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들의 전설
“지금으로부터 7만 년 전, 지구는 긴 겨울을 맞이하려했다. 이것이 빙하시대 마지막인 여섯 번째 빙기(氷期), 소위 ‘뷔름 빙기’였다. 이때 북반구 육지의 3분의 1은 얼음에 뒤덮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원시인류에게는 추운 수난의 시대가 수만 년 동안 이어졌던 것이다.”...
2014-02-25
김현수
“지금으로부터 7만 년 전, 지구는 긴 겨울을 맞이하려했다. 이것이 빙하시대 마지막인 여섯 번째 빙기(氷期), 소위 ‘뷔름 빙기’였다. 이때 북반구 육지의 3분의 1은 얼음에 뒤덮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원시인류에게는 추운 수난의 시대가 수만 년 동안 이어졌던 것이다.” -7p, ‘불타는 제 5행성’ 中에서 발췌 “2001 SPACE FANTASIA”, “MOON LOST”, “멸망한 짐승들의 바다”, “스타더스트 메모리즈” 등등...SF장르에서 거의 신(神)급의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는 일본만화가 호시노 유키노부의 단편집 한 권이 정식 한국어판으로 발간되었다. 제목은 “거인들의 전설”, ‘목성(木星)’과 ‘빙하기’ 그리고 ‘거인(巨人)’을 모티브로 엮어 만들어진 작가의 초기 단편집이다. “기원전 6만 년 전, 당시 원시인류와는 다른 인류가 지구상에 존재했다. 신장 5미터에 이르는 거인족 타이탄. 그러나 고도의 문명을 만들어냈던 그들에게도 제 6빙기의 발소리는 다가오고 있었다.” -10p, ‘불타는 제 5행성’ 中에서 발췌 출판사의 책 소개에 따르면, “거인들의 전설”은 호시노 유키노부가 1977년에 그려낸 단편이라고 한다. 호시노 유키노부가 1954년 홋카이도 태생으로 1975년 “강철의 퀸”이란 작품을 통해 만화가로 데뷔했으니, 이 작품은 정말 호시노 유키노부의 초기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호시노 유키노부의 히트작들을 읽어본 분들이라면 이 단편들이 작화의 밀도나 설정의 치밀함에 있어서 기존의 작품들에 비해 많이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으나, 70년대에 그린 작품이란 것을 반드시 염두에 두고 읽어보시기 바란다. (데뷔한지 2년밖에 안된 신인만화가 호시노 유키노부가 얼마나 뛰어난 SF적 재능과 만화가로서의 천재성을 지녔는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거인들의 전설」은 사실 호시노 유키노부가 1977년에 그려낸 SF단편입니다. 이후 몇 군데의 출판사를 거치면서 여러 차례 복간되다가 최근(2011) 일본의 유명 출판사 쇼가쿠칸(小學館)에서 호화판으로 다시 나왔지요. 쇼가쿠칸은 최신작「별의 계승자」를 출간하면서 호시노 유키노부의 전작들에 대한 판권을 모아 복간하기 시작했는데,「거인들의 전설」도 그 케이스인 셈입니다.” - 애니북스, 책 소개에서 발췌 300페이지에 달하는 이 두꺼운 책은, 표제작인 “거인들의 전설”(제 1부 ‘불타는 제 5행성’, 제 2부 ‘거인으로 가는 길’로 이루어져있다), “태양행성 이카로스”, “호라이즌 패트롤”이라는 세 개의 단편으로 구성된 작품집이다. 1,2부로 나뉜 표제작 “거인들의 전설”과 “태양행성 이카로스”는 등장인물도, 스토리도, 설정도 다르지만 두 작품 모두 공통된 모티브로 연결되어 있는 단편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단편들에 적용된 공통된 모티브는 ‘빙기(氷期)’인데, 70년대에 나온 단편들임을 감안하면 설정이나 작화를 볼 때 호시노 유키노부가 도대체 얼마만큼 시대를 앞서간 것인지 실로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다. (“호라이즌 패트롤”은 다소 ‘부록’ 같은 느낌이 강하다) “여기서 타르타로스라 불리는 암흑점은 지구의 북극점을 말한다. 