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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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

“얼마 전에 취직을 했다. 그리고 Ho에게 프러포즈를 했다. Ho는 울면서 좋다고 했다. 결혼이란 걸 내가 해도 되는 건지 나도 잘 모르겠다. 다만 얼마 전에 어른이 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Ho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Ho는 좋은 아이다. 나는 아마도...

2015-12-08 유호연
“얼마 전에 취직을 했다. 그리고 Ho에게 프러포즈를 했다. Ho는 울면서 좋다고 했다. 결혼이란 걸 내가 해도 되는 건지 나도 잘 모르겠다. 다만 얼마 전에 어른이 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Ho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Ho는 좋은 아이다. 나는 아마도 이렇게 좋은 여자를 다시는 못 만날 것이다. Ho는 착한 아이고 똘똘하고 사랑스럽고 예쁘다. 눈이 너무 커서 밤에 보면 가끔 깜짝 놀라기도 하고 나이가 나보다 많이 어려 조금 부담스럽고 장애가 있어 소리를 거의 듣지 못하고 가끔 단 걸 너무 많이 먹어 막 배실대기도 하고 황소고집이라 가끔씩 애를 먹이기도 하고, 그래서 수틀리면 뒤돌아보고 내 말은 보지도 않지만 나는 Ho를 사랑한다. 조금 있다가 Ho 어머니께 허락받으러 간다.” - ‘빵빵00’, 원이의 독백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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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인연이라는 것은 참으로 오묘한 것이다. 나에겐 아무 것도 아니었던 짧은 만남이 상대방에겐 일생에서 가장 강렬한 체험이 될 수도 있고, 어쩌면 이렇게 서로에게 괴로운 인연이 있을 수 있나 싶을 정도의 악연(惡緣)도 있으며, 계속 꼬여가기만 하던 일들이 새로운 인연 하나 얻어서 마법처럼 쉽게 해결되는 경우도 있다. 

전혀 예기치 못한 시간과 장소에서 죽을 때까지 평생을 같이 하고픈 운명의 상대를 만날 수도 있는 것이 인연의 신비함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론 어디서부터 어떻게 어떤 인연이 이루어질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내심 많이 두렵기도 한 것이 인연의 무서움이기도 하다. 우리 주변 곳곳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철학관들(속칭 점쟁이들)이 성업 중인 이유도 바로 이 인연의 양면성에 관한 수많은 민초들의 갈망과 궁금증 때문이며, 실제로 세상의 많은 일들이 대부분 인연을 기반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이 불확실성에 기반을 둔 미지의 관계가 우리의 삶에서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것임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      

인연이란, 이렇듯 뭐라 한마디로 정의내릴 수 없는 철학적 관계맺음이며, 미래이자 과거이고 동시에 현재이기도 한, 인간사의 근본을 지탱하고 있는 추상적 개념이기도 하다. 그러나 참으로 아이러니컬하게도 사람들은 자신에게 찾아드는 인연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은 경우가 꽤 많다. 이런 인연의 불균형에서 오는 상대방과의 기묘한 균열이 삶에 있어서 매우 드라마틱한 사건들을 종종 만들어내곤 하는데, 세상을 살아보면 볼수록 참으로 신기한 일들이 많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여기에 소개하는 만화 [ Ho! ]도 바로 이런 신비한 인연에 관한 이야기이다.

“어머님께 인사드리고 왔다. 일이 좀 있었지만 어머님은 내게 Ho를 잘 부탁한다고 하셨다. Ho는 냉장고에 있는 식어빠진 치킨도 잘 먹는다. 혼자 뭘 그렇게 먹나 봤더니 전날 내가 먹다 남긴 치킨이었다. 데워 먹으랬더니 전자렌지로 데운 것이 더 맛이 없다고 했다. 이런 것들을 알기까지 대강 8년이 걸렸다.” - ‘빵일01’, 원이의 독백 中에서 

경상남도 출신의 순수한 청년 하나가 대학에 합격해서 서울로 상경한다. 청년은 공부를 제법 했는지 ‘좋은 대학’에 합격했고, 낯선 도시에서 자취를 시작했다. 생활비만이라도 자기 힘으로 벌어서 부모님의 어깨를 가볍게 해드리자는 생각에, 근처 학원에서 초등학생을 상대로 하는 강사 아르바이트를 시작한다. 면접을 보러간 당일에 바로 현장에 투입되어 첫 수업을 시작하게 되는데, 청년의 첫 학생은 매우 특별한 여자아이였고, 그날부터 청년과 여자아이의 길고 질긴, 드라마틱한 인연이 시작된다.

