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아이 (MOON CHILD)
독특한 소재와 짜임새 있는 스토리텔링, 아름다운 그림체의 조화로운 삼박자 는 등의 작품으로 잘 알려진, 국내에서도 탄탄한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는 작가 시미즈 레이코의 작품이다. ‘달’이라는 추상적인 관념이 전체에 녹아나고 있는 이 작품은 안데르센의 동화 에...
2013-11-05
원은주
독특한 소재와 짜임새 있는 스토리텔링, 아름다운 그림체의 조화로운 삼박자 <달의 아이>는 <월광천녀> <비밀> 등의 작품으로 잘 알려진, 국내에서도 탄탄한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는 작가 시미즈 레이코의 작품이다. ‘달’이라는 추상적인 관념이 전체에 녹아나고 있는 이 작품은 안데르센의 동화 <인어공주>에서 그 모티프를 따와 인간을 사랑해서 물거품이 되었다는 인어공주의 슬픈 사랑을 넘어서 더 극적이며 복잡한 감정과 관계를 감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산란기의 인어들은 번식을 꿈꾸며 지구로 헤엄쳐온다 <달의 아이>에는 몇 가지 중요한 전제가 있는데 그 첫 번째는 바로 안데르센의 동화 <인어공주>가 단순한 동화가 아닌 사실에 기반을 둔 전설에 더 가깝다는 점이다. 즉, 정말로 세상에는 인어가 존재하며, 그 인어 중 인간을 사랑한 인어 “세일러”가 왕자의 사랑을 얻기 위해 동족인 인어들을 팔아넘겼으나 끝내 사랑을 이루지 못했다는 설정이다. 이와 같은 기본 전제 하에 작품은 좀 더 상상력의 폭을 넓혀간다. 단순히 동화 속 상상의 산물인 인어 공주의 이야기에서 ‘인어’라는 한 종족과 그 종족을 유지하고 번식시키는 규칙, 힘, 욕망을 덧입히고 그 위에 아름답고 슬프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몹시 잔인하고 이기적인 사랑의 양면성을 그려낸다. 그러한 전개를 위해서 작가는 산란기를 준비하는 인어들은 우주를 헤엄쳐 지구까지 와서 짝짓기를 통해 종족 번식을 한다는 설정을 부여한다. 또한 종족을 유지하고 번식시키는 힘, 욕망을 덧입히기 위해 한 가지 특별한 법칙을 부여하는데 그것은 “세일러”에게 세 아이가 있었고 그 세 아이 중 한 아이만이 번식 가능한 여성이 되어서 알을 낳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이 규칙은 단순한 듯하지만, 무척 잔인하고 큰 의미를 갖게 된다. 즉, 몇 명의 아이가 있든 단 한 아이만 ‘여성’이 되어서 자신의 자손을 낳을 수 있다는 것과 여성이 될 수 없는 다른 아이들은 여성이 될 수 있는 아이를 위해 무한 희생해야 하는 불합리한 굴레이다. 바로 이러한 굴레가 종족 살해를 할 수 없는 그들에게 ‘다른 사람의 몸을 빌려서라도’ 살인을 저지르고 싶은 욕망을 낳는 암묵적인 이유가 된다. 마지막은 이야기의 대 전제이기도 한 인어의 번식과 산란에 대한 아주 간단한 규칙이다. <달의 아이>는 인어에게 연어와 같은 습성을 부여한다. 그리하여 인어들은 산란기가 되면 짝짓기를 하고 알을 낳을 수 있는 곳, 고향땅인 지구로 돌아온다. 즉, 인어들은 어느 정도의 나이가 되면 지구를 떠나 우주로 나아간다. 그들은 우주를 유영하며 살아가다가 산란기에는 다시 우주를 헤엄쳐 지구로 돌아와 짝짓기를 통해 종족 번식을 한다. 이것은 닫힌, 좁은, 얽매인 제약을 뛰어넘어 아주 간단하게 작품에 이런저런 판타지적인 요소를 자연스럽게 녹여내는 하나의 방편이 된다. 덕분에 이야기는 동화와 지구라는 좁은 틀을 벗어나 훨씬 더 광범위하고 흥미로운 전개를 맞이한다. 이렇게 3가지 기본 설정 하에서 <달의 아이>는 달에서 살다가 산란기를 맞아 지구로 헤엄쳐 온 세일러의 세 아이가 지구에서 만나게 되는, 사랑, 사람, 고통, 행복, 그리고 절망과 희망의 이야기다. 벤자민, 세쯔, 그리고 틸리트 세일러의 세 아이 중 여성이 되어 알을 낳을 수 있는 건 바로 가장 어리고 철없고 자기본위의 ‘벤자민’이었다. 그녀는 알을 낳을 수 있는 몸이란 이유로 다른 두 아이와 그들 자매를 돌봐주던 이모의 지극한 보살핌을 받으며 어찌 보면 순수하고 달리 보면 아둔해서 착한, 민폐형 캐릭터로 자라난다. 벤자민은 기억을 잃었을 때나 잃기 전이나 한결같이 순진무구하고 철없고 모두가 보호해 줘야 할 캐릭터를 일관되게 보여주는데, 그러한 점은 ‘아트’를 만나 사랑을 알게 되고 또 그 사랑에 더없이 충실한 모습을 보일 때 더욱 짜증을 극대화시키기도 한다. 결국, 벤자민은 세일러도 이루지 못했던 ‘인간이 되는 인어’라는 전설을 완성하지만, 그녀가 인간이 된 것은 어디까지나 아트의 깊은 사랑 때문이었고 도리어 그 과정에서 벤자민 혹은 그녀의 아이 버전인 지미가 어떤 발전이나 희생의 모습도 보이지 않은 채 끝내 수동적인 여주인공의 모습으로 일관한 것은 못내 아쉽다. 