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나이프
“크로노스의 피가 대지 가이아에 물들어 태어난 것이 복수의 여신 에리니에스. 에리니에스는 정의와 질서를 수호하며, 그것을 모독하는 자에 대한 복수와 처벌을 단행합니다. 박쥐처럼 검은 날개를 갖고 손에는 채찍을 들었으며, 범죄자를 집요하게 추적하죠. 제우스조차 그녀들을 ...
2013-11-25
김현우
“크로노스의 피가 대지 가이아에 물들어 태어난 것이 복수의 여신 에리니에스. 에리니에스는 정의와 질서를 수호하며, 그것을 모독하는 자에 대한 복수와 처벌을 단행합니다. 박쥐처럼 검은 날개를 갖고 손에는 채찍을 들었으며, 범죄자를 집요하게 추적하죠. 제우스조차 그녀들을 제어할 수 없었습니다.” “사형수042”라는 다섯 권짜리 짧은 작품으로 신선한 충격을 던져주었던 작가 코테가와 유아가 이번에도 묵직한 사회적 메시지를 전해주는 신작을 가지고 돌아왔다. 작품의 제목은 “너의 나이프”, 현재(2013.10) 한국어판으로 2권까지 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단 두 권만으로도 향후의 전개가 어떻게 펼쳐질지 너무나도 궁금해 미칠 정도로 흥미진진한 작품이다. “한 번 사람을 죽이는 데 500만 엔을 받을 수 있다면, 어쩌겠어?” “돈은 탐나지만, 사람은 못 죽여.” “그럼 죽이는 상대가, 살인자 같은 범죄자라면?” “그렇다면,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내가 필요한 돈은 500만 엔으론 턱도 없어.” 작품의 주인공 중 하나인 시키는 우리나라로 치면 기간제 교사로 현재 출산 휴가 중인 전임교사가 돌아올 때까지 임시로 학교에 근무하는 중이다. 시키는 바(bar)에서 처음 만난 아름다운 여인에게 “한 번에 500만 엔을 줄 테니 악당을 죽여주지 않겠느냐”라는 황당한 제안을 받고 고민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누나의 암 치료비 때문이다. 결국 어찌어찌 “청부 살인”에 가담하게 된 시키는 그 이후로 평범했던 일상이 산산조각 나며 마치 운명처럼, 새로운 인연들과 엮어가면서 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스펙터클한 인생이 시작된다. “임무 한 번에, 1인당 500만 엔. 보수는 후불이야. 대신 일은 확실하게 처리해 줘. 잘만 하면 다음 일거리도 줄게.” 시키와 함께 콤비로 움직이며 살인을 하는 멤버, 현직 형사이기도 한 쿠즈미는 이 작품의 또 하나의 주인공이다. 직장에서 동료들의 신뢰를 한 몸에 받는 유능한 형사이자 자신의 직업윤리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청부 살인’을 하면서도 심적으로 전혀 흔들림이 없는, 냉정 침착한 인물이다. 쿠즈미는 시키처럼 돈이 필요해서 ‘청부 살인’을 하는 것이 아니다. 현직 경찰이기도 한 쿠즈미가 “청부 살인”을 하는 구체적인 이유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경찰의 내부정보까지 빼내서 ‘살인’을 적극적으로 저지르는 걸 보면, 강력범죄에 대해 무언가 큰 트라우마가 있거나 상당히 심각한 개인적 사정이 있는 것으로 짐작될 뿐이다. 살인에 서투르고 실수를 연발하는 시키와는 달리 쿠즈미는 살인을 하는데 있어 일말의 두려움도, 주저함도 없이 매우 능숙하고 차분하게 임무를 완수한다. 그래서 “임무”에 있어서 주도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으며, 그런 쿠즈미 덕에 시키는 자연스럽게 보조적인 위치에 머물게 된다. “난 그저 연락책이야. 의뢰인은 말할 수 없고, 세상의 모든 악을 쓸어버리고 싶어 하는 어떤 인물이라고만 해둘게.” 시키와 쿠즈미의 첫 ‘임무’에서 상당히 독특한 능력을 가진 이채로운 여자 캐릭터 하나가 새롭게 끼어든다. 8살 때부터 집의 지하실에 갇혀서 10년 동안 TV만 보고 살았다는 의문의 소녀 이츠키다. 