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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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상륙 작전 (아비규환)

“나는 친일이고 자시고 없소이다. 나는 생존당이요. 살아 있기만 하면 된다고!” - 1권 127p, 김상호의 대사 中에서 ‘한국형 스릴러’의 새로운 이정표를 쓰면서 영화로도 제작되어 큰 성공을 거둔 “이끼”에 이어 직장인들의 삶과 애환을 현실적으로 그려내면서 ...

2014-03-18 안경엽
“나는 친일이고 자시고 없소이다. 나는 생존당이요. 살아 있기만 하면 된다고!” - 1권 127p, 김상호의 대사 中에서 ‘한국형 스릴러’의 새로운 이정표를 쓰면서 영화로도 제작되어 큰 성공을 거둔 “이끼”에 이어 직장인들의 삶과 애환을 현실적으로 그려내면서 ‘누적 조회수 10억’이라는 신기록을 세운 “미생”까지, 지금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핫(hot)’한 만화가는 아마 ‘윤태호’일 것이다. 윤태호의 신작이 나왔다. 제목은 “인천상륙작전”, 2013년 3월부터 한겨레신문에 연재를 시작하여, 현재는 포털 네이트에서 웹툰으로도 볼 수 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양쪽 모두에서 논쟁을 일으키고 있는 윤태호의 이 뜨거운 신작은, 1945년 8월 15일, 35년간의 일제강점기가 끝나던 민족해방의 날, 서울의 혼란스러운 풍경에서부터 그 장대한 서사를 시작한다. “세상만 바뀌었지...사람은 그대로 아니냐고!” -1권 31~32p, 상배의 대사 中에서 한 줄로는 설명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 혼란과 처절함으로 점철된 대한민국의 현대사에 윤태호 특유의 세밀한 시선을 덧대어 만들어낸 이 작품은, 생존이라는 절대명제를 위해 몸뚱아리 하나만으로 혼돈의 역사를 꿋꿋이 버티어냈던, ‘그 시대를 살았던 민초들의 삶’을 섬세하고 리얼하게 다루고 있다. 현재(2013. 12.) 단행본으로 2권까지 출간되어있는 이 작품은, 1993년 데뷔 이후 20년의 세월동안 세상 속에서 단련된 ‘만화가 윤태호’의 내공이 제대로 느껴지는 역작(力作)이라 할 만하다. “자네가 내 요짐보(경호원)일세. 내 명에만 죽게 해준다면 아까 본 금덩이의 상당분은 자네에게 갈 것이야.” -1권 41p, 김상호의 대사 中에서 윤태호는 “인천상륙작전”의 연재를 시작하면서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 “왜 다시 6.25.인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한국전쟁과 분단 상황은 지금의 우리가 감당하고 있는 부조리의 시작이고 우리를 옥죄는 실체이기 때문이다.”라고. 윤태호의 이런 대답은, 현재 대한민국의 분열된 정치 상황과 혼란스러운 사회상 안에서 ‘논란의 여지가 아주 많을 이 작품’을 ‘굳이 이 시점에 연재’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 즉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의 중심을 과연 어디에 둘 것인가?’에 대한 작가로서의 아주 적확한 답변이 될 것이다. “하 ~ 이거 복잡하다. 복잡해. 해방이 되니 세상이 더 오리무중으로 빠져버렸다.” “언놈한테 줄을 댈지 아직 못 정했수?” -1권 94p, 김상호와 상배의 대화 中에서 해방 이후의 한국 현대사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현재의 한국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입장은 명확하게 ‘분열’된다. 역사란 것의 본질이 ‘해석의 학문’이라는 것을 충분히 고려하더라도, 한국처럼 현대사를 해석하는 관점에 따라 본인들의 삶의 태도나 가치관이 극단적으로 갈리는 나라는 아마 세계사적으로도 그 유래를 찾기 힘들 것이다. 