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그림을 보여준 답례야. 나와 데이트 하는 걸로는 답례가 되지 않으려나?”
“그 그림에 당신 시간을 빼앗을 정도의 가치는 없습니다.”
-1권 38p, 아키라와 아오키의 대화 中에서
화랑(?廊)을 경영하는, 지적이고 아름다운 연상의 여인과 묵직한 재능을 가졌으나, 아직은 만개하지 못한 젊고 서툰 미대생. 이 남녀가 사랑을 엮어가는 한 편의 영화 같은 이야기. <여름의 전날>을 소개한다.
대원씨아이를 통해 한국어판으로 발간된 일본만화 <여름의 전날>은, 책 표지에 당당하게 19세 미만 구독불가의 빨간 딱지를 붙인 성인만화다. 필자의 생각으로 이 작품에 ‘빨간 딱지’가 붙게 된 것은, 아마도 아오키와 아키라, 두 남녀 주인공이 농도 짙게 사랑을 나누는 몇몇 수위 높은 장면 때문일 것이라 추측된다. 작가는 요시다 모토이라고 하는데, 솔직히 잘 모르겠다. 검색을 해보니 이 작품 외에도 2003년에 세주문화사를 통해서 <연풍>이라는 작품이 한국어판으로 출간된 것으로 보아 아주 신인은 아닌 것 같지만, 바다 건너 우리나라에까지 이름을 알릴만한 인기작을 만든 만화가는 아닌 것 같다.(이 리뷰를 읽는 이 작가의 팬이 있다면 정보가 너무 부족하기 때문이니 너그럽게 이해해주셨으면 한다)
총 5권으로 완결된 이 ‘어른들의 러브스토리’는 매우 균형이 잘 잡혀 있는 작품인 것 같다. 무엇보다도 작화와 연출이 매우 훌륭하고, 대사나 스토리도 흠 잡을 곳이 거의 없다. 다만, 자극적이거나 격정적인 작품은 아니다. 어찌 보면, 밋밋하고 조용하게 진행되다가 막판에 서늘한 여운이 남는 일본 영화 비슷한 분위기랄까? 아마도 ‘영혼까지 불타오를만한 러브스토리’를 기대하고 이 책을 집어 드신 분이 있다면, 묵직하고 담담한 이 작품의 ‘톤’에 매우 실망하실 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여름의 전날>은 책의 제목처럼, 초여름의 조용하고 따사로운 느낌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일관되게 유지되는, 잔잔하고 담백한 러브스토리다.
“단지 나는 보고 싶어. 그와 그가 보는 세계를.”
-1권 114p, 아키라의 대사 中에서
히요시가오카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는 아오키 테츠오,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장남으로 자란 그에게는 어릴 적부터 ‘그림’에 대한 조용하고 강인한 동경이 있었다. 부모, 특히 아버지가 원했던 ‘아버지의 모교’인 명문대학에 당당히 합격했지만, 결국 아버지와 연을 끊는 지경까지 갈 정도로 고집을 피운 끝에 자신의 꿈이었던 히요시가오카 미대를 선택하고 만다.
그에게는 예술에 대한 정열도, 화가로서의 재능도 충분했지만, 인생이란 뜻대로 되지 않는 법. 대학생활 4년 동안 아오키의 예술적 재능은 만개하지 못했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으리라. 진로에 대한 고민(내가 죽을 때까지 그림만으로 밥을 벌어먹고 살 수 있을까? 같은 가장 현실적인 고민)부터 예술을 대하는 필요 이상의 진중함과 심각함(가령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가 떠오를 때까지 아예 붓을 잡지 않는 것이나 ‘난 이걸 왜 그리고 싶은 걸까?’ 같은 형이상학적 고민 같은) 같은 추상적인 것에 너무 깊이 매달린 것이 원인이라면 원인이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이 화가 지망생은 너무 “젊었다.” 그리고 “그래서 순수했다.”
히요시가오카 미대 근처에서 화랑 ‘게츠카(月下)’를 운영하는, 지적이고 아름다운 여자 아이자와 아키라, 그녀는 미술관련 전문잡지에 정기칼럼을 연재할 정도로 미술에 대한 소양이 높으며, 언제나 곱고 화사한 기모노를 차려 입고서 조용하고 따뜻한 미소로 상대를 편안하게 해주는 특유의 분위기로, 다양한 거래처에 신망을 얻고 있는 우수한 화랑 경영자이기도 했다.
