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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이 기사에는 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나, 그녀에게 간다.” 친구 동진으로부터 한 마디의 문자를 받아든 중혁도, 첫 화에서 캐릭터 소개를 하기도 전에 뜬금없는 대사를 받아든 독자들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친구 중혁에...

2013-11-08 이가온
 
이 기사에는 <마녀>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나, 그녀에게 간다.” 친구 동진으로부터 한 마디의 문자를 받아든 중혁도, 첫 화에서 캐릭터 소개를 하기도 전에 뜬금없는 대사를 받아든 독자들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친구 중혁에게 의문의 메시지를 보낸 동진은 그 날 이후 실종됐다. 그리고 <마녀>는 이런 문구와 함께 시작한다. ‘그녀를 사랑하면 모두 죽는다’고. 여주인공인 미정의 주변 남자들이 모두 죽어나가는 이유를 파헤치는, 그저 그런 미스터리 물이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마녀>는 강풀 작가의 신작이다. 도대체 무슨 말이냐고 묻겠지만 이건 중요하다. 강풀 작가의 작품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미스터리물인 줄 알았는데 절절한 멜로가 섞여있고, 추리물인 줄 알았는데 그 안에 드라마틱한 스토리가 녹아있다. 현재에서 시작해 과거로, 다시 현재로, 다시 과거로. 교차 편집 방식으로 전개한 <마녀>는 모든 장면이 복선이자 단서였고, 그것이 모여 극적인 순간을 연출했다.
 
<마녀>는 자신과 인연이 닿았던 주변의 모든 남자들이 죽거나 다치는 미정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에 아버지를 따라나섰던 밭에서 이름만 알던 또래의 꼬마 남자아이가 갑자기 다쳤다. 그 때는 이것이 자신의 탓인 줄 몰랐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미정이 갖고 놀던 고무줄을 끊고 도망친 남학생이 맨홀에 빠져 크게 다쳤다. 중학교 2학년 화이트데이 때는 미정에게 사탕을 주며 고백했던 남학생이 교통사고가 났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비오는 날 우산을 씌워주며 마음을 고백했던 남학생은 미정과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낙뢰에 맞아 죽었다. 죽고, 다치고, 다치고, 또 죽고. 다친 남학생들은 그 날부터 미정을 피하기 시작했고, 미정도 알 수 없는 죄책감에 스스로를 격리시키기 시작했다. “그날 나를 만나지만 않았어도, 그가 나를 부르지만 않았어도”라는 말을 되뇌이며 말이다.
 
초반 몇 화는 지겨울 만큼 남학생들의 사고를 반복해서 보여준다. 대사 몇 마디로 처리했어도 될 일을, 기어이 상세하게 설명한다. 죽은 남학생의 장례식 장면에서도 운동장 한 구석에서 흐느끼며 우는 미정의 모습을 반복해서 보여준다. 그것은 아마도 미정이 처음 학교생활을 시작한 순간부터 느꼈던 실체 없는 고통과 죄책감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실체 없는 소문은 그렇게 미정을 혼자로 만들었다. 소문은 단어가 바뀌든 무엇이 바뀌든 살아있다. 소문은 추측을 먹고 자라고, 잊혀진 줄 알았던 소문은 곰팡이처럼 퍼져나갔다. 미정은 결국 학교를 자퇴했고, 마을을 떠났다. 자신의 유일한 보호막이었던 아버지는 죽었고, 유일하게 남은 건 ‘아버지마저 죽인 마녀’라는 꼬리표뿐이었다.
 
