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초기화
글자확대
글자축소

탑 텐 Top 10

교회 촛불 향처럼 아름답게 생긴 한 청년이 살해당했다. 현장에 나타난 한 여형사는 사체 주변에 백묵으로 선을 긋는 일을 하면서도 죽은 청년의 잘생긴 얼굴이 내뿜는 아우라에 정신을 못 차린다. 역시나 이 청년. 알고 보니 사람이 아니라 신의 아들이다. 잘생긴 얼굴에 걸맞...

2013-11-12 이규원
교회 촛불 향처럼 아름답게 생긴 한 청년이 살해당했다. 현장에 나타난 한 여형사는 사체 주변에 백묵으로 선을 긋는 일을 하면서도 죽은 청년의 잘생긴 얼굴이 내뿜는 아우라에 정신을 못 차린다. 역시나 이 청년. 알고 보니 사람이 아니라 신의 아들이다. 잘생긴 얼굴에 걸맞게 나름대로 미의 신이라는 번듯한 호칭까지 갖고 있다. 이 친구의 이름은 발두르. 죽은 자는 죽은 자 나름대로 억울하겠지만, 난데없이 잘난 아들을 잃은 부모는 정신을 못 차린다. 아버지인 오딘신(진짜 신이다.)은 사랑하는 아들까지 죽었으니 이참에 세상을 멸망시켜버리겠다고 한바탕 난리를 친다. 옆에서 그 형인 토르도 술에 취해서 난동을 부린다. 영화 <토르>에 나오는 잘생긴 금발청년과는 180도 다른 고불고불 뒤엉킨 붉은 머리카락과 수염에 뚱뚱한 몸을 하고는 큰 망치를 휘두르며 경찰들을 으깨버리겠다고 난리다. 신이라기 보단 그냥 술취한 멧돼지다. 삶과 죽음을 초월하였다고 ‘신’이라고 불리는 이들이 죽음 앞에서 이런 난리니 네오폴리스 제10 관할서의 에이스 제프 스맥스도 뚜껑이 열려 호통을 친다. ‘어디 세상을 멸망시켜 보시지! 그 순간 당신들 둘 다 체포야!’ ‘어디서 술을 똥꾸멍으로 처마시고 와서 주정을 부려!’ 여기에 등장하는 북유럽 신들의 이야기는 스탠 리와 잭 커비가 펼쳐놓던 토르의 이야기와는 완전히 다르다. 수많은 신들이 엄청난 명분과 대의를 앞세우고 서로 끝없는 전쟁을 이어가는 신화. 그런 것은 이곳 네오폴리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폭발한 스맥스와 달리 악마 숭배자인 피콕은 ‘신들은 그냥 끝없는 부활의 상징’이라고 말하면서 가만 놔두면 되살아나니 괜히 들쑤셔서 서류일만 늘릴 필요가 없다‘고 침착하게 말한다. 스탠 리와 잭 커비가 장엄한 말투와 화려한 전투신으로 정성에 정성을 다해 만들었던 토르 이야기를 생각해보면 그래도 신들의 이야기인데 너무 푸대접하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이지만, 일곱빛깔 무지개 다리가 화려하게 빛나는 황금의 도시 아스가르드를 호령하던 신들의 이야기도 여기 네오폴리스 제10관할서의 경관들 앞에서는 그냥 오늘 하루 처리해야할 사건 하나에 불과하다. 프리츠 랑 감독의 영화 제목이며 동시에 슈퍼맨의 고향 도시이기도 한 ‘메트로폴리스’가 연상되는 이름을 가진 도시 ‘네오폴리스’는 높은 하늘 위부터 땅 아래까지 빼곡하게 들어찬 정말 복잡한 도시다. 흡사 온라인 게임의 대도시를 보는 것처럼 곳곳에는 전부 다른 화려한 코스튬을 입은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고, 여기저기선 그들이 나누는 별의별 대화들이 말풍선으로 스쳐 지나간다. 인물들의 의상은 1940~1950년대에 인기를 모았던 블랙테러와 파이팅 양크 같은 크라임 파이터들을 연상시키면서도, 거대한 도시의 건축물을 보면 스팀펑크의 시대와 최첨단 하이테크 SF가 공존한다. 여기서는 번쩍이는 코스튬을 입고 매일 호화로운 파티를 벌이며 살아가는 최상류층부터, 뒷골목에서 변태녀석들에게 입을 대주고 약값을 마련하는 가출소녀까지 누구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다 초능력을 갖고 있다. 그러니 이 도시에서는 사람뿐만이 아니라 숟가락 하나부터 자동차에 집에 사소한 소품 하나하나, 거대한 여객 터미널에 이르기까지 전부 다 슈퍼히어로 세계의 소품들과 장치들이다. 이 만화에서 디자인해낸 코스튬의 숫자만 해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지나가는 행인 1, 걸인 2, 경찰 3에 해당되는 인물들조차도 모조리 슈퍼히어로이며,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자동차마저도 일반적인 평범한 자동차가 아니라 배트맨의 배트카부터 시작해서 1950년대 디즈니에서 만든 영화 ‘해저 2만리’에 등장하는 노틸러스호를 닮은 차량까지 모조리 히어로들의 탈것들이다. 눈을 즐겁게 해주는 만화라는 매체가 이렇게 고맙게 느껴질 정도로, 이 만화 구석 구석엔 옥상에서 연주하고 있는 비틀즈의 모습이 나오기도 하고, DC 최대의 크로스오버 이벤트였던 무한 지구의 위기와 그 주인공이었던 ‘모니터’, 옛날 슈퍼맨이 고독의 요새에 사용하던 화살표 모양의 거대 열쇠, DC 최강의 호통 할매로 악명이 자자한 그래니 구드니스, 드래곤볼의 손오공과 어딘지 닮은 듯한 울버린, 데어데블, 심지어 앨런 무어의 왓치맨에 등장한 로어셰크와 나이트아울과 낙터 맨하탄까지 깨알처럼 등장한다. 