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틴 디스토피아(High Teen Dystopia). 하일권 작가의 <방과 후 전쟁활동>의 장르에 대해 이렇게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하이틴 디스토피아는 최근 미국에서 유행하는 소설 장르 중 하나로 <스타터스>나 영화화된 <헝거게임>처럼 십대 소년 소녀 주인공이 암울한 디스토피아의 시대를 겪어내는 판타지 장르를 말한다. 무엇이 이러한 경향을 부추겼는지는 알기 어렵다. 10대와 60대 이상 노년층의 세대 갈등을 판타지로 풀어낸 <스타터스>의 이야기는 미국 내 세대 갈등에 대한 방증인지도 확실치 않다. 하지만 <방과 후 전쟁활동>의 십대들이 견뎌내야 하는 디스토피아는 미국 소설의 그것과는 달리 철저히 현실의 어떤 부분들을 반영하고 있다. 이 작품이 19금으로 분류될 정도의 잔인한 장면과는 또 별개로 진정한 잔혹극인 건 그래서다.
어느 날 미확인 구체가 외계에서 내려와 폭발하거나 촉수로 사람을 공격하며 세계는 아수라장이 된다. 군은 도심으로 접근하는 구체를 괴멸시켜 도시를 지키기 위해 모든 대학교와 고등학교를 예비군 대대로 편제한다. 비상 체제 속에서 군인이 된 고등학생들. <방과 후 전쟁활동>의 설정은 이처럼 불가항력적이고 불가해한 상황으로부터 출발한다. 구체들이 어디서 왜 왔는지는 모른다. 군과 학교 선생님들은 십대 학생이 군인으로 차출된다는 것에 대한 통보만 해줄 뿐, 그것이 어떤 당위를 갖는지 설명해주지 않는다. 앞서 미국의 하이틴 디스토피아 장르를 언급했지만 <방과 후 전쟁활동>의 고등학생들은 그런 면에서 차라리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신지를 닮았다. 영문도 모른 채 네가 지구를 지켜야 한다는 아버지의 강압으로 초호기에 올라타야 했던 신지처럼, 이 작품의 주인공들은 보이지 않는 힘에 떠밀려 K2 소총을 손에 쥔다.
하지만 정확히 말해 소년 소녀들을 전장으로 밀어붙이는 건 단순히 외계 생물체 침입이라는 우발적인 변수 때문만은 아니다. 주인공인 성동고 3학년 2반 아이들이 예비군 입대를 거부하면 어떻게 되는지 질문하자 담임선생은 예비군 1년을 채우면 다음해 수능에 대학입학 가산점을 주니 무조건 하라고 다그친다. 하루하루 대학 입학이라는 목표를 향해 움직이는 고3에게 가산점, 그리고 이것을 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모른 척 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이것은 지금 어른들이 요구하는 것을 그대로 따르지 않으면 미래가 보장될 수 없다고 끊임없이 겁을 줘서 시스템을 유지시키는 한국의 학교 시스템 그대로다. 다시 말해 주인공들이 ‘방과 후 전쟁활동’을 펼쳐야 하는 건 ‘학생임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학생이라서’다. 그들에게 구체형 외계생물보다 더 불가항력적이고 또한 불가해한 것은 대학을 위해 다른 모든 걸 바쳐야 하는 한국의 입시 제도다.
최초로 19금 딱지를 달 정도로 잔인한 장면, 가령 외계 생물의 촉수 공격에 목이나 팔이 잘려나가는 모습이 난무하지만 <방과 후 전쟁활동>을 하일권 작가의 전작들과 연장선상에서 보게 되는 건 그래서다. 바로 이전 작품이자 하일권 작가 최고의 개그물인 <목욕의 신>을 제외하면 그의 작품 주인공들은 모두 일상적 폭력에 노출된 고등학생들이었다. <삼봉이발소>의 장미는 못생겼다는 이유로 “너 같이 못생긴 년들”이라는 남학생들의 말을 들어야 하고 <삼단합체 김창남>의 호구는 소위 ‘빵셔틀’로서 일진 아이들에게 툭 하면 두들겨 맞는다. 직접 장미를 욕하지 않는 아이들도 얼굴 예쁜 게 못생긴 것보다 낫다고 여기며, 호구네 반 친구들도 그가 당하는 폭력에 무심하다. 요컨대 이것은 단순히 일부 가해자 대 일부 피해자의 구도가 아닌 폭넓게 내면화된 폭력을 보여준다. 선생은 아이들의 위험을 고려하지 않은 채 입대를 종용하고, 아이들은 그 비합리적 태도에 대해 수용하는 <방과 후 전쟁활동> 속의 내면화된 입시 제일주의처럼. 딱히 한 명의 주인공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수많은 캐릭터가 각각의 개성을 간헐적으로 드러내는 이 작품에서 유독 선명한 악역을 맡은 것이 대학 입학에 목숨을 건 영수라는 건 그래서 상징적이다. 가산점에 목을 매며 친구들을 위협에 빠뜨리고 때론 총으로 목숨을 위협하기도 하지만, 그는 특별히 악한 영혼의 소유자가 아니다. 그보다는 내면화된 입시 제일주의가 극대화됐을 때 어떤 기형적 인격이 만들어지는지 보여준다.
그래서 <방과 후 전쟁활동>은 장르적으로는 판타지이되 오히려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판타지나 동화와는 거리가 먼 냉엄한 현실을 반영한다. 앞서 말한 전작들에서 하일권 작가는 주인공들이 학교 바깥의 작은 일탈을 통해 무조건적으로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 자존감을 찾는 방식으로 세상의 폭력을 극복하려 했다. 하지만 <방과 후 전쟁활동>은 그 작은 승리의 순간마저 쉽게 주지 않는다. 그들에게 전쟁터는 학교 바깥의 일탈이 아니라 이름만 바꾼 학교 시스템에 가깝다. 아이들은 외계 세포와의 싸움과 위기 속에서 의외의 우정과 이타심을 확인하기도 하지만 또한 남들 몰래 전투 식량을 먹는 이기심을 보여주기도 한다. 중형 세포 말살 작전만 성공하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 생각했던 아이들은 친구의 목과 팔이 날아가는 참혹한 모습을 보며 자존감은커녕 극심한 트라우마 만을 머리에 남긴다. 대체 이보다 디스토피아라는 말이 어울리는 상황이 있을까.
이토록 잔혹한 이야기가 과연 어디로 흐를지 궁금한 건 그래서다. <삼단합체 김창남>을 제외하면 작지만 따뜻한 희망과 위로를 전했던 하일권 작가지만, <방과 후 전쟁활동>에서 벌어지는 아수라장에서 그런 결말을 기대하기란 쉽지 않다. 과연 십대가 겪어야 하는 일상적 폭력에 주목해 왔던 이 탁월한 작가는 어떤 결말을 통해 어떤 전망을 남길까. 그것은 작품의 컬러톤 그대로 회색빛 디스토피아일까. 알 수 없지만 그에 따라 우리의 기분은 극심한 우울과 희망을 오갈 것이다. 아이들이 극복해야 할 이 치열한 전쟁이 지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피 안 튀기는 전투의 가장 직설적 은유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