“장애인이다. 처음 대해보는 장애인이었다...(중략)...못 알아들을 정도는 아닌데 말이 서툴렀다. 약간 유치원생이 말하는 느낌. 그리고 목소리가 대뜸 커지곤 했다. 지금은 이런저런 공부와 경험을 통해 청각장애에 대해 좀 알게 됐지만 처음에는 몰라서 당황도 많이 했다. Ho는 세 살 때 사고로 청력을 잃었다고 했다. 완전히 실청을 한 건 아니지만 거의 듣지 못한다고 했다. 비행기 소리 정도? 그 정도는 느껴진다고 했다. 말을 한창 듣고 배울 때 실청을 해서인지 말이 서툴렀다. 말을 사탕 하나 물고 하는 것 같았다. 전체적으로 데굴데굴 굴러가는 느낌? 그리고 ㅅ, ㅈ, ㅊ, 같은 자음을 발음하기 힘들어했다. 그래서 숙제를 ‘듁제’, 친구를 ‘틴구’같이 발음했다. 받침 역시 구분하기 조금 힘들어하는 것 같았다. 나중에 발음 교정을 받아 많이 좋아졌지만, 좀 막막했다...(중략)...Ho는 자신이 어디를 모르는지 몰랐고 나는 이 아이를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몰랐다. 무엇보다 애가 반응이 없고, 애매하다. 일단 문제풀이를 시켰다. 그래서 애가 문제를 어떻게 푸는지부터 봤다. 틀린 게 있으면 보고, 어떻게 틀리는지 체크했다. Ho는 기본을 몰랐던 것 같았다. 여태 대충 이해시키고 넘어간 걸지도 모르겠다. 일단 진도보다 아는대로 기본 원리를 가르쳤다. 처음부터 하나씩. 또 틀리면 차근차근 다시 설명해줬다. 반응이 없어도 다시 설명해줬다. 아무튼 열심히 가르친 것 같다. Ho도 덤덤하게 내 설명을 듣고 문제를 풀었다. 금세 연습문제도 풀 수 있게 되었다...(중략)...Ho에게 너는 뭘 좋아하냐고 물었더니 또 한참 답이 없다가 영화 보는 걸 좋아한다고 했다. 근데 디즈니 만화영화나 볼 줄 알았더니 영화를 많이 알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가 영화 보는 걸 좋아해서 자연스럽게 영화 보는 게 취미가 됐다고 했다...(중략)...‘근데...한국영화는 별로 안 보는갑네?’, ‘한국영화는 자막이 없어서 내용을 몰라요’, ‘맞나’, 그랬다. ‘다음 시간에 보재이~’, ‘던댕니- 하나 듄다’...페로★로쉐. Ho가 지금도 좋아하는 초콜릿이다. 그때 난 그게 뭔지도 모르고 받았다. ‘고맙다’, ‘네-’...Ho는 첫인상과는 달리 의외로 붙임성 있는 아이였다. 사실 Ho를 입구까지 배웅할 생각은 없었다. 그럼에도 그렇게 한 건 Ho가 장애인이라 안쓰러웠기 때문인지, 첫 학생이라 애틋했기 때문인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그날부터 Ho는 내 담당이 되었다.”
- ‘빵일01’, 원이의 독백 中에서 발췌  

