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끼 (전4권)
일본 만화의 무차별 유입과 도서대여점의 등장, 불법 스캔본의 인터넷 살포 등 총체적인 위기에 직면한 한국 만화계는 거의 몰락할 상황에 처했다. 괴멸 직전의 한국 만화계에 만약 웹툰이라는 탈출구가 열리지 않았다면 지금쯤 어떻게 되어 있을까? 아마도 수많은 인재들이 더 나...
2013-11-15
페니웨이
일본 만화의 무차별 유입과 도서대여점의 등장, 불법 스캔본의 인터넷 살포 등 총체적인 위기에 직면한 한국 만화계는 거의 몰락할 상황에 처했다. 괴멸 직전의 한국 만화계에 만약 웹툰이라는 탈출구가 열리지 않았다면 지금쯤 어떻게 되어 있을까? 아마도 수많은 인재들이 더 나은 꿈을 쫓아 다른 나라로 터전을 옮기거나 아니면 밥벌이를 위해 재능을 버리고 다른일을 찾아야 하지 않았을까? 실제로도 그랬다. 어떤 만화가는 한국이 아니라 일본의 주간지에 연재를 시작했고 이를 한국의 출판사에서 역수입해야만하는 웃지못할 일들이 벌어졌다. 해마다 수많은 만화학도들이 대학 졸업 후 꿈을 포기하고 게임회사에 취직하는 건 굳이 숨기지 않아도 공공연한 사실이 되어버렸다. 천만 다행으로 웹툰이라는 새로운 생태계를 발견한건 암울한 한국 만화계의 한줄기 빛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일 웹툰이 없었더라면 강풀의 완벽한 플롯의 묘미나 메가쑈킹 고필헌의 염통이 쫄깃해지는 유머를 감상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수익의 배분과 같은 구조적 문제점을 뒤로 하고서라도 위기를 딛고 숨겨진 작가들의 끼를 발굴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웹툰의 힘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윤태호 작가의 [이끼] 또한 웹툰으로 인해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경우다. [야후]라는 작품을 통해 뒤늦게 진가를 드러낸 그는 출판 만화에서 웹툰으로 자리를 옮긴 뒤 [이끼]의 첫 연재를 시작한 만화 웹진 사이트 ""만끽""이 폐쇄되면서 작품이 그대로 잊혀질 뻔한 위기를 맞았으나 가까스로 다음의 ""만화 속 세상""에 연재가 재개되면서 그야말로 폭발적인 흡입력을 보여준 작품이다. 유독 연재 중단의 시련을 자주 겪었던 작가의 이력을 고려하면 [이끼]는 돌파구를 찾아 해메던 윤태호의 마지막 보루였을 것이다. 작품의 내용은 이렇다. 주인공 류해국은 성실한 회사원이지만 까다롭고 편집증적인 성격 때문에 사소한 사건을 계기로 직장과 아내로부터 버림받는다. 어느날 그는 부자의 연을 끊다시피한 아버지의 부고를 듣고 시골로 내려와 정착하려 하지만 자신을 둘러싼 마을사람들의 이상한 공기를 눈치채고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의혹을 품기 시작한다. 겉으로는 인자해 보이지만 속내를 알 수 없는 이장과 그의 추종자들, 그리고 마을에 감춰진 수상한 기운은 과연 무엇 때문일까? [이끼]는 한국 만화로서는 보기 드물게 본격 스릴러 장르를 표방하는 작품으로서 이미 ""미스테리 심리 썰렁물"" 시리즈로 이 분야의 독보적인 위치를 선점한 강풀의 작품에 버금가는 대단한 몰입도와 탄탄한 플롯을 가졌다. 마을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지배력을 행사하는 전직 형사 출신의 마을 이장과 모든 것을 잃은 주인공 류해국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심리묘사와 대결 구도는 심리전은 만화라는 매체에서는 보기 드문 서스펜스와 스릴을 제공한다. 연재될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끈 영화 [추적자]의 웹툰버전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서스펜스의 농도가 짙은 작품임과 동시에 대한민국 내부의 썩을대로 썩은 모든 부조리의 축소판이자 원죄를 지닌 마을에 감춰진 치부를 들추는 사회성이 짙은 작품이기도 하다. 게다가 [이끼]의 작화 수준 또한 수준급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마치 데이빗 핀처 감독의 영화 [세븐]을 연상시키듯 빛과 어둠의 대비를 절묘하게 조화시킨 작화의 사실적인 묘사는 다른 작품들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작가 특유의 관찰력과 완벽주의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일례로 비바람이 몰아치는 창밖의 침입자와 방안에 누워있는 주인공이 서로 다른 관점에서 상대방을 마주보는 창가 시퀀스는 한국 만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이다. 또한 얼핏 보기엔 평범한 자동차 주행 장면이지만 시간별로 명암처리를 달리한 영화적 연출은 가히 혀를 내두를 정도다. 윤태호라는 작가를 대중에게 각인시켜준 [이끼]는 2007년 대한민국 만화상 우수상에 이어 2008년에는 부천 만화상 일반만화상을 수상하며 작품의 완성도를 인정받았고, 2010년 강우석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어 전국 관객 338만명을 동원하기도 했다. 물론 영화의 완성도는 원작만화에 미치지 못했지만 윤태호의 스토리 텔링이 스크린에서도 충분히 통할 수 있다는 점을 입증한 계기가 되었다. 가장 어려웠던 시기를 버티며 만화가로서의 식지 않는 열정을 불태웠던 윤태호 작가는 [이끼] 이후 [미생]으로 드디어 국민 만화가 반열에 올라 이제는 포스트 허영만 시대를 짊어질 가장 강력한 후보가 되었다. 만화계에 몸담은지 20년이나 되었다는 윤태호 작가의 비상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이만한 작품을 내놓는 작가가 국내에 있다는 건 진정으로 자부심을 가질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