예술관련 직종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지만, 그녀도 아마 원래의 꿈은 화가였으리라. 그러나 현실은 냉혹한 법, 신(神)은 그녀에게 예술가의 재능을 주지 않았다. 대개의 경우, 예술가의 길을 지망하다가 자신의 재능에 한계를 느끼고 절망한 사람들은 둘 중에 하나의 선택을 한다. 첫 번째는 아예 망각해버린 것처럼 예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을 하며 ‘동경하던 세계’에 대해 확실하게 선을 긋고 거리를 두는 것, 두 번째는 결국 그 세계를 떠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고 그 세계와 관련된 일을 하며 ‘그 세계의 관계자 또는 주변인’으로 남는 것. 아키라가 선택한 것은 후자였다.
“야, 모리. 어쩔 수 없이 꼭 해야 하는 일들이...있잖아. 그림만 그릴 수는 없으니까. 밥도 먹어야 하고, 씻기도 해야 하고, 화장실도 가야 하고.”
“응. ‘꼭 해야 하는 일’도...그림을 그리는 일에 포함되는 거 아닐까? 창작이라는 건 작업을 할 때만이 아니라 인생 전부가 다 얽혀 있는 걸 거야.”
-1권 160p, 모리와 아오키의 대화 中에서
졸업반이 되어서도 여전히 인생과 예술에 대해 고민하고 있던 아오키는 아르바이트를 하던 히노데 화구에서 게츠카 화랑의 오너 아이자와 아키라를 만나게 되다. 첫 인사는 그저 간단한 일상적 대화였지만, 두 번째 만남에서 강가에서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는 아오키의 모습을 보고 아키라는 ‘강렬한 무언가’를 느끼게 된다. 그날 이후, 아키라는 매일 강가로 나와 그림에 열중하고 있는 아오키의 뒷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며 서서히 둘 사이의 거리를 좁혀간다.
순진하기도 했고, 그때까지 여자경험이 전혀 없었던 아오키는 아키라의 상냥한 접근에 마치 길고양이처럼 경계의 눈빛을 보내며 일정한 거리를 두려 노력하지만, 연상의 여인의 능숙한 관록을 경험조차 없는 젊은 미대생이 당해낼 리가 만무했다. 몇 번의 우여곡절을 거쳐 폭우가 쏟아지던 날, 아오키의 사소한 친절을 계기로 둘은 같이 밤을 보내게 되고, 육체적으로 깊은 사이가 되지만, 다음????? 아침 아오키가 느낀 감정은 ‘연인도 아닌, 지인도 아닌’ 뭔가 어정쩡한 관계로부터 비롯된 두려움이었다. 그러나 아오키로부터 자신의 공허함을 채워줄 ‘무언가’를 발견한 아키라의 능숙한 대처로 둘은 여름이 가기 전에 본격적인 연인으로 발전하게 된다.
“의외로 고흐는 잘나가는 법을 고민했었어. 결국 실패했지만...나 ‘일’을 하고 싶어. 수입으로 이어진다는 의미가 아니라...그것도 정말 존엄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것조차도 잊고, 순수한 충동, 내 영혼이 바라는 것을 쫓고 싶어. 진짜 ‘나의 일’...비웃어도 돼. 어설픈 소리 한다 싶지?”
-2권 111~113p, 아오키의 대사 中에서
<여름의 전날>은, 사실 만화의 형식으로 표현되었을 뿐, 내러티브 구조가 영화나 소설에 더 가깝다고 느껴진다. 젊고 재능이 넘치는 순수한 화가 지망생 청년이, 지적이고 아름다우며 관능적이기까지 한 연상의 화랑 오너와 ‘첫사랑’을 경??하는 이야기.
작가인 요시다 모토이는, 어찌 보면 흔해빠진 진부한 소재를, 매우 안정적인 작화와 유려한 연출을 통해 한편의 고급스러운 러브스토리로 바꿔놓았다. 마치 작가의 자전적인 경험담처럼 느껴질 정도로, 매우 디테일하고 리얼하게 미대의 풍경이나 미대생들의 생활을 사실적으로 표현해놓았고, 미술계의 전반적인 풍토나 업계의 전문적인 이야기들도, 맛있는 요리의 적절한 양념처럼 작품 속에 잘 배어 있다. 인상적인 첫 만남, 열애, 예술적인 영감을 주는 또 다른 여자의 등장, 방황하는 남자, 안타까워하는 여자, 고뇌, 분노, 다툼 그리고 이별... <여름의 전날>은 매우 전형적인 ‘러브스토리’의 구조를 따라가지만, 다 읽고 난 후에는 아주 길고 애잔한 여운이 남는다. 세상물정에 해박한 어른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러브스토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