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序-
일본만화의 전성기를 구가하는 명작 중 하나로 아다치 미츠루의 대표작 <터치(Touch)>가 있다. <주간 소년 선데이>에서 1981년부터 1986년까지 연재된 야구만화로 쌍둥이 형제인 우에스기 타츠야, 카즈야 형제와 소꿉친구인 아사쿠라 미나미가 주인공이다. 단행본 전 26권으로 완결된 <터치>는 TV애니메이션, 극장판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었고, TV드라마와 영화로도 제작되었으며, 일본만화 최초로 단행본 발행부수 5,000만부를 넘겼고, 누계부수만 1억 부가 넘는 ‘전설의 만화’이기도 하다. (단행본 누계부수는 코믹스판 26권, 와이드판 11권, 문고판 14권, 완전판 12권, 애니메이션 코믹스판 7권 등을 합친 것이다) 1982년에는 제28회 쇼가쿠칸 만화상을 수상한 작품이기도 하다.
이 만화가 일본의 국민만화 중 하나로 불리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갑자원’으로 상징되는 청춘의 열정과 첫사랑의 애틋하고 아련한 기억이, 마법 같은 화학작용을 통해 완벽하게 일체화되어 작품 속에 아름답게 녹아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한 줄로 정의한다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청춘 그 자체’의 감수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팬들에게 아다치 미츠루만의 감수성이라 불리는 ‘고교 야구와 첫사랑의 결합’은, 후속작인 < H2 >에서 다시금 재현되면서 또 한 번 팬들을 열광시킨다. 사실 ‘고교 스포츠와 첫사랑의 결합’은 그의 다른 작품(<슬로우스텝>, <러프>, <카츠> 등)에서도 스포츠 장르와 소꿉친구의 캐릭터만 바뀌어 끊임없이 변주된다. 하지만 묘하게도, 아다치 미츠루의 세계에는 비슷비슷한 이야기를 할지언정 동어반복적인 느낌이 들지 않는, 아주 대단한 마력(魔力)이 존재한다. 그것이 아다치 미츠루의 작품이 내포하고 있는 훌륭한 미덕이자 인기의 원동력이며, 그가 1951년생의 노(老)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청춘’을 작품의 중심소재로 다루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아다치 미츠루만의 저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그가 26년 만에 <터치>의 속편을 연재한다고 발표하면서, 그의 팬들은 엄청난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표명했다. 기대를 표시하는 쪽이야 당연히 ‘타츠야와 미나미의 뒷이야기’를 보고 싶다는 것이었고, 우려를 표시하는 쪽도 ‘세월이 지나 변해버린 타츠야와 미나미’를 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2012년 6월, <월간 소년 선데이>에 <믹스> 1화가 발표되면서 팬들의 뜨거웠던 기대감이나 걱정스러웠던 우려감은 일거에 종식된다.
발매 하루 만에 잡지가 매진되어 소학관 사상 최초로 잡지를 증쇄하고, 7월호에 1, 2화를 합본으로 실을 만큼 <터치>의 위광을 등에 업은 <믹스>에 대한 팬들의 기대는 엄청났다. 그러나 뚜껑이 열린 26년 만의 속편은, 전편의 이야기와 등장인물을 이어받아 가는 것이 아니라 ‘메이세이 교교 야구부’의 26년 후를 그린, 새로운 이야기로 판명된 것이다.(속편이라기보다는 <터치>의 세계관을 이어받은 일종의 ‘후속작’이라고 보는 편이 더 맞을 것이다.) 그러나 <터치>와 마찬가지로 메이세이 학원에 재학 중인 ‘형제’가 주인공을 맡고 야구, 피가 섞이지 않은 여동생, 소꿉친구 등 아다치 미츠루 특유의 ‘익숙한 소재’가 모두 등장하며, 무엇보다도 ‘갑자원’과 ‘첫사랑’을 마술사처럼 엮어내는 거장의 솜씨도 여전하다. 사실 이런 모든 것을 떠나서, <터치>의 뒤를 잇는 청춘야구만화를 아다치 미츠루가 다시 그려준 것만으로도 그저 고마운 느낌이 드는, 팬으로서 무척 의미 있는 작품인 것 같다.
