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마
신분의 벽과 편견 때문에 더 아름다울 수 있었던 19세기의 로맨스 이루기도 어렵고 지키기도 어려운 것이 사랑이라고 한다. 이런 사랑이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은 그 앞을 가로 막는 숱한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스탕달에 따르면 ‘사랑에는 한 가지...
2013-10-18
황민호
신분의 벽과 편견 때문에 더 아름다울 수 있었던 19세기의 로맨스 이루기도 어렵고 지키기도 어려운 것이 사랑이라고 한다. 이런 사랑이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은 그 앞을 가로 막는 숱한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스탕달에 따르면 ‘사랑에는 한 가지 법칙밖에 없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랑에 대한 가치관이 확고한 대문호의 말이기에 어느 정도 설득력 있어 보인다. 따지고 보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슴시린 러브스토리들은 결국 사랑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애쓰고 괴로워한 비망록들이다. 일테면 사랑하는 심슨부인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 영국의 왕위를 포기하고 윈저공으로 살았던 에드워드 8세의 인생처럼. 더러 신분과 계급이 사랑을 가로막기도 했지만 어떤 경우든 그 허들을 넘지 못한 사랑은 없었다. 모리 카오루의 <엠마>도 계급의 벽과 주변의 편견 때문에 그 사랑이 더 아름다웠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엠마>의 배경은 19세기 영국 런던. 이 시기의 영국사회 구성원들은 산업혁명 이후 자본가, 중산층, 노동자의 3계급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러나 선거법의 개정으로 중산층까지 허용된 투표권이 노동자들에겐 허용되지 않자 노동자 중심의 민중운동이 일어나는 등 신분 계급사회에서 민주 평등사회로 변화해가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내홍을 겪는 시기였다. 변화와 혁신의 시대였지만 영국의 중심인 런던은 여전히 오래된 생활습관과 함께 계급사회가 뿌리 깊이 남아 있는 공간이었다. 이런 시대 분위기를 배경삼아 젠트리(상류계급) 무역상인 존스가의 장남 윌리엄과, 메이드 엠마의 험난하지만 고결한 로맨스가 펼쳐진다. 오랜만에 예전 가정교사였던 켈리부인 댁을 방문했던 윌리엄은 거기서 메이드인 엠마를 만나 첫눈에 반하게 된다. 켈리부인 댁을 나서면서 윌리엄은 의도적으로 장갑을 흘려놓고 엠마는 구태여 그런 윌리엄을 뒤 쫒아가 장갑을 돌려주면서 두 사람의 사랑이 싹트기 시작한다. 그 후로 윌리엄은 켈리부인 댁이 있는 리틀 메릴본을 자주 드나들며 엠마를 향한 사랑을 키워가고, 엠마 역시 성실한 윌리엄의 성품에 호감을 갖게 된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랑이 결코 순조롭게 진행되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최상류층 자본가인 윌리엄과 메이드 신분인 엠마가 전통과 계급이 남아있는 빅토리아 시대를 살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허들이었다. 물론 엠마는 여느 메이드들과는 사뭇 다른 아우라를 지니고 있다. 무엇보다 윌리엄이 첫눈에 반했고 윌리엄 주변에 있는 런던의 숱한 총각들, 심지어 우편배달부 청년으로부터도 러브레터를 받을 만큼 남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여인이다. 윌리엄의 연적으로 등장한 하킴은 엠마를 두고 ‘서있을 때의 분위기가 좋아, 움직이는 모습도 좋고, 천천히 말하는 투도 그렇고, 너무 높지않은 목소리도 그렇고 무엇보다 얼굴이 마음에’ 든다고 대놓고 말할 정도로 엠마는 매력적이다. 외모만 매혹적인 것이 아니다. 어려서부터 켈리부인으로부터 꼼꼼하게 일을 배운 것은 물론 배달되어 온 러브 레터에 일일이 답장을 보낼 수 있을 만큼의 글을 배웠으며 사람을 대하는 예절과 친절, 사랑이 넘치는 온화한 성품도 몸에 익힌 요조숙녀이다. 