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초기화
글자확대
글자축소

기생수 (奇生獸)

히토시 이와아키의 ‘기생수’는 인간에게 침입하여 뇌를 먹어치운 후 그 인간을 지배해 다른 인간을 먹이로 잡아먹는 정체 모를 기생 동물에 대한 이야기이다. 어느 날 하늘에서 기생수의 알이 떨어지고 알에서 유충이 나와 인간의 귀나 코, 또는 피부를 관통하여 침입해 뇌를 먹...

2015-01-27 현수철
Cap_2013-07-29_13-26-16-453.jpg
히토시 이와아키의 ‘기생수’는 인간에게 침입하여 뇌를 먹어치운 후 그 인간을 지배해 다른 인간을 먹이로 잡아먹는 정체 모를 기생 동물에 대한 이야기이다. 어느 날 하늘에서 기생수의 알이 떨어지고 알에서 유충이 나와 인간의 귀나 코, 또는 피부를 관통하여 침입해 뇌를 먹어치운다. 뇌를 잠식당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양식으로 삼아 잡아먹기 시작하며, 기생수가 자리 잡고 있는 인체 부위는 다양한 형태로 변형되거나 강화되어 강력한 살상 무기가 되기도 한다. 주인공 신이치도 기생수에게 침입을 당하나 뇌를 잠식당하기 전 오른손에 기생수가 파고든 상태에서 이를 저지하여 기생수는 어쩔 수 없이 오른손에서 성체가 되고 신이치와의 기이한 동거를 시작한다. ‘오른쪽이’로 이름 붙여진 이 기생수는 엄청난 학습 욕구와 학습 능력을 발휘하여 신이치와 인간 사회를 이해하려 한다. 인간의 몸을 차지한 다른 기생수들 중에는 자신들의 존재 가치와 존재 이유에 대해 철학적으로 사색하여 인간 사회에서 적응하려는 개체들과 ‘인간을 먹어치우라’는 본능에 충실한 개체들이 상존하면서 점차 인간사회에 그 정체가 노출되고 급기야 인간과 기생수들의 대결이 이어진다. 신이치와 신이치의 오른손에 기생하는 오른쪽이는 인간의 뇌를 잠식한 다른 기생수들이 자신들을 적대시하자 이에 대항하여 살아남기 위해 인간의 편에서 다른 기생수들을 대적한다. 신체 변형 능력과 기지에 넘치는 ‘작전’을 구사하는 오른쪽이, 그리고 이 작전을 충실하게 실행하고 전투가 거듭되면서 새로운 능력과 강인한 정신력을 배양하게 되는 신이치는 다른 기생수들을 넘어서는 강력한 힘을 발휘하여 이들을 차례로 무찌른다. 
이 작품에서 겉으로 보이는 폭력적이고 잔인한 장면들의 근저에는, 도대체 인간의 존재 의미는 무엇이고, 지구의 입장에서, 또는 다른 종들의 입장에서 인간이 얼마나 해롭고 잔인한 포식자일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을 단순히 오감을 자극하는 재미있는 결투 만화로 여기고, 끔찍한 장면의 묘사에서 느껴지는 묘한 카타르시스만을 기대하며 감상하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오히려 그러한 끔찍한 살상 장면마저도 정육점에 내장을 펼치고 진열되어 있는 고깃덩이들과 기생수들이 먹어치우는 인간의 살점에 도대체 어떠한 차이가 있겠는가 하는, 조금은 불편한 진실을 상기시킨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철학인 가이아 이론, 즉, 지구는 하나의 생명체로서 스스로를 정화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고, 인간은 유기체인 지구의 평범한 구성물로서 경우에 따라서는 퇴치되어야 할 바이러스와 같은 존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인간이 지구의 오만한 독재자로서 권리처럼 저지르는 환경 파괴에 대해 독자의 진지한 반성을 요구한다. 작품의 도입부에 나오는 내레이션, “지구에 사는 누군가가 문득 생각했다. 인간의 수가 절반으로 준다면 얼마나 많은 숲이 살아남을까...”는 이 작품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를 집약해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의식은 이야기 전개 과정에서 인간이 아닌 기생수들에 의해 끊임없이 제기되며, 인간을 대표하는 신이치는 처음에 인간의 편에 서서 인간을 위해 변명하다가, 점차 인간 못지않게 존중 받아야 할 기생수라는 새로운 종의 입장을 이해하고, 외적인 강력함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인간에 비해 너무나 나약한 존재인 기생수의 살아남기에 공감하게 된다. 그렇다 하더라도 신이치의 공감은 ‘인류를 위험에 빠뜨리지 않는 선’에서 자제되며, 지구에 해악을 끼치기도 하지만 바로 그 지구의 자녀이기도 한 인류의 구성원으로서 신이치는 인류를 위한 실존적 결단을 내리게 된다.