-本-
1. 작품 개요
2012년 <월간 소년 선데이> 6월호부터 연재를 시작하였고, 현재(2015.06.) 한국어판으로는 6권까지 출간되어 있다. 작품의 무대는 전작과 동일한 메이세이 고교 야구부이며 26년 전, 우에스기 타츠야의 활약으로 갑자원에 진출한 이후 단 한 번도 나가질 못해 현재는 약체 야구부로 전락한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주인공은 타치바나 토우마, 소이치로 형제로 <터치>와는 다르게 토우마가 투수, 소이치로가 포수를 맡아 ‘배터리’로 등장한다. (단 <터치>의 우에스기 타츠야, 카즈야 형제는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쌍둥이 형제지만, <믹스>의 주인공인 타치바나 토우마, 소이치로 형제는 나이만 같고 피가 섞이지 않은 재혼가정의 의형제로 설정되어 있다. 소이치로, 오토미 남매의 어머니와 토우마의 아버지가 재혼하면서 셋이 의남매로 이어졌다.) 히로인은 타치바나 오토미이며 토우마, 소이치로보다 1살 아래이며 소이치로의 여동생이자 5살 때부터(소이치로는 6살) 토우마와 같이 자란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1권부터 3권의 후반부까지는 메이세이 고등학교가 아니라 메이세이 중학교가 무대이며, 타치바나 형제의 중학 야구부 생활을 소개하면서 작품의 ‘밑밥’을 충분히 깔아놓았다. 주인공인 토우마의 ‘초고교급 투수’로서의 잠재력이나, 메인 러브스토리가 될 ‘의남매’ 토우마와 오토미의 디테일한 관계 등등 작품 초반에 향후 스토리 전개에 꼭 필요한 핵심요소 대부분의 토대가 구축되었다. 3권 후반부부터 등장하는 또 다른 히로인 오오카와 하루카는 (토우마는 정작 기억하지 못하고 있지만) 토우마의 소꿉친구로 설정되어 있고, 특별활동조차도 ‘체조부’, 그것도 ‘리본’이다. 익숙한 조연들도 여전히 눈에 띈다. <터치>(마츠다이라 교타로)나 < H2 >(노다 아츠시)에서는 포수로 등장하는 아주 익숙한 외모의 조연캐릭터 이마가와 타다시라던가, 토우마의 라이벌로 등장하는 미타 히로키나 니시무라 타쿠미 등은 아다치 미츠루의 작품에서는 절대 빠지지 않는 ‘눈에 익은 개성적인 조연’들이다.
2. 작품 내용
우에스기 타츠야의 전설적인 활약 이후, 한 번도 갑자원에 진출하지 못한 메이세이 고교 야구부는 이젠 동네북으로 전락한 ‘그저 그런 실력의 약체 팀’이다. 그러나 메이세이 중학교 야구부에는 눈에 띄는 재능을 가진 ‘형제 배터리’가 있었으니, 6살 때 부모의 재혼으로 ‘나이가 같은 형제’가 된 타치바나 토우마와 타치바나 소이치로가 그 주인공이다. 타치바나 토우마는 타고난 강견(强肩)이자 뛰어난 제구력을 갖춘 ‘투수’이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감독의 선수 기용’ 때문에 3루수를 맡고 있으며, 타치바나 소이치로는 천재적 재능과 반짝이는 야구 센스로 일찍부터 팀의 ‘주전 포수’ 마스크를 쓰고 있다. 이 둘 사이에는 소이치로의 한 살 어린 여동생이자 귀엽고 발랄한 매력을 뽐내는 미소녀 타치바나 오토미가 있으며, 이 셋은 어릴 적부터 남매로 자라나 우애가 깊고 단란한 가족의 모습을 보여준다.