갑작스러운 해방과 동족전쟁, 외세에 의한 분단과 급진적인 경제성장을 거치면서 매우 기형적인 상태로 굳어져버린 한국의 역사관은 아주 기묘한 형태의 ‘진영논리’를 만들어냈고, 그것은 총선이나 대선 같은 정치적으로 큰 변화의 시점이나 탐욕에 찌든 자본주의의 천박하고 잔인한 사회적 목적이 분명해질 때마다, 기득권 세력이 민초들에게 설파하는 ‘설득과 명분의 도구’이자 자본의 ‘이데올로기’로서 철저하게 활용되어 왔다. 본 작품의 시작이 되는 1945년 8월 15일부터 60년이 넘는 긴 세월이 흘러 어느덧 21세기로 세기가 바뀌었어도, 이렇듯 대한민국의 ‘현대사 논쟁’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고, 여전히 유효한 강력한 논쟁거리다. 이런 논란의 여지가 많은 주제를 굳이 작품의 소재로 택한 윤태호지만, 작품의 서사만큼은 아주 유려하고 세련되게 구사한다. ‘역사 속에서의 생존’이라는 이 작품의 주제를 돋보이게 하는 ‘매우 영리한 방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20년 경력의 탄탄한 관록이 확실히 느껴지는 이 작품의 드라마틱한 극적 전개는, 역사에 기록된 논란의 여지가 많은 중요 사건이나 민감한 사안들을 ‘작품의 배경’으로서만 작용하도록 확실하게 한정지으면서, 주인공을 비롯한 다양한 등장인물들의 치열한 삶 속으로 독자가 빠져들 수 있도록 집중하게 만들고, 공감하게 만든다. “머슴 취급하는 순간, 확 사회주의 해버릴라니까.” -1권 95p, 상배의 대사 中에서 “인천상륙작전”은 혼란의 시대에 맨몸으로 던져진 형제를 주인공으로 삼아 이야기를 전개해나간다. 형인 ‘상근’은 글도 읽고 쓸 줄 알고 고등교육도 받은, 지식인 계열로 분류될만한 사람이지만, 사업을 한번 말아먹고 나서는 아내와 자식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는, ‘생활력’없는 무능력한 가장이자 혼란의 시대에서 버티기 힘든 유약하고 선한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다. 동생인 ‘상배’는 일제강점기 때는 일본 순사의 정보원 노릇을 하면서 동족을 팔아먹은 대가로 호의호식했던 친일파의 앞잡이였으나 해방이 되자마자 재빨리 변절, 신분을 세탁하며 혼란스러운 정국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폭력’과 ‘정보’라는 자신만의 무기로 새로운 기득권 세력들과 결탁해나가는, 약삭빠르고 잔인한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다. 본 작품은, ‘혈연’외에는 공통점이 없는, 너무나도 상반된 마인드로 인해 서로 다른 길을 걷던 형제가, ‘생존’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할 틈이 없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갑작스럽게 내던져지면서, 때론 반목하고 때론 협조하며 ‘생명의 여로’를 악착스럽고 끈질기게 이어나가는 이야기다. 타고난 기회주의자로서 잔인하고 영악한 모습을 보여주는 상배나 착하고 바를지는 몰라도 매일매일 끼니 걱정이나 해야 하는 상근이나 ‘안쓰럽긴 매한가지’다. 하지만 ‘오직 살아남기 위해 행했던 그들의 처절한 고뇌와 노력’은 지금에 와서 보면 분명히 그 ‘의미와 결실’이 남아있다. 극중에서 상근의 아들로 나오는 철구가, 딱 우리 아버지의 나이일 것이고. 주인공인 상근이나 상배는, 딱 우리 할아버지의 나이일 것이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내가 가장 좋았던 점은 돌아가신 아버지나 할아버지, 할머니를 어느 순간 떠올리게 되었다는 점이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처절했던 그때, 그 혼란의 시대를, 그분들께서는 몸뚱아리 하나로 ‘어찌됐든’ 버텨내셨고, 그 덕분에 난 태어날 수 있었다. 그분들이 살아온 방식이 옳던 그르던 간에, ‘생존’을 위한 것이라면 모든 것이 정당화되었던 그 참혹했던 시대를, ‘무사히 잘 버텨내셨다’는 사실만으로도 피를 이은 후손으로서 무한한 존경심과 깊은 감사의 마음을 표하고 싶다. 그것이 현재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내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