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부터 9년이나 함께 지내다 보면, 이렇게 마음이 통하는 일도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뭐, 그만큼 편한 사이라는 뜻이겠지.” - 1권 7~8p, 아츠코의 독백 中에서 발췌 한국에선 다소 생소하지만, 자신만의 특별한 색깔과 향기를 가진 일본작가 와타나베 페코의 신작 “두 개의 알”이 정식 한국어판으로 출간되었다. 학산문화사의 프리미엄 브랜드 ‘시리얼’의 마크를 달고 현재(2014.01.) 한국어판으로 2권까지 출간되어 있는 이 작품은 ‘오래된 연인’이라는 아주 익숙한 소재에 “관계”에 대한 작가의 깊은 성찰이 덧붙여진, 매우 고급스러운 느낌을 주는 순정만화다. “응, 아이 말이야. 여자는 날 때부터 이미 난자의 기반이 될 세포를 난소에 갖춰두고, 몸이 성장하면서 그 일부가 난자가 되어 한 달에 하나씩 배란하잖아. 양수는 썩지 않지만, 우리의 알, 난자는 늙어가니까.” - 1권 25p, 나나코의 대사 中에서 발췌 와타나베 페코에 관해 국내에 알려진 정보는 사실 그리 많지 않다. 1977년 홋카이도 출생, 2004년 “투명소녀”로 ‘영 뉴 신인만화대상’ 골드 대상 수상, “투명소녀”가 만화잡지 ‘영 뉴 컬러즈’에 실리면서 정식 데뷔, 현재 한국에 정식 한국어판으로 소개된 작품은 “라운더바우트”(전 3권 완결)가 있다. “감이 좋은 편이 아니다. 그다지. 아니, 전혀. 그런데 어째서 지금 이런 생각이 떠올랐을까? 그리고 왜 굳이 묻고 말았을까.” -1권 38~39p 이와키의 독백 中에서 발췌 내가 여기에 소개하는 “두 개의 알”을 구매하게 된 건, 순전히 와타나베 페코의 전작 “라운더바우트”를 무척이나 재미있고 인상 깊게 읽었기 때문이다. 사춘기를 맞이한 중학생 소녀들의 복잡한 심리와 다양한 고민들을, 리얼하고 유쾌하게 표현된 학교생활과 엮어서, 정말 독특하고 신선하게 펼쳐낸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총 세 권밖에 안 되는 “라운더바우트”를 다 읽고서 내 머리 속에 떠올랐던 첫 번째 생각은 ‘주목할 만한 작가가 또 한 명 생겼구나.’ 하는 것이었고, ‘이 작가의 다른 작품들이 출간되면 꼭 읽어봐야지’ 하는 다짐을 했을 정도로 무척이나 인상 깊은 작품이었다. “타카노 씨. 그거 제 아이입니까?” -1권 40~41p, 이외키의 대사 中에서 발췌 일본어로 ‘니코 타마’, 한국어로 번역해서 “두 개의 알”, 와타나베 페코의 작품 중 두 번째로 한국에 소개된 이 작품은, 일본에서는 이미 총 5권으로 완결되었다고 한다. 이 작품은 소재나 내용, 캐릭터 등을 볼 때, 어린이들이나 청소년들이 볼 만한 내용이 절대 아니다. 작품이 야하다거나 표현수위가 높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담겨 있는 내용 자체가 “어른을 대상으로 한 이야기”라는 뜻이다. 적어도 이십대 후반 이상, 사회생활 경험이 3~4년 이상 된 성인들이 읽어야 작품의 스토리를 이해하고 등장인물들의 삶이나 생각에 공감할 수 있을 만한, “어른들을 위한, 어른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인 것이다. “사쿠라, 내가 경험과 견문을 통해 도달한, 한없이 진실에 가까운 법칙을 들려줄까? 여성이 이별을 원하거나 무언가를 거부하는 장면에서 설명을 생략하는 진짜 이유는, 대부분 ‘짜증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도 좋아...안됐지만 그런 셈이지. 뭔가가 거슬렸던 거야, 그녀는.” - 1권 54~55p, 오토모의 대사 中에서 발췌 작품의 주인공인 아츠코와 이와키는 스무 살 때부터 9년 동안 사귀었고 동거를 한지도 5년이 넘어가는 ‘서로에게 아주 익숙한 오래된 연인’이다. 아츠코는 대형 언론사인 마이아사 신문에서 기자로 일하다가 적성이 맞지 않음을 느끼고 퇴사, 고등학교 동창이 하는 도시락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하고 있는 독특한 느낌의 여성이고, 이와키는 겉모습이나 태도는 무뚝뚝하고 애교가 없어 보이지만 실상 속내는 매우 성실하고 자상한 변리사다. 이와키와 아츠코 커플은, 오랫동안 사귀기도 했지만, 서로가 상대를 필요로 하는, 죽이 매우 잘 맞는 커플이라는 걸 둘 다 모두 잘 알고 있고, 실제 생활에서도 그렇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둘은 서로를 깊이 사랑하고 있다. 결혼식을 안 올렸고 둘 사이에 아이만 없다 뿐이지 실상은 부부나 마찬가지였던 이 커플에게 어느 날 갑자기 전혀 예상치 못했던 심각한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데, 그 심각한 사건이란, 이와키와 같은 직장에 근무하는 여자선배 타카노가 임신을 하게 되었고, 그 아이가 이와키의 아이임이 밝혀진 것이다. 매우 어려운 업무를 성공적으로 끝낸 이와키와 타카노는 기분 좋게 술을 마셨고, 많이 취한 상태에서 둘은 ‘원나잇 스탠드’를 가졌다. 그리고 그 결과 임신, 타카노는 직장을 그만두면서까지 아이를 낳겠다고 선언하고, 이와키는 큰 충격을 받아 혼란스러운 상태에 빠진다. “저, 이와키. 결론부터 말할게. 나 임신했어. 이와키의 아이야. 그리고 낳기로 했어. 그래서 말인데, 나 혼자 낳아서 책임지고 기를 테니까, 이와키는 이 일에 일절 관여하지 않아도 좋아. 내 얘기는 일단 여기까지. 혹시 질문이 있거나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 봐.” 1권 70~74p, 타카노의 대사 中에서 발췌 이 작품이 재미있어지는 지점은 매우 유능한 커리어 우먼이지만 감정이나 표정의 변화가 거의 없는, 차가운 느낌의 여성 타카노가 등장하면서부터인데, 작가는 주인공 커플만큼은 아니어도 타카노라는 캐릭터에 대해 꽤 많은 비중을 두어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아이의 아빠는 이와키이지만, “이 아이는 나 혼자 낳아서 키울 테니 넌 관여하지 마라.”고 이와키에게 딱 잘라 선언하는 타카노의 존재가 명확하게 부각되면서부터, 이와키와 아츠코의 평온했던 삶에도 서서히 균열이 시작된다. 이 작품의 진정한 재미는, “인생이란 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순간을 맞이하게 된” 각각의 등장인물들에게, 마치 현미경을 대듯이 세밀하고 섬세하게, 그들의 불안정한 심리상태를 이야기 속에 잘 녹여낸 것이다. “두 개의 알”은,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닥쳐오는 결정의 순간, 그 순간에 과연 어떤 선택이 가장 의미 있고 유효한 것일까? 라는, 읽는 이에게 매우 진지한 물음을 던지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