만화의 제목이기도 한 “Ho!”는 작품의 여자주인공인 청각장애인 소녀 ‘윤호’의 이름이기도 하다. ‘빵일01’(2화)에서 남자주인공인 원이를 처음 만났을 때가 초등학교 6학년(13살)이었다. 어렸을 적 부모의 이혼으로 엄마와 둘이서 살아왔다. 남자 주인공인 원이의 본명은 ‘김원’, 작품의 스토리를 대부분 이끌어가는 작중 화자(話者)이기도 하다.(사실 여자주인공인 Ho의 작중 비중은 남자 주인공인 원이에 비해 엄청나게 적은 편이다. 이는 작품 자체의 방향이 원이의 입장과 시간흐름에 맞춰 철저하게 내러티브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Ho를 처음 만났을 때 20살이었고, 대학 신입생이었다. 후에 자세히 나오지만 경상남도 양산시 외곽의 시골 마을에서 살다가 대학진학을 계기로 서울로 상경했고, ‘겉모습은 사납게 생겼지만 속은 착하고 순한 경상도 촌놈’이라는 캐릭터로 작가가 그리고 싶었기 때문인지, 독백을 제외하면 모든 대사를 경상도 사투리로 맛깔나게 구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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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 Ho! ]는, 대학 신입생 ‘원’과 청각장애인 소녀 ‘호’가, 각각 스무 살과 열세 살 때, 학원 강사와 학생으로 처음 만나서, 장장 8년에 걸쳐 신비한 인연을 이어가는 이야기다.

“소리 없이 배운 말. 그게 Ho가 배운 말이라고 했다. 말은 쉽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거다. 부모라는 존재도 만능이 아니니까. 포기하지 않고 가르치신 어머니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 ‘빵이02’, 원이의 독백 中에서   
    
[ Ho! ]는 만화가 억수씨(본명 남준석)가 2014년 10월 25일부터 2015년 9월 5일까지 네이버 웹툰 섹션에서 매주 일요일에 연재한 웹툰이다. 작가인 억수씨에게는 <연옥님이 보고계셔>, <오늘의 낭만부>를 거쳐 세 번째 장편이며, 이 작품은 원작이 있는데 그 원작이 매우 특이하게도 ??설이나 영화, 다큐멘터리 같은 것이 아닌, 일본 사이트 "2ch"에 작성된 게시물이라고 한다. 게시물의 제목은 "「娘さんください」って言いに行くんだw"("따님을 주십시오"라고 말하러 간다!)이며, 매 회 마지막에 감수자와 함께 정확히 표기되어 있다. 감수자는 청각장애인 김민경 씨다. 작가인 억수씨는 를 구상하고 나서, 어렵게 원작자의 동의를 얻어 한국 실정에 맞게 각색해서 그렸다고 한다. 

작품의 1화에 해당하는 ‘빵빵(00)’에서 ‘늑대와 토끼에 관한 다큐멘터리’로 시작해서 28살의 원이가 Ho의 어머니에게 결혼을 승낙 받으러 가는 장면을 보여주는데, 이 작품의 주요 줄거리가 원이와 Ho가 결혼하기까지의 과정을 원이의 관점에서 풀어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이후부턴 주로 원이의 회상으로 스토리가 진행된다.  

연재 회차는 총 43화로 완결되었고, 빵빵·빵일..일땡·일이....삼육·삼칠 같은 특이한 스타일로 회차가 표기되는데, 중간에 ‘삼팔’ 같은 경우는 (1),(2)로 나뉘어서 2주에 걸??서 연재되었고, 맨 마지막 회차인 ‘구구’ 같은 경우는, 마지막 화인 줄 알았던 ‘사빵’을 2015년 8월 23일에 게재하고서 다음 주에 후기까지 보여준 후에, 9월 5일 날 갑자기 올라 와서 많은 팬들을 놀라게 했다. 단행본은 거북이북스를 통해 총 3권이 출간되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만화영상진흥원과 한국만화가협회가 주관하는 오늘의 우리만화 심사에서 2015년 수상작 다섯 편 중 하나로 뽑혔다. 