1~3권까지는 ‘감독의 이해할 수 없는 선수 기용’ 때문에 불만이 가득 쌓여 있는 타치바나 형제의 야구부 생활과 의남매의 일상에 관한 소소한 이야기가 다채롭게 펼쳐진다. 3권 후반부부터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메이세이 고등학교 야구부’에 들어가는 타치바나 형제의 이야기가 시작되고, 새로운 히로인 오오카와 하루카가 등장해 ‘애정 전선’의 긴장도를 높이며, 세이난 고등학교나 토슈 고등학교, 켄죠 고등학교(과거의 스??? 공고) 등 타치바나 형제의 ‘야구 라이벌’들이 다양하게 부각되면서 본격적인 ‘갑자원 스토리’가 전개된다.
3. 작품 분석
<믹스>의 주된 내용은 의형제가 보여주는 ‘고교 야구’와 의남매가 보여주는 ‘첫사랑’이다. 이젠 ‘아다치 미츠루의 특징’이라고 불러도 무리가 없을 만큼, 고교 야구와 연애라는 두 가지를 축으로 한 ‘익숙한 이야기 전개’를 ‘놀라울 정도로’ 답습하고 있으며 장르적 구분은 ‘야구 만화’로 할 수 있겠지만, 야구 규칙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도 빠져들게 만드는 보편적인 감수성 또한 여전히 건재하다. 이쯤 되면 ‘자기복제’도 거의 예술의 경지에 다다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진대, 정말 대단한 것은 <믹스>가 전작들과 비교해서 재미가 전혀 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실 <믹스>를 논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은 <터치>와의 연관성이다. 작가 스스로 인정한 <터치>의 후속편이고, 그 계보의 정통성에서 비롯되는 <믹스>의 장점이 ??척 많기 때문이다. 일단 재혼 가정인 타치바나 가(家)의 부모들부터가 ‘메이세이 야구부’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토우마의 ??버지인 타치바나 에이스케는 과거 우에스기 타츠야의 ‘등번호 1번’을 동경해 팀의 에이스를 목표로 했으나, 사와이 케이치의 입학으로 백업 투수로 밀려난 과거가 있다. 사진으로만 등장하고 있는 사와이 케이치는 소이치로와 오토미의 친아버지로 두 사람이 3살, 4살 때 사망했다고 나온다. 고교 시절 1학년임에도 불구하고 팀의 에이스를 맡을 만큼 뛰어난 재능이 있었으며 그 해 베스트 8까지 팀을 진출시켰다고 한다. 그를 기억하는 주변 인물들에게 우에스기 타츠야 이후 최고의 투수였다고 회상되지만, 정작 자신의 고교시절을 전혀 이야기하지 않아서 부인인 마유미도, 자식들도 그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설정되어 있다. (타치바나 에이스케나 오오카와 고료가 “그럴 만도 하지.” 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걸 보면, 뭔가 심각한 사연이 있어 보인다.) 이 것 외에도 <터치>의 그림자는 <믹스> 전체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일단 야구부에 관련된 주변 사람들이나 동네의 라면집 사장까지도 ‘우에스기 타츠야 시절’을 지역???회의 멋진 추억이자 자랑거리로 삼고 있으며, 지역의 라이벌인 세이난 고교 야구부의 감독은 바로 <터치>의 니시무라 이사무다.(<터치>에??의 니시무라 이사무의 외모는 그의 아들이자 세이난 고교 야구부에 들어간 니시무라 타쿠미가 그대로 이어받았다) 또한 ‘스미 공고’ 역시 ‘켄죠 고등학교’로 이름을 바꿔 등장, 작중의 라이벌 구도를 두텁게 해주고 있다. 이러한 디테일한 요소 말고도 다양한 캐릭터들의 대사를 통해 <터치>와의 연관성을 계속 보여주고 있으며, <믹스>를 읽고 있는 <터치>의 팬들은 과연 ‘타츠야와 미나미’가 등장할 것인가, 등장한다면 어느 장면에서 어떤 모습으로 등장하게 될 것인가를 고대하고 있다.
