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도라 코믹스 - 슈토헬
“문자라...그저 모양에 지나지 않는 것을 어째서 좋아하는 게냐?” “형. 문자는 살아있는 생명체 같아. 기록한 사람의 생각과 바람을 전달하고 그 사람이 죽은 후에도 이 문자는, 그들의 소망을 간직한 채 살아있는 생명체와 같은데...불태우다니...너무 가혹해.” ...
2014-03-20
김현우
“문자라...그저 모양에 지나지 않는 것을 어째서 좋아하는 게냐?” “형. 문자는 살아있는 생명체 같아. 기록한 사람의 생각과 바람을 전달하고 그 사람이 죽은 후에도 이 문자는, 그들의 소망을 간직한 채 살아있는 생명체와 같은데...불태우다니...너무 가혹해.” “이런 것 따위에 사람을 허비하니 만만하게 정복당하는 거다.” -1권 68~69p, 하라발과 유르르의 대화 中에서 발췌 인류 역사상 가장 광대한 대지를 정복했던 남자, 몽골제국의 시조 ‘칭기스 칸’, 그를 소재로 삼아 만든 만화나 소설, 드라마나 영화 등의 문화상품은 정말 많다. ‘칭기스 칸’이라는 인물의 삶 자체가 워낙 드라마틱하기도 하지만, 단순히 ‘정복자’라는 단어 하나만으로는 그가 인류 역사에 끼친 거대하고 다양한 영향을 이루 다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소개하는 일본만화 “슈토헬”은, ‘칭기스 칸’이 주인공은 아니지만, 그가 대륙의 정복자로서 두각을 나타내며 엄청난 기세로 주변 국가들을 복속시키던 ‘정벌의 시기’를 작품의 배경으로 삼아 스펙터클한 서사를 풀어내는 매우 흥미진진한 작품이다. “내 아들이 아냐....예전 대칸에게 저항했을 때 아내를 빼앗겼지. 항복한 이후 그녀는 되돌아왔고, 다음 해 뱃속의 아이를 낳다 죽었네. 그 아이가 유르르다.” -1권 74~75p, 쵸그 족장의 대사 中에서 발췌 “슈토헬”의 제 1화 ‘악령’은 특이하게도, 몽고와 서하의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지던 1209년의 전장에서 현대의 일본으로 시간을 건너뛴다. 이런 식의 구성은 “슈토헬”이 “정통 대하 사극”이 아님을 도입부부터 명확하게 보여주는 작가의 의도된 연출이라 할 수 있다. 화려한 컬러 페이지로 채색된 1209년의 전장의 모습을 현대의 일본에 사는 고교생 스도가 리얼한 꿈으로 경험하며 시작된 제 1화는, 전생(轉生)이라는 판타지적 요소를 도입해 이 작품이 결코 평범한 역사극이 아님을 작가가 독자에게 미리 고지하고 있다. 너무나 리얼한 꿈을 꾸다 잠에서 깨어난 스도는 친구들이 불러서 나간 노래방에서 매우 신비한 눈빛을 가진 여학생 스즈키를 만나게 되고, 스즈키는 생전 처음 만난 스도를 따라 스스럼없이 그의 숙소로 따라 온다. 스즈키는 스도의 숙소에서 스도가 만들었다는 고대의 악기를 보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어떻게, 왜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정신 차리고 보니 만들어져 있었다.’고 스도가 말한, 현(絃)도 달리지 않은 고대의 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난생 처음 겪는 생경한 경험에 스도가 놀란 것도 잠시, 현도 없는 악기에서 애절한 음이 흘러나오는 신기한 일이 벌어지면서 스도는 갑자기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 스도가 다시 깨어난 곳은 1209년의 전장, 스도의 영혼은 몽고군에 의해 발가벗겨져 목이 매달린, 교수형에 처해진 한 여자의 몸을 빌려 깨어난다. 거센 폭풍우 한가운데서 깨어난 스도는 남자였던 자신이 여자로 변한 사실에도 놀랐지만, 다시 살아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소년 유르르를 보고 더 깜짝 놀란다. 유르르의 모습이 스즈키의 모습과 너무나 닮았기 때문이었다. 800년의 시간을 거슬러 다시 만난 그들은 각자의 성별이 뒤바뀐 채 거센 폭풍우 한 가운데에 서 있었고, 숨을 돌릴 틈도 없이 ‘슈토헬’이 되살아났다며 놀라서 무기를 들고 몰려오는 몽고군들과 대치하게 된다.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스도의 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무의식적으로 움직여 몽고군의 숨통을 능숙하고 잔인하게 끊어버리고, 유르르는 스도의 활약으로 포위망에 틈이 생기자 얼른 그의 손을 잡아끌어 안전한 곳으로 피신한다. 몽고군의 추격을 피해 몸을 숨긴 천막에서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짐작조차 못하고 얼떨떨해 있는 스도에게, 유르르는 ‘자...긴 이야기를 들려줄게’라며 입을 열어 둘 사이에 얽힌 복잡한 인연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것이 “슈토헬”의 제 1화 ‘악령’의 줄거리다. “대칸은 서하를 증오하고 있어. 흥경은 서하의 수도다. 마을도 왕궁도 불태워질 거다. 유르르, 네가 사랑하는 책도, 경전도, 서하인이 만든 문자로 기록된 것은 모두 불타 사라질 것이다. 서하라는 나라가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그 자체까지 불태우고 싶은 거다, 대칸은...” -1권 182~183p, 하라발의 대사 中에서 발췌 책을 읽는 사람들이 뭐가 뭔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뜬금없는 1화를 시작한 “슈토헬”은 2화부터는 1209년 대륙의 전장을 무대로 삼아 작품의 장대한 서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서하의 연약한 일개 병사 중 하나였던 여자 ‘위소’가 몽고군에게 ‘슈토헬(=악령, 惡靈)’이라 불릴 정도로 강인한 여전사(女戰士)로 변모하게 된 신비하고 드라마틱한 사연, 쵸그 족장의 둘째 아들 신분이지만 사실은 칭기스칸의 자식인 남자 주인공 유르르가 어머니 나라(서하)의 문자를 지키기 위해 일족을 배신하고 몽고군의 추격을 피해 송나라로의 긴 여정을 시작하게 된 사연, 동생을 깊이 사랑하고 아끼지만 일족의 미래를 위해 대칸의 명령을 받아 슈토헬과 유르르를 쫓는 쵸그족 최강의 전사이자 족장의 첫째 아들 하라발의 사연 등등, 드라마틱한 사연을 가진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다양하게 등장해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복잡하게 엮이며 ‘대하 사극의 묘미’를 보여주는 웅장한 스토리를 펼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