“부끄럽지 않은 인간이 되시개. 자네는 잘 할 수 있을개야. 건강하게, 범석.”
- ‘빵칠07’, 천범석이 남기고 간 편지.  

[ Ho! ]의 주된 줄거리는, 청춘남녀의 연애담이다. 하지만 실상은 남자주인공인 원이의 성장기다. 겉으로는 대학생과 청각장애인 소녀의 달콤한 러브스토리로 보이지만, 가만히 그 속을 진중하게 ???라보고 있으면, 이 작품은 순수했던 한 소년이 아름답고 슬픈 청년기를 거쳐 밥벌이를 해야만 하는 어른으로 점차 변해가는, 씁쓸하고 먹먹한 성장기임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은 철저히 남자주인공인 원이의 1인칭 시점으로만 전개된다. 그 상황이 상대방에게 어떤 의미인지는 상관없이 모든 사건과 시점, 그리고 해석마저도 원이의 입장에 맞춰져 있다. 작품의 커다란 내러티브는 분명 Ho와 원이가 첫 만남부터 시작해서 결혼까지 이르게 되는 과정이다. 그러나 사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Ho의 등장장면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특히 전반부). 이야기의 대부분이 원이의 시간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의 사건들을 굵직한 것들만 뽑아서 짧게 요약한다면 이렇다. 원이 대학합격 및 상경 → 학원 강사 아르바이트 시작, Ho와 만남 → 대학생활 시작, 첫사랑 수정이 누나 만남 → 고백, 첫 실연, 방황 → 군대 입대 → 전역 후 영어 스터디모임에서 첫 여자 친구인 무진이 만나 교제 시?? → 무진이 졸업 후 취직, 원이도 1년 후 취직 → 원이 회사생활 → 회사 퇴직, 백수 생활 → 다시 Ho와 재회, 취업활동 → 무진이와 결별, Ho와 미묘한 관계가 됨 → 우연한 계기로 인해 Ho와 사귀게 됨 → Ho와 교제, 재취업 성공 → 두 번째 회사생활 → 양가 부모에게 인사, 프러포즈.

위의 전개구도에 아주 가끔, 인상적인 인물들이 원이의 인생에 끼어든다. 원이 방 앞에 살던 공사장 동료 천범석 ???저씨, 첫 직장에서 만난 윤 대리와 박 차장, 백수시절에 만난 게임동료 아라 형 등. 이들은 마치 아주 감칠맛을 내는 조미료처럼, 원이의 인생에 다양한 영향을 끼치면서 원이의 삶에 있어 성장의 주춧돌이 되어준다. 그리고 이런 조연들의 등장은 결과적으로 작품의 맛을 깊이 있게 변화시키는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그리 길지 않은 분량의 웹툰이지만 다 읽는데 꽤 시간이 드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어떤 이의 인생을 아주 세밀히 들여다보는 느낌. 원이가 소년에서 청년으로, 그리고 어른으로 바뀌어가는 과정이 마치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것처럼 디테일하게 묘사되어 있어서, 독자는 아주 자연스럽게, 진중하고 차분하게 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누군가의 인생을 들여다보는데 대충대충 성의 없이 볼 수는 없지 않은가 말이다.

“윤 대리는 재주 많은 깐돌이 같았다. 반면 박 차장은 가장 늦게까지 일했고, 일만 했다. 그냥 뿌리처럼. 일만 했다.”
- ‘??구09’, 원이의 독백 中에서