<믹스>의 캐릭터 구성이나 스토리 전개 방식을 보면, 아다치 미츠루의 대표작들에서 따온 장점들이 총망라 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일단 쌍둥이에서 의형제로 바뀌긴 했지만, 주인공이 ‘형제’라는 점은 <터치>가, 그리고 히로인인 오토미가 토우마와 ‘피가 섞이지 않은 의남매’라는 점은 <미유키>가, 또 다른 히로인인 하루카의 소꿉친구 설정이나 외모는 < H2 >의 히카리가 떠오른다.
사실 이러한 ‘자기복제’의 경향은 < H2 >에서도 보였다. < H2 >에는 투수와 타자 간의 라이벌 구도, 삼각관계, 강력한 능력과 야비한 마음을 지닌 악당, 강하고 배려심이 깊으며 정정당당한 스타일의 천재 주인공(야한 잡지를 좋아하는 점까지 비슷한), 죽마고우이지만 연적(戀敵)이며 야구에 있어서 최강의 라이벌인 또 한 명의 천재, 맘 좋고 친근한 외모의 뚱뚱한 포수, 소꿉친구 히로인, 매니저 타입의 히로인, 얄미운 여자 후배, 누군가의 죽음, 여름과 비키니 등등 <미유키>, <터치> 등에서 많은 재미를 본 ‘검증된 흥행요소’가 살짝 설정만 비틀어 그대로 등장한다. 하지만 26년 후의 <믹스>에서는 < H2 >에서 써먹은 요소들마저 한데 섞어서 더 넓고 다채로워진 ‘아다치 월드’를 형성한다.(그래서 제목이 “MIX”인지도 모르겠다) 비슷한 느낌의 전작들과 비교했을 때 <믹스>가 가진 단 하나의 차별점이라면, 토우마와 소이치로가 ‘배터리’라는 점인데, 과연 이 차별점이 어떤 식으로 스토리 전개에 영향을 줄지 아직까진 보여주지 않고 있다.
-末-
다른 이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믹스>를 보면서 필자가 느낀 감정은 제일 먼저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이었고 두 번째가 ‘청춘으로의 회귀’였다. 필자가 제일 처음 접한 아다치 미츠루의 만화는 < H2 >였다. 고등학교 때였는지, 대학교 때였는지 정확한 시기는 잘 기억이 안 나지만 별 생각 없이 시간을 때우러 들어갔던 만화방에서 우연히 손에 잡은 < H2 >는, 출출해서 시켰던 라면이 퉁퉁 불어서 못 먹게 될 정도로 정신없이 빠져들었던, 정말 ‘충격적인 만화’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재미와 감동,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가슴 한 구석에 밀려왔던 애틋하고 아련한 감정이 한동안 심신을 멍하게 만들었던, 그 감동의 순간이 20여 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르곤 한다. 그 뒤로 필자는 아다치 미츠루의 이름이 붙은 만화는 무조건 섭렵했고, 소장하려 노력했다. 그 결과 내 책장 한 가운데는 그의 대표작들이 일반판, 소장판을 가리지 않고 거의 다 꽂혀 있다. <터치>, <미유키>, <슬로우 스텝>, <러프>, <일곱 빛깔 무지개>, < H2 >, <진베>, <소프트 프로그램>, <카츠>, <미소라>, <크로스 게임>, 등등 아다치 미츠루의 만화들은 ‘나의 청춘’과 그 궤를 같이 한다.
그의 팬이라고 말하는 누군가가 말한다. 이제 더 이상 ‘자기복제’에 빠져 허우적대는 아다치 미츠루를 보고 싶지 않다고. 또 어떤 누군가는 말한다. 아다치 미츠루의 만화는 자기에게 있어 ‘인생의 만화’였다고. 또 어떤 누군가는 말한다. 아다치 미츠루는 ‘자신의 빛나던 그 시절’을 떠올리게 만들어서 너무 슬퍼진다고. 아마 이들의 말은 모두 다 맞을 것이다. 사실 누가 맞고 틀리고가 중요한 건 아니다. 아다치 미츠루는 <믹스>를 통해 여전히 변함없는 그의 세계를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선보여 주었으니까. 그저 오래된 한 명의 팬으로서 그 사실에 감사할 뿐이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많이 궁금해진다. “타츠야와 미나미는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