<마녀>의 전반부가 미정에게 호감을 보였던 남자들이 죽거나 다치는 모습을 보여줬다면, 후반부는 미정을 사랑하기 위해 죽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한 남자(동진)의 고군부투기를 담아낸다. 미정의 주변 남자들이 자꾸만 다치는 이유처럼, 미정에 대한 동진의 감정도 불분명하다. 언제부터 시작된 사랑인지, 정말 사랑이라는 감정이 맞는지, 아니면 혼자가 된 미정에 대한 연민의 감정인지 알 수 없다. 분명한 건, 죽지 않고 미정을 사랑하기 위한 법칙을 발견하기 위해 온 몸을 던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정과 함께 학교를 다닌 학생들, 같은 마을에 살던 사람들은 ‘미정이 마녀인가 아닌가’에 집중했다. 하지만 동진에게 미정의 정체는 중요하지 않다. 동진의 관심사는 오로지 미정을 무사히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이다. 이것은 <마녀>를 계속 보게 만드는 힘이기도 하다. 단순히 동진이 ‘미정은 마녀인가, 아닌가’를 증명하려 했다면, 다른 사람들의 마녀사냥과 별다를 바 없었을 것이고 빤한 결말에 도달했을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동진도 미정이 마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통계학을 공부하고, ‘사망률에 대한 리포트’를 작성했다. 그 과정에서 미정을 향한 동진의 감정은 더욱 깊어졌고, ‘사망률에 대한 리포트’는 결과에 자료를 끼워 맞춘 오류투성이 리포트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더 이상 미정의 정체성이 자신에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동진은 미정 때문에 사고를 당했던 사람들을 모두 찾아가 10~20년 전의 기억을 끄집어내 사소한 단서라도 찾아낸다. 미스터리 물로 시작했던 <마녀>는 중반부에 이르러 한 남자의 절박한 러브스토리로 바뀐다. 동진의 옷장에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견디게 해주는 오토바이 헬멧과 프로텍트로 가득하다. 그렇게 몇 달 동안 자신을 희생해 얻은 법칙은 다음과 같다. 미정과 10m 안에 존재하면 위험하다. 10분 이상 같이 있으면 위험하다. 10마디 이상 대화하면 위험하다. 미정이 상대방의 이름을 알고 있으면 위험하다. 미정에게 사랑을 고백하면 위험하다. 이 모든 것을 어길 시 죽을 수 있다.
 
하지만 가설은 가설일 뿐이다. 이것이 진짜 법칙인지 증명하기 위해 동진은 스스로를 실험 대상으로 삼는다. 진짜 실험이 시작된 것이다. 미정과 10m 이상 떨어진 고시원에 방을 얻어 매일 밤 유리창을 통해 미정을 관찰한다. 단 10분이라도 같이 있기 위해 쓰레기통을 뒤져 미정이 평소 이용하는 마트를 알아낸다. 그 후 마트 배달원으로 위장해 일주일에 한 번씩 미정??? 대문 앞에서 장 본 물건들을 함께 소리 내 읽는다. 물론 10마디 이하로, 10분 이내에.
 
그러나 강풀 작가가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동진의 집념 혹은 근성이 아니라, 사랑이 무엇인가라는 고전적인 질문에 대한 답이다. 동진은 실험을 진행하던 중 예상치 못한 변수를 발견한다. 그것은 미정이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리 다섯 가지 법칙을 어겼더라도 사고를 면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아무리 다쳐도 미정 곁에 있으면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운명을 바꾸는 것은 틀에 박힌 법칙이 아니라, 미정을 향한 용기 그리고 진심이었던 것이다. 강풀 작가가 거대한 실험을 통해 입증하고 싶었던 것은 너무나도 당연해서 잊고 살았던 명제, ‘무슨 일이 있어도 사랑하는 사람 곁에 있어라’는 것이다.
 
마음먹은 대로 인생이 살아지면 좋겠지만, 그렇게 기계처럼 살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수많은 변수가 존재하고, 그 변수가 우리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지 빈곤하게 만들지는 알 수 없다. 단,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다면 어떤 변수가 오든 적어도 불행해지지는 않는다. 동진은 변수를 발견했고, 용감하게 그 변수에 맞섰고, 사랑하는 여자를 얻었다.
 
‘마녀사냥’의 고통을 파헤치고, 그 마녀를 마음껏 사랑하기 위한 한 남자의 절절한 러브스토리가 펼쳐진 그 이후. <마녀>는 구원에 대해 묻는다. 사람이 사람을 구원한다는 건 단순히 이성 간의 사랑 감정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동진은 또 하나의 마녀였던 중혁을 구원하기 위해 그의 주변까지 분석해 법칙을 확립한다. 미정처럼 다른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절대 열 마디 이상을 나누려 하지 않았던 중혁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 내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준 인물이 동진이었다. 동진은 미정과 중혁을 세상 밖으로 꺼내준 은인이자 구원자다.
 
결국 <마녀>는 그것이 우정이든 사랑이든, 상대방을 믿고 기다리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해낸다. 학창시절 미정과 단 한마디도 나누지 못했던 동진은 결국 미정을 ‘마녀사냥’으로부터 구원했고, 중혁이 외면해도 늘 그 자리에서 묵묵히 기다렸던 동진은 중혁까지도 세상 밖으로 끄집어냈다. 그래서 <마녀>는 기적이다. 사람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는, 말도 안 되는 기적을 실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