극점은 예로부터 몇 번이나 지표를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2억 수천만 년 전에는 북극점이 현재의 일본 열도 위치에 있었다. 극점이 움직이면 광대한 북극권 기후대 전체도 지구 표면을 이동한다...그것이 생물들 앞에 나타날 때 빙하시대가 시작되는 것이다. 방황하는 북극점에 입을 벌린 지옥의 구멍 타르타로스. 그 으스스한 블랙홀이 조만간 커다란 의미를 가지게 된다.” -25~26p, ‘불타는 제 5행성’ 中에서 발췌 첫 번째 단편이기도 한 표제작 “거인들의 전설”은 제 1부 “불타는 제 5행성”, 제 2부 “거인으로 가는 길”로 이루어져 있다. 제 1부인 “불타는 제 5행성”에서는 인류의 조상이라 부를만한, 기원전의 지구에 고도의 과학문명을 이룩한 거인족(타이탄)들이 여섯 번째 빙하기를 맞아 ‘지구 생명체’의 생존을 걸고 목성과 지구 사이에 태양의 일부를 가져다가 ‘불타는 제 5행성’을 인공적으로 만들어낸다는 이야기다. 거인들이 태양의 일부를 가져다 지구와 목성 사이 행성 간의 궤도에 올려놓는 수단은 정신에너지(또는 염력)를 증폭시키는 방법인데, 거인들의 염력을 폭발적으로 증폭시키는 구조물이 바로 세계 곳곳에 건설된 피라미드라는 설정이다. (1부에 해당되는 이야기인 탓에 다소 억지스럽고 무리한 설정이 뒤따르지만, 이것은 제 2부에 해당하는 “거인으로 가는 길”에 대한 자연스러운 사전 안배라고 할 수 있다.) 1부를 읽을 때 가장 많이 떠올랐던 것이 그리스 신화인 “프로메테우스”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2부에 해당하는 “거인으로 가는 길”로 넘어가면 이 단편 자체가 “프로메테우스” 신화를 모티브로 각색된 SF임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게 된다. 태양계의 제 5행성이자 영어로는 JUPITER, 즉 ‘뇌신(雷神) 제우스’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목성(木星)을 폭발시켜 1982년 지구에 닥쳐온 갑작스러운 빙하기를 막아낸다는 스토리를 가진 제 2부 “거인으로 가는 길”은, 중간에 작가 스스로 친절하게 설명도 해주지만, 제우스에게서 ‘불’을 훔쳐와 인간에게 주었다는 거인 프로메테우스의 신화를 스토리의 큰 뼈대로 삼고, 거기에 과학적 근거가 뒷받침된 아주 그럴듯한 SF적인 설정을 살처럼 덧붙여 매우 드라마틱한 만화적 전개를 이끌어낸다. (폭파부대를 싣고 목성으로 출발하는 항성간 우주선의 이름이 “프로메테우스”인 것이나 우주선의 모든 것을 제어하고 총괄하는 컴퓨터 시스템의 이름이 “판도라”인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설정의 아기자기함’일 것이다.^^) “소행성 이카로스. 발견된 것은 1949년. 태양 부근을 장타원형 궤도로 돌며, 19년마다 지구에 대접근한다.” -264p, “태양행성 이카로스” 中에서 발췌 두 번째 단편인 “태양행성 이카로스”는, 역시 그리스 신화인 “이카로스의 날개”에서 모티브를 따온 단편으로, 앞선 단편 “거인들의 전설”과 마찬가지로 갑작스럽게 지구에 닥친 ‘빙기’를 극복하기 위한 인류의 투쟁을 그리고 있다. 48페이지밖에 안 되는 짧은 단편이지만, 태양열 집열판을 단 유인위성을 이용해 지구로 열에너지를 보낸다는 설정이 매우 흥미로웠다. “거인들의 전설”은 SF의 거장 호시노 유키노부의 초기작을 맛볼 수 있는 매우 의미 있는 책이다. 신화와 전설, 과학기술에 관한 방대한 지식과 미래예측능력을 적절하게 뒤섞어 언제나 독자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작품을 만들어내는 호시노 유키노부, 그가 창조해낸 광대하고 치밀한 SF세계의 첫 발에 해당하는 단편집 “거인들의 전설”을 독자들에게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