작품의 마지막 화에서 원이의 나이가 28살이다. 서른도 안 된 총각을 사실 실제 사회생활에서 어른으로 쳐주지는 않지만, Ho와의 결혼을 통해 원이가 어른으로서의 첫 발을 세상에 내딛는 모습을 보여주며 작품은 끝이 난다. 원이가 어른이 되기 바로 직전에 이야기를 끝낸다는 것은 사실 작가의 의도가 명확히 드러나는 지점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이 작품을 통해 작가가 독자에게 보여주려 한 것은 세상물정 다 알고 쓴맛단맛 다 봐서 어떤 일에도 감흥이 없는 중년남자어른이 아닐 것이다. 자신의 알을 깨고 세상으로 나와 비로소 자신의 두 발로 땅을 딛고 온전히 서려고 하는 남자. 그 탄생의 순간. 작가는 아마도 그것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의 알을 깨고 나오는데 어떤 인연이, 어떤 사건이 필요했는가. 자신의 두 발로 땅을 딛고 서 있으려면 어떠한 각오와 노력이 필요한가.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과연 무엇인가. 경험이란 것과 관계라는 것은 삶에 있어서 어떤 의미???가. 이러저러한 철학적 문제들을, 작가는 매회 차분하고 담담한 시선으로 리얼하게 풀어간다. 그리고 그 현실을 지향하는 작가의 태도가, 작품을 읽는 독자들이 원이의 마음에 감정이입하게 만들고, 이는 결국 많은 이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최상의 결과를 낳는다.

“자네는 사람이 자위도구인가?”
- “일구19”, 천범석의 대사 中에서

작품에 등장하는 인상적인 조연들 중 필자의 뇌리에 가장 깊이 박힌 사람은 노가다꾼 천범석이다. 원이가 전역하고 나서 등록금을 벌기 위해 일한, 공사현장에서 만난 62세의 전기기술자다. 천범석은 어느 날 갑자기 원이에게 다가와 붕어가 담긴 검은 비닐봉지를 내밀며 갑작스런 인연을 맺는다. 이 둘의 첫 만남에서 재밌는 것은 원이는 정작 ???가 누군지를 기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인상적인 첫 만남 이후 그가 원이 자취방 바로 앞에 산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뒤로 천범석은 수시로 원이의 방을 찾아오??? 서서히 인연을 두텁게 만들어 간다. 

후에 둘이서 술잔을 나누며 천범석은 말한다. “내가 자네한테 왜 말을 걸었는지 아나? 자네가 인사를 했어...그 넓은 현장에서 자네가 나한테 인사를 했어...그냥 처음 보는 나한테 같은 팀도 아니고, 같은 구역에 있던 것도 아니었는데...아무도...아무도...인사 안 해...이해관계가 없으면...잘 보일 사람 아니면...나도 그런 걸...그런데 자넨...”

그저 인사했다는 이유만으로 손자뻘 되는 청년과 인연을 맺고 싶었던 외로운 할아버지, 그리고 싫을 법도 한데 할아버지가 자신의 인생에 발을 들이는 것을 굳이 막지 않은 원이. 그렇게 시작된 그들의 기묘한 인연은 소소하고 다양한 사건들을 만들어내지만, 그들의 쓸쓸한 이별과 중간의 사건 하나, 그리고 먼 훗날의 우연한 재회는, 필자의 뇌리에 정말 인상 깊게 ??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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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첫사랑 때문에 괴로워하며 울부짖는 원이에게 “자네는 사람이 자위도구인가?”라며 차분하게 말하던 천범석의 모습이나, 맞춤법이 틀린 글씨로 이별의 편지를 써놓고 간 장면은 필자에게 아주 묵직한 울림을 주었다. 실제로 원이는 천범석과의 인연을 통해 ‘괴물이 되지 말자’고 결심하며, 인생에 있어 방향을 정하는 큰 경험치를 얻게 된다.       

“박 차장이 뭐 때문에 그러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마흔을 훌쩍 넘긴 남자가 회사에서 울고 있었다.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업무를 시작했다. 박 차장도 제 자리로 돌아갔다. 그 후로 박 차장이 내 얼굴을 쳐다보는 일은 없었다. 다음 주 월요일 박 차장은 인사 위원회에 불려갔다. 소문으로는 1개월 정직이라는 듯 했다. 박 차장??? 정직 하루 전날까지도 출근해 자리를 지켰다.” 
- ‘일이12’, 원이의 독백 中에서