감옥 안에서 쇠창살을 붙잡고 서 있는 로어셰크 모습을 보면 <왓치맨>의 명대사 ‘내가 너희들과 같이 갇힌 것이 아니다. 너희들이 나와 같이 갇힌 것이지’가 저절로 입에서 튀어나온다. 하지만 탈출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로어셰크는 ‘사람일 경우는 체포하고, 개일 경우는 처치한다’라고 했었는데, 여기 제10 관할서에서 범인들을 체포하고 처치하는 책임을 맡은 반장은 로봇 팔다리를 착용하고 다니는 개 캠로다. 네오 폴리스 여기저기에는 온갖 낙서들와 그래피티들로 가득한데, 그런것들 마저도 그냥 그려진 것들이 하나도 없다. 저스티스 리그, 어벤저스, 틴 타이탄, 엑스맨 등의 유명 히어로 팀과 그들의 슬로건, 혹은 영웅들의 명대사들이 그 그려진 상황상황에 적절하게 패러디되어 있다. 무작정 한 번 읽기보다는 최소한 두 번 이상은 읽어봐야 진짜 재미를 알 수 있는 만화라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심지어 인터넷 상에서는 이런 세세한 하나하나를 다 찾아내어 정리하는 만화팬들도 있다. 전반적으로 도시의 분위기는 우울하다. 그러나 앨런 무어의 또 다른 대표작인 <왓치맨>에서 그랬던 것 같은 우울함은 없다. 분명 네오폴리스는 초인들의 시대가 도래했건만 ‘낙원’이 되지 못한 세계다. 여기서 벌어지는 별의 별 기상천외한 사건들을 연이어 처리해야만 하는 제10관할서는 복잡함과 혼란함과 소란함에 우울할 새가 없다. 왓치맨이 ‘아 월세와 전세로 끝나는 인생이라니!’라는 한탄이었다면, 탑텐은 ‘인생 뭐있습니까. 전세 아니면 월세죠’ 하고 그냥 한 번 쓴웃음 짓고 넘어가는 기분이다. 마치 경찰서 책상에 조서 뭉치가 쌓이고 쌓이듯이 이 만화책은 페이지 하나하나 패널 하나하나마다 마치 정말 새로운 슈퍼히어로 세계를 만들기로 작심을 한 듯. 온갖 히어로들에 관한 소품들과 패러디들로 꽉꽉 채워 넣었다. 이 동네 사람들은 흔히 슈퍼히어로 세계에서 말하는 외계인의 침공에 맞서서 지구를 지켜내는 영웅적인 일은 하지 않는다. 가령 마블의 판타스틱 포에 등장하는 미스터 판타스틱과 수 스톰은 결혼한 사이인데, 이들 사이에 바다의 왕자 네이머가 끼어들어 수를 유혹하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런데, 탑 텐에는 미스터 판타스틱을 닮은 노인이 출연해 마누라가 바람날까 의심하는 의처증 남편역을 한다. 또 앞못보는 택시 드라이버는 천하의 도를 다 깨친듯한 선문답을 해대며 난폭운전으로 도시를 활보하는데, 이 택시는 수많은 사건 사고들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로 사건 여기 저기 틈이 날 때마다 나타나며 한 사건이 끝나도 새로운 사건 현장으로 가야만 하는 제10관할서의 긴박한 무한 사건 부활의 스토리를 탱탱하게 붙잡아준다. 두리뭉실하고 투실투실해서 어딜가도 좋은 사람이라고 호평을 받을 것 같은 한 선량한 가장은 뒷골목 매춘부를 만나는 일에 남몰래 빠졌다가 들켜서는 그만 자신의 가장도 파탄나고 인생도 절단난다. 제10 관할서 내의 동료들 사이에서도 사건이 없는 게 아니다. 바디 페인팅으로 옷을 입은 것처럼 치장하면서 실은 홀딱 벗고 다니던 한 여형사. 알고보니 그 상관인 개 반장이 색맹이었다는 것. 나는 개라서 여형사의 홀딱 벗은 몸에는 관심 없다고 말하던 개 반장은 어느날 부터 서서히 인간 여자랑 사랑에 빠지게 되고, 결국 종족을 뛰어넘는 결합이 성사된다. 정말 기상천외한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기상천외한 도시에서 살아가는 기상천외한 이야기들. 탐텐은 홈쇼핑 식으로 표현하자면 정말 ‘이렇게 꽉 찬 구성, 어딜 가도 만나실 수 없을 겁니다.’이다. 패널마다 온갖 잡다한 히어로 세계의 상식들이 채워졌다면, 각 캐릭터들의 개성을 살아숨쉬게 해 주는 저마다의 스토리는 겹겹이 쌓아지고 꼬리를 물어서 하나의 거대한 스토리를 이루며 거대한 음모의 비밀을 밝혀내게 된다. 이 책은 총 12이슈를 2권으로 묶었는데, 흔히 많은 팬들이 이 책을 그 당시 인기 미드였던 와 <힐스트리트 블루스>에 비유한다. 히어로들을 통한 경찰서 사람들 이야기라는 것인데, 그런 면에서 탑 텐은 경찰서 사람들 이야기를 다룬 TV 드라마를 만화적으로 잘 옮겼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책으로 묶여 나올 때는 1권이 6이슈 마지막의 클리프행어 대신에 7이슈까지 포함시켜서 한 챕터를 완결짓고 2권으로 넘어가는 식으로 만들어서 그 맛이 다소 덜한 점이 약간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