엠마는 안팎으로 상류층의 반듯한 규수 못지않은 소양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사실 윌리엄의 연인으로 손색없는 편이다. 게다가 엠마는 30년동안 상류층 가문의 베테랑 거버니스였던 켈리부인이 ‘젊고 예쁘고 일도 잘하고 성격도 솔직한 만큼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상대가 있을’ 거라고 인증해준 최고의 신부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엠마가 메이드라는 이유만으로 두 사람의 앞길은 험난하기만 하다. 이미 엠마를 마음에 두고 상류층 규수들의 프로포즈를 거절하는 윌리엄에게 아버지 리처드 존스는 결혼상대는 같은 나라 사람이 바람직하다며 이렇게 말한다 ‘영국은 하나지만 그 안에는 두 개의 나라가 있다. 상류계급 이상인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의 나라다. 그 둘은 말을 통해도 별개의 나라다’ 며 두 사람의 앞길에 먹구름을 드리운다. 둘의 사랑에 도움이 안되기는 윌리엄의 형제자매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윌리엄의 상대가 메이드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상식 밖이며 자각이 부족하다고 윌리엄을 몰아붙인다. 아버지는 윌리엄이 끝까지 엠마를 관철시키려 한다면 결국 귀족계급에서 자신을 스스로 추방하는 일이 될거라고 경고한다. 게다가 유일하게 엠마의 사랑을 응원해 주던 켈리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엠마가 런던을 떠나면서 두 사람의 사랑은 끝을 알 수 없게 된다. 집안의 반대와 주변의 극심한 편견은 윌리엄을 힘들게 하고 급기야 자작가문의 딸과 결혼하려 하지만 윌리엄은 엠마에 대한 자신이 사랑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음을 깨닫는다. 윌리엄은 가족과 귀족 신분의 메리트를 모두 포기 하면서까지 엠마와의 사랑을 선택하려 한다. <엠마>는 표면적으론 19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메이드와 젠트리 사이의 로맨스를 그린 만화이지만 사실 그 이상의 사회사적 의미를 지닌 작품이다. 영국근현대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19세기 영국의 계급 사회와 그 구성원들이 변혁의 시기를 지내온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이 만화는 픽션이긴 하지만 매우 흥미롭다. 두 사람의 러브스토리를 통해 자연스럽게 그 시대를 들여다 볼 수 있다는 점이 <엠마>의 매력이며 장점이다. 뿐만 아니라 <엠마>는 19세기 영국의 풍물지 역할로도 모자람이 없다. 메다이유 호텔, 코벤트 가든, 무디스 대본소, 램즈게이트, 보드스쿨, 크리스털 팰리스, 해러즈 백화점 등 19세기 런던을 상징하는 아이콘들이 작품 곳곳에 등장하여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19세기 런던을 찾아간 듯한 현실감을 안겨준다. 귀족가의 무도회와 만찬풍경, 파티를 준비하는 주방풍경, 메이드들의 일상을 보여주는 리얼한 장면은 이 작품을 위한 작가의 자료 공부가 쉽지 않았음을 짐작케한다. 필요한 곳에는 세밀화 버금가는 선을 사용하는 치밀함과 탁월한 연출력 역시 <엠마>가 독자들에게 오래 읽혀지는 이유이다. 하킴왕자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출몰하는 하킴걸스의 4차원 액션과 메이드들의 은밀한 사생활을 엿볼 수 있는 것도 <엠마>를 읽는 소소한 즐거움이다. 모리 카오루는 세계사적으로 근대와 현대의 경계였으며 변혁의 시대였던 19세기의 정서와 풍광에 각별한 관심이 있어 보인다. <엠마>가 19세기 영국 런던이라는 도시를 배경으로 변혁의 시대를 살아가는 유럽 사람들의 일상을 보여 주었다면 최근작인 <신부이야기>는 19세기 중앙아시아 초원을 배경으로 유목민으로 대표되는 아시아 사람들의 일상을 보여주고 있어서 흥미롭다. 19세기 서양여인인 엠마가 조용한 성품의 온화한 여인이라면 19세기 중앙아시아 여인인 아미르는 적극적이고 활달하고 여인이라는 점도 재미있는 대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