벤자민의 이런 모습 때문에 <달의 아이>의 많은 독자들이 주인공인 벤자민보다 ‘세쯔’에게 응원과 사랑을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세 아이 중 하나인 세쯔는 선한 품성에 침착하고 상대를 배려할 줄 아는, 천상 아름다운 요조숙녀 그 자체지만, 안타깝게도 여성이 되어서 알을 낳을 수 없다. 세쯔가 여성이 될 수 있는 경우는 단 하나로, 벤자민이 죽었을 때만 가능하다. 누구보다 상냥하고 우아한 세쯔는 알을 낳을 수 없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벤자민을 성심껏 돌보고 안전하게 지켜서 지구에서 기다리고 있을 그녀의 상대에게 보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쯔는 선천적으로 몸이 약해서 벤자민을 위해 물고기를 잡을 수도 안전한 지구 생활을 위해 돈을 벌 수도 없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다른 자매인 틸리트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데, 알을 낳을 수 있는 벤자민과 달리 중성형인 자신이 틸리트의 짐이 되는 것을 늘 미안하게 생각한다. 세쯔는 탁하고 오염된 지구로 돌아와서 하루하루 약해지고 있다. 언젠가 여성이 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점점 더 약해져 죽어가는 세쯔는 훗날 틸리트로 하여금 무서운 계획을 세우게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틸리트. 세일러의 세 아이 중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가장 강한 아이 틸리트는 세쯔만을 위해 살고 있다. 자신이 여성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틸리트의 바람은 오직 하나, 세쯔가 여성이 되어서 알을 낳는 것이다. 그러나 벤자민이 살아있는 한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 틸리트는 언제나 벤자민이 싫었다. 세쯔와는 달리, 당연하다는 얼굴로 보살핌을 받는 벤자민, 세쯔와 달리 남에게 미안하거나 남을 생각할 줄 모르는 벤자민. 틸리트는 생각한다. 벤자민만 없으면 세쯔가 여성이 될 수 있어. 하지만 인어는 동족을 죽일 수 없다. 그럼 어떻게 할까? 내가 만일 사람이 된다면? 잠시라도 사람의 몸속에 들어가 사람을 조종할 수 있다면? 그럼 벤자민을 없앴을 수 있지 않을까? 결국 틸리트는 미국의 재벌 후계자 기르 오웬의 죽어가는 몸을 차지한다. 세일러의 세 자매는 이렇게 각각 다른 성격과 바람을 안고 우여곡절 끝에 뿔뿔이 흩어진 채 지구에서 각각의 이야기를 펼쳐간다. 사고를 당하며 인어의 기억을 잃은 벤자민은 꼬마의 모습을 한 채 자신을 구해준 ‘아트’라는 현대무용수를 만나 그와 함께 지내면서 사랑에 빠진다. 세쯔는 세일러의 약혼자였던 포토와의 후손이자 짝짓기를 위해 지구로 돌아온 쇼나를 만나 그를 짝사랑하게 되는데 이 가슴 아픈 짝사랑은 마지막 순간 쇼나의 진심을 알게 되며 안타까움을 더한다. 틸리트는 오직 세쯔가 여성이 되어서 쇼나의 알을 낳길 바라는 마음에서 무시무시한 계획을 실행에 옮기게 한다. 그것이 바로 체르노빌 원전사고로, 인어의 예지력으로 체르노빌의 원전폭발과 지구의 재앙을 읽은 벤자민, 쇼나, 세쯔 등은 이 일련의 사건을 조종하는 사람이 기르의 몸에 들어간 틸리트인 줄 모르고 어떻게든 사고를 막기 위해 노력한다. 꿈을 꾸는 듯 아름다운 그림체와 독특한 소재, 강렬한 심리 묘사. 시미즈 레이코는 보고 있노라면 빨려 들어갈 듯 환상적인 아름다움이 극대화된 그림체로 유명한 작가다. 선과 색이 뛰어나며 배경과 의상 등 모든 면에서 무엇 하나 디테일이 치밀하고 화려하지 않은 부분이 없다. 그런 놀랍도록 아름다운 그림에, 각각의 캐릭터마다 안고 있는 행동의 이유와 감정의 설명이 복잡하면서도 분명해서 특히 섬세하고 순정적인 심리묘사에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독특한 소재와 흥미진진한 이야기 전개는 작가가 가진 이야기를 풀어가는 스토리텔러로서의 뛰어난 재능을 보여준다. 다만, 몇몇 작품에서 결말을 두고 엇갈린 평이 나오기도 하는데, 적어도 그녀의 초기 작품 중 하나인 <달의 아이>만은 결말의 허무함 없이 상당히 흥미롭게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볼 수 있는 작품이다. 주연 뿐 아니라 조연들까지, 개성 뚜렷한 캐릭터들이 등장해 짜임새 있고 흥미롭게 풀어나가는 스토리로, 순정만화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한 번쯤은 꼭 읽어볼만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