이츠키는 시키와 쿠즈미가 처음으로 죽인 식품수입회사 사장 야마시나 카즈오(54)의 딸로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나 집의 지하실에 갇혀서 10년을 살았다. 야마시나 카즈오를 죽일 때 저택 안에 ‘타깃’이외에는 아무도 없다고 알고 있던 시키와 쿠즈미는 느닷없이 나타난 이츠키를 발견하자 깜짝 놀랐고, 후환을 제거하기 위해 이츠키를 죽이려 했던 쿠즈미와 그를 말리는 시키에게 그녀가 ‘접촉’한 순간, 이츠키는 처음 만난 두 남자의 이름과 직업을 소리 내어 말하며 “이 곳에서 데리고 나가달라” 부탁한다. 이츠키가 말하기 전까지 직업은 물론 서로에 대해 이름 외엔 아무 것도 모르고 있던 시키와 쿠즈미는 무언가 범상치 않아 보이는 소녀, 이츠키를 죽이지 못하고 일단 시키의 집으로 데려온다. 이츠키는 “복수의 여신 에리니에스”를 좋아하는 미국 드라마 마니아로 8살 때부터 아버지에 의해 집의 지하실에 10년 동안 감금당해 있었고, 감금당한 이유는 일종의 영감(靈感)으로 자신과 접촉한 사람에 대해 정보를 알아채는 특수 능력 때문이었다고 한다. 시키와 쿠즈미가 아버지를 죽여준 덕에 드디어 생애 첫 ‘자유’를 얻은 이츠키는 순진한 얼굴로 자신도 동료로 받아달라며 시키와 쿠즈미를 조르고, 만약 자신을 동료로 받아주지 않겠다면 경찰에 가서 모든 것을 다 말하겠다고 당돌하게 협박까지 한다. 계획에 없던 이츠키의 등장으로 시키와 쿠즈미, 그리고 ‘임무’에 있어서 ‘운전’을 담당한 중국인 ‘양’은 일단 시키의 집에 이츠키를 감금하기로 결정하고, 이날부터 시키와 이츠키의 ‘특별한 동거’가 시작된다. “암을 없애는 게 목적이 아니라, 악화시키지 않으면서 공존하는 방법. 더 이상 암이 퍼지지 않는 상태를 유지하는 거지. 누나 몰래 의사에게 부탁해 시험해 봤더니 효과가 있었어. 해외에서 들여온 항암제를 쓰는 거지만. 그 약값이 한 달에 45만 엔 정도 들어. 요컨대 누나가 1년을 살려면, 500만 엔이 필요한 거지. 10년을 살려면 5천만 엔. 20년은 1억. 난 누나를 살리기 위해, 악당을 계속 죽여야 할까.” “너의 나이프”가 흥미진진한 건, 캐릭터의 독특함과 양질의 스토리도 큰 역할을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지금 현재 작품의 무대가 되는 일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큰 문제가 되고 있는, 법이나 공권력만으로는 근본적인 제어나 처벌이 불가능할 정도로 기업화 되고 양성화 되어버린 ‘현대사회의 악(惡)’을 ‘평범한 일개 시민’인 시키와 ‘사연이 있어 보이는 경찰’ 쿠즈미가 ‘불법적으로’ 처단하는 과정이 읽는 이에게 묘한 카타르시스를 주기 때문이다. 마치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같은, 극단적이고 위험한 논리일수 있지만, 수많은 사람들에게 큰 죄를 저지르고도 교묘하게 법망을 피해서 호의호식하는 뻔뻔한 범죄자들을 처단할 수 있는 방법은 어쩌면 이런 방법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씁쓸한 생각이 한편으론 들기도 한다. 이 작품이 재미있는 이유는, 법이 심판하지 못하는 악(惡)을 ‘청부 살인’이라는 불법적인 방식으로 처벌한다는 매우 비현실적인 소재를 아주 그럴듯한 구성과 스토리를 통해 현실감 넘치는 에피소드로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시키와 쿠즈미가 범죄자들을 처단하는 방식이 왠지 현실에서 있을법한,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를 일이라는 ‘리얼한 느낌’을 읽는 이에게 주기 때문에 이 작품이 ‘힘이 느껴지는 묵직한 작품’이 되는 것 같다. 강력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