문명 비판적 시각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인간을 포기하지 않는다. 인간을 지구의 해충으로 보고 박멸의 대상으로 삼는 기생수의 입장에서조차 인간의 따뜻한 웃음, 공감, 그리고 어머니의 사랑과 같은 유대관계는 자신들이 뛰어넘을 수 없는 우수한 특질로 비춰지며, 결국 인간이 지구 위에서 번성할 수밖에 없는 이유로 인정하게 된다. 또한 이러한 특질은 작품을 통해 작가가 인간에게 남아 있는 마지막 희망으로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간의 희망을 강조한다고 하여 기생수들의 완전한 패배로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것도 아니다. 결국 기생수들은 인간을 좀 더 잘 이해하고 인간사회에 스며들어 ‘눈에 띄지 않게’ 살아가게 된다. 인간들이 기생수들을 괴물로서 거부하는 것에 비해 기생수들은 자신의 본성을 인간에 맞춰 극복해 나감으로써 마침내 살아남기에 성공하는 것이다. 그러나 각 개체의 강력함에도 불구하고 조직화에 실패한 기생수들은 인간을 넘어서지는 못하고 인간과 공존하는 것에 만족할 수밖에 없다.

독자는 이 작품을 천천히 읽을 필요가 있다. 한 컷 한 컷 등장인물들의 표정과 대사들을 음미하면서 때로는 인간이라는 종의 한 구성원으로서 깊이 반성하고, 때로는 신이치나 기생수들의 입장에 자신을 대입하여 ‘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자신만의 결론을 도출해 봄으로써 작품을 읽는 즐거움을 배가시킬 수 있을 것이다.

만화는 보는 즐거움, 느끼는 즐거움, 생각하는 즐거움을 모두 제공해 줄 때 좋은 작품으로 불릴 수 있다. 기생수는 작가 특유의 절제된 선으로 지나친 과장 없이 담백하게 표현된 그림체, 생생하게 느껴지는 살아남기의 절실함과 상실의 아픔, 읽는 내내 인간을 돌아보게 하는 주제 의식 등이 어우러져 우리 시대의 ‘고전’으로 불릴 만하다. 발표된 지 20년이 훌쩍 넘은 최근에 들어서 TV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고, 실사 영화로 전편이 개봉되어 유수의 블록버스터를 제치고 흥행에 성공했으며 후편이 곧 개봉될 예정이라는 사실은 ‘기생수’가 시대를 뛰어넘는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방증하고 있다.


e826935cf649b2ec579743f3b4353e57.jpg

original.jpg
사실 개인적으로 기생수의 오랜 팬으로서 TV 애니메이션과 실사 영화에 대한 기대감을 감출 수 없다. TV 애니메이션에 있어서는 기생???를 얼마나 생생하고 현대적인 감각으로 ??여줄 것인가가, 실사 영화에 있어서는 제한된 시간 내에 기생수의 핵심적 메시지를 얼마나 잘 요약하여 사실적이고 참신한 그래픽 효과와 함께 제시해 줄 것인가가 각각 감상 포인트가 될 것이다.

독자의 취향에 따라서는 그리 화려하지 않은 그림체와 다소 간결하고 싱거울 수 있는 결투 장면에 아쉬움을 느낄 수도 있으나, 너무 많은 것을 한 컷에 담아 독자에게 힘겨운 관찰을 강요하는 최근의 모험/결투 만화에서 지루하게 반복되고, 많은 지면을 차지하는 과장된 결투 장면에 지친 독자라면 단순하고 명료함이 돋보이는 기생수의 그림체가 오히려 환영할 일이 아닌가 한다.

언뜻 다소 무거운 주제로 독자의 심기만을 불편하게 할 것으로 오해할 수 있겠으나, 곳곳에 배치된 반전의 기발함과 작가 특유의 가벼운 유머들은 만화 본연의 재미 역시 그 어느 작품에 뒤지지 않도록 해주며, 절박한 가운데 꽃피우는 사토미와의 풋풋한 사랑은 인간이라는 종의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최고의 가치를 온전히 드러낸다.  

d96918743535bc36318bb248b382a987.jpg
마지막으로 만화사상 가장 그로테스크하면서도 그 누구보다 멋지고 사랑스러운 오른쪽이를 만나는 즐거움은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이 될 것이다. 마음을 울리는 의미와 감동을 주는 이야기도 긴 세월이 흘러 결국 잊히기 마련이지만, 독자의 곁에 남아 평생 동안 좋은 친구가 되어주는 캐릭터를 선물 받는 것은 훌륭한 만화의 독자들이 누릴 수 있는 무엇보다 소중한 행복일 것이다. 아직 오른쪽이를 선물로 받지 못한 독자들이라면 서둘러 기생수의 책장을 넘기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