두 번째의 인상적인 조연은 원이가 첫 직장에서 만난 상사, ‘박 차장’이다. 박 차장은 마치 바위 같은 인물이다. 그는 예전에 있었던 어떤 일 때문에 직장인으로서 가장 치명적인 문제(승진누락)를 안고 그저 묵묵히 자리만을 지키고 있는 중년 남자다. 원이의 표현에 의하면 마치 ‘뿌리처럼’ 자신의 자리에 앉아 일만 하는 사람이다. 회사 내에서, 특히 인사과의 같은 부서사람들은 그런 박 차장을 소외시키면서 은근히 따돌림을 하지만, 그는 전혀 미동도 없고 신경도 쓰지 않는다. 그런 박 차장에게 원이는 관심을 갖게 되고 우연한 계기로 퇴근 지하철에 동승하게 되었을 때, 둘은 비로소 진정한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되는, 짧은 대화를 나누게 된다.

지하철에서의 짧은 대화 이후, 박 차장은 원이와 자주 술자리를 갖는다. 그리곤 서서히 원이와 친해지며 자신의 속마음도 털어놓는 ??터운 사이가 되어간다. 원이는 박 차장의 ‘삶을 대하는 진중한 태도’에서 인생의 덕목 중에 가장 중요한 것 한 가지인 끈기를 배운다. 

그러나 세상일이란 만만치 않은 법, 어느 날 원이는 박 차장의 엄청난 상처를 다시금 헤집어버리는 큰 사건에 자신이 담당자로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무척이나 당황한다. 물론 신입사원에 불과한 원이가 의도한 사건은 아니었다. 인사과의 수완가인 윤 대리가 부장의 지시를 받고 잔머리를 쓴 것이었다. 그날, 원이는 마흔을 훌쩍 넘은 남자가 회사에서 우는 모습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이후 원이와 박 차장의 술자리는 다시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원이는 이 사건을 계기로 첫 직장을 그만 두게 된다. 

재밌는 것은, 원이가 회사 내에서 능력 좋고 대인관계 좋은 능력자 윤 대리를 자신의 롤 모델로 삼고 친해진 것이 아니라, 누구나 기피하는 골칫덩이 박 차장과 친해지기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물론 원이의 그런 평범치 않은 시도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윗??들의 계획에 휘말리며 안 좋은 결과를 맞이하고, 그렇게 사회의 쓴맛을 처음으로 경험하게 해주지만 어쨌든 원이의 사회생활에서의 첫 선택은 약삭빠른 처세를 보여주??? 동료보다는 묵직한 태도를 보여주는 동료를 택했다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퇴사 후 1여 년간은 제 바닥을 보는 순간이었습니다. 좋은 회사에 입사를 했고, 부족하지만 열심히 일했습니다. 하지만 사내에서 인사 비리가 일어났고 모르는 사이 저도 어떤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 동료는 그 인사에 반발해 항의하다 부당하게 징계를 받았습니다. 제게는 소중한 동료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지켜만 보았습니다. 그 이유가 전부는 아니지만...저는 무력함과 비겁함...부끄러움에 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몇 개월을 방황했습니다. 그러면서 어쩔 수 없이 저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지난한 시간이었지만, 그 안에서 저의 장점과 한계를 알게 되었습니다. 제 자신에 대해 좀 더 잘 알게 되었습니다.”
“그럼 본인이 잘하는 건 무???입니까?”
잠시 고민을 했다.
“방향과 끈기입니다.”
“네? 아, 네.”
면접관이 웃었다.    
- ‘이팔28’, 원이의 면접장면 中에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근 2년 여의 백수기간을 보낸 원이에게 앞으로의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난다. 하나는 오랫동안 교제했던 애인 무진이와 결별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어느덧 대학생이 된 Ho와 연인으로서 사귀게 된 것이다. 

무진이의 일방적이고 어이없는 이별 통보에 거의 인생의 바닥까지 떨어졌던 원이는 Ho와 만나게 되면서 점차 힘을 얻어간다. 그리곤 다시 열심히 노력하여 취업활동에 돌입하지만, 세상사가 절대 쉽지가 않다. 번번이 떨어지는 면접...그러던 어느 날, 누구나 꿈꾸는 대기업의 면접장에서 원이는 자신도 모르게 인생의 선배들에게 배웠던 삶의 태도가 자신에게 각인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방향과 끈기’. 

