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일분의 일
“공부든 뭐든, 일정 수준까지 올라가는 건 간단하다. 그저 꾸준히, 시간을 들여 노력하면 되니까. 하지만 그 수준을 넘어서...정말로 높은 수준에 도달하는 건, 신에게 선택받은 인간뿐이다....중학생으로 국가대표에, 아메리카 리그 이적까지 결정된, 와카미야 시키.....
2014-02-28
김현수
“공부든 뭐든, 일정 수준까지 올라가는 건 간단하다. 그저 꾸준히, 시간을 들여 노력하면 되니까. 하지만 그 수준을 넘어서...정말로 높은 수준에 도달하는 건, 신에게 선택받은 인간뿐이다....중학생으로 국가대표에, 아메리카 리그 이적까지 결정된, 와카미야 시키...라. 바로 이런 녀석을 두고, 신에게 선택받은 천재라고 하겠지.” -1권 5~8p, 소라의 대사 中에서 발췌 현실과 비현실(또는 초현실)을 하나의 이야기로 결합함에 있어 가장 적합한 문화콘텐츠 장르가 아마 만화일 것이다. 2000년대 들어서 특수효과 기술이 나날이 발전하면서, 2차원의 지면에서만 존재하던 그래픽 노블의 히어로나 만화의 주인공들이 극장의 스크린이나 TV의 브라운관에서 3차원의 실사 캐릭터로 구현될 수 있었던 것처럼, 기술의 발전이 문화콘텐츠 업계에 끼치는 영향은 실로 엄청나지만, 기술이 발달하기 훨씬 이전부터 그 모든 것의 원점에는 책상 앞에 홀로 앉아 종이 위에 낙서처럼 끄적거리면서 자신만의 상상력을 제한 없이 펼쳐내는 작가들의 ‘스토리’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 ‘스토리’가 ‘비현실적일수록’, 그 ‘스토리’를 실제로 구체화시키는데 있어서 가장 적합했던 표현방식이자 한편으로 매우 뛰어난 대중적인 상업성을 갖춘 것이, 바로 글과 그림이 결합된 만화라는 예술장르였을 것이다. 작품 소개와는 다소 동떨어진 너무나 장황한 서두가 되었지만, 여기에 소개하는 일본만화 “십일 분의 일”은, 위에서 얘기한 현실과 비현실(또는 초현실)을 아주 적절하게 결합해 읽는 이에게 잔잔한 감동과 아기자기한 재미를 주는 ‘웰메이드 만화’로, ‘콘텐츠 산업의 원점’으로서 존재하는 만화라는 장르의 장점을 여실히 증명한 모범적인 사례라 하겠다. “왜지? 이 녀석은 왜, 페인트에 전혀 반응이 없는 거지? 어째서...그렇구나....내가, 동료에게 패스하지 않으리란 걸 알기 때문이야...드리블로 상대를 돌파해 골을 넣는다. 여태까지 그런 축구만 해왔으니, 동료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 페인트를 위한 페인트. 이래선...아까 1대 1과 다를 게 없어....난, 팀에 있으면서...혼자 축구를 했던 거야...축구는 혼자 하는 게 아닌데.” -1권 37~39p, 소라의 대사 中에서 발췌 이 작품에서 가장 주요한 소재는 “축구”다. 작품의 주인공인 남학생 ‘안도 소라’는 ‘프로 축구선수’를 꿈꾸는 남학생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축구라는 종목을 소재로 한 ‘스포츠 만화’인가 하면, 절대로 그건 아니다. 이 작품은 장르를 특정하기가 힘들 정도로 여러 가지 요소가 뒤섞여 있는 만화로, 굳이 구분하자면 “청춘 성장 스토리”라고 할 수 있을까? “십일 분의 일”이라는 작품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프로 축구선수를 꿈꾸는 주인공 소라가 ‘성장하면서 만나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옴니버스 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매 화마다 주인공이 바뀐다. (안도 소라는 매 화마다 항상 등장하며 중심을 잡아주는 조연으로 활동하기 때문에 전체적인 작품의 주인공으로 보는 것이 맞다. 즉 전체적인 주인공이 안도 소라이며 에피소드 별로 각각 주인공이 따로 있는 형식이라고 보면 된다) 1권 말미에 수록된 작가의 말을 읽어보면, 이 작품은 만화잡지로서는 매우 특이하게도 분기별로 발행이 되는 계간지에 실리는 만화라고 한다. 이 작품의 이런 독특한 특징은 어쩌면 연재매체의 특성에서 기인한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난 호 스토리를 잊어버리는 분이 봐도 괜찮도록 각각의 이야기를 하나의 독립된 단편으로 읽을 수 있도록 하면서도 전체를 하나의 이야기로도 읽을 수 있도록 만들 계획을 갖고 있는, 조금은 특이한 연작 만화입니다.”라는 작가의 멘트는 이 작품에 대한 매우 적절한 설명으로 보인다. “어쨌든, 이런 식으로 기회를 만들 수 있단 말이지...그동안 난, 에이스인 내가 막히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동료에게 의지하는 건, 도망치는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닐지도 몰라. 꼭 나 혼자만의 힘으로, 골을 넣어야 하는 건 아닐지도 몰라. ‘축구는, 혼자 하는 게 아니야.’ 시키,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이제 좀 알 것 같다.” -1권 41~43p, 소라의 대사 中에서 발췌 “십일 분의 일”은 옴니버스 식 구성이라는 특징 말고도, 스토리에 있어서도 상당히 독특한 특징을 갖고 있다. 1권 제 1화의 스토리를 살펴보면, 에피소드의 제목이기도 한 ‘와카미야 시키’는 소라가 꿈을 잃고 좌절해있을 때 ‘갑작스럽게’ 소라의 앞에 나타난 유명한 축구 선수다. 와카미야 시키는 작은 체구의 여중생이지만 타고난 센스와 부단한 노력으로 국가대표에 뽑힌 ‘천재 선수’이자 ‘스타’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평범한 중학생 소라의 앞에 갑자기 나타난 것도 극히 부자연스럽지만, 엄청나게 수줍어하는 태도로 부끄러워하면서, 이것저것 말을 건다는 것 자체가, 소라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한마디로 ‘이해가 안가는 일’인 것이다. “십일 분의 일”은, ‘축구’를 소재삼아 주인공인 소라가 만나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이야기를 옴니버스 식으로 담고 있다. 오랜만에 가슴이 따뜻해지는, 훈훈한 감동과 재미가 함께 있는, ‘수작(秀作)’을 만난 것 같다. 강력하게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