의 간결함으로 그려진 여러 장면들은 무채색임에도 충분히 아름답다. 특히 크레이그와 헤어지고난 후 레이나가 크레이그가 그녀의 방 벽에 그렸던 그림을 하얀 페인트로 덧칠해 지워 버리는 장면에서는 아! 하는 탄성이 나왔다. 하얀색 롤러는 레이나의 방에 그려진 커다란 나무 그림과 함께 만화 속의 칸까지도 깨끗이 지워 버린다. 그리고는 마치 <담요>라는 작품 속에 존재했던 ‘레이나의 공간’이 말끔히 사라지듯 새하얀 여백만 남는다. 만화 속에 마땅히 존재해야하는 칸이 사라지고 주인공의 인생은 새로운 장을 시작한다. 이야기는 아픈 성장통을 겪고 어른이 된 크레이그의 모습으로 끝이 난다.
두툼한 하드커버 장정의 만화책 뒤표지를 가득 채우고 있는 수상내역과 ‘○○선정 최고의 그래픽 노블’ 이니 ‘역대 최고’라느니 하는 요란한 수식어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그리고 이 작품은 발표 당시 겨우 스물여덟이었던 작가에게 화려한 수상경력을 선물했지만 작가의 가족들은 결코 아름답지 않은 자신들의 과거와 억지로 마주해야 했다. 작품 속에 누구나가 겪지만 가난과 부모의 무심함 때문에 더욱 혹독했던 성장기가 고스란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어린 크레이그가 가진 몇 가지 기억은 그 고통이 독자들에게도 전해져 온다. 그럼에도 ‘죽기 전에 봐야 할’ 이라는 간지러운 수식어까지는 아니지만 ‘꼭 한 번 보았으면’하는 그래픽 노블 혹은 미국만화로 추천하고 싶다. 미국만화가 슈퍼 히어로물의 화려한 컬러 만화가 전부가 아님을, 문학성과 독특한 감수성을 지닌 작품과 개성 있는 작가들도 존재하고 있음을 잊지 않게 하는 작품 중 하나이다. 600페이지에 가까운 압도적인 두께에도 그 분량을 전혀 느끼지 못할 정도로 몰입해서 읽어 내려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