그렇다.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지 말라’던 노가다꾼 천범석의 편지는 원이에게 ‘괴물이 되지 말자’는 삶의 방향을 제시해주었고, 어떤 일이 닥쳐도(비록 마지막엔 잠시 무너지고 말았지만) “나에겐 아내와 자식이 있네. 그뿐이네”라고 말하며 바위처럼 회사의 자리를 지키던 박 차장에겐 삶의 끈기를 배웠던 것이다. 비록 이날의 면접은 결국 떨어졌지만, 원이는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과 가장 소중한 존재가 무엇인지 명확히 깨닫게 된다.   

“나중에 허트로커를 집에서 다시 봤다. 소리 없애고 뮤트로. 재미가 없어서 중간에 껐다. 소리가 들리는 내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 ‘일땡(11)’, 원이의 독백 中에서 

리뷰의 방향이 너무 조연??? 중심으로 나아간 것 같지만, 필자는 라는 작품을 ‘청춘남녀의 러브스토리’가 아니라 ‘한 남자의 성장기’라고 보았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다. 위에서 언급한 천범석이나 박 차장, 그리고 원이의 어머니(잠깐 등장하지만 정말 감동적인 장면을 선사한다)나 Ho의 어머니처럼 원이의 인생에서 큰 이정표가 되어 주는 훌륭한 어른들도 가끔 등장하지만, 역시 Ho라는 존재가 원이에겐 가장 소중하면서도 중요한 존재가 아닐까 한다.

원이는 청각장애인과 소위 말하는 연애를 시작하면서, 그간은 몰랐던 많은 일들을 경험하게 된다. 가령 대화가 아닌 필담을 주로 나눠야 한다거나, 극장에 가더라도 자막이 없는 영화는 보지 못한다거나, ‘백 허그’를 해선 안 된다거나, 어두운 곳에서 대화는 해선 안 된다거나, 아무리 화가 나도 반드시 얼굴을 보면서 말해야 한다거나 하는, 생소하고 어쩌면 다소 불편한 경험들을 하게 되는 것이다. 

원이가 Ho에게 이런 원칙들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까, 말이 안 보이니까” 그래서 원이는 이 생경한 상황들에 하나하나 적응해가고 맞추어 간다. 원래 아주 어렸을 때, 초등학교 6학년 첫 만남 때부터 원이에??? 푹 빠진 대학생 Ho는 그저 즐겁고 행복했지만, 이제 막 어른이 되어가는 원이에겐 하나하나의 모든 순간과 과정이 남다르다.

면접장에서 원이가 얘기한대로, ‘이전 회사에서 배운 것이 있다면 버틴다는 것의 어려움과 무게였기 때문에’, 원이에게 Ho와의 인연은 곧 삶이고, 삶이란 곧 버틴다는 것이고, 그것이 얼마나 어렵고 무거운지를 원이는 몇 번의 경험을 통해 절실히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원이의 방향과 끈기가 잡힌 진중한 태도가, 같이 있을 때 Ho가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배려로 작용하고, 기댈 수 있는 든든한 믿음으로 변하고, 사랑받고 있다는 행복한 마음을 들게 한다. 그렇게 좋은 방향으로 어른이 되어가던 원이는 드디어 재취업에 성공한다.

“딸아이를 잘 부탁합니다...” - ‘삼구39’, Ho어머니의 대사 中에서

여기까지 왔으면, 우리는 이미 결말을 알??? 있다. 왜냐하면, 첫 회의 내용이 취업에 성공한 원이가 Ho의 어머니께 결혼 허락을 받으러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예상하는 대로, 이 작품은 해피엔딩이다. 오랜만에 따뜻하고 행복한 느낌이 들게 해준 ‘사람 사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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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한 줄로 이 작품을 평하라면 이렇게 쓰겠다. “인연은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