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멤버
“헤헤, 잘난 척은...네가 아직도 자랑스런 황국 병사인 줄 알아? 전후사정을 좀 배우셔야겠는데. 폐허에 터 잡은 양아치들은, 대부분 전장의 아비규환을 겪었단 말씀이야.” “창천항로”의 작화가 킹 곤타(king gonta)가 신작을 들고 돌아왔다. 현재(2013....
2013-10-16
김현우
“헤헤, 잘난 척은...네가 아직도 자랑스런 황국 병사인 줄 알아? 전후사정을 좀 배우셔야겠는데. 폐허에 터 잡은 양아치들은, 대부분 전장의 아비규환을 겪었단 말씀이야.” “창천항로”의 작화가 킹 곤타(king gonta)가 신작을 들고 돌아왔다. 현재(2013.09) 한국어판으로는 2권까지 출간된 이 신작의 제목은 “리멤버(remember)”,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전장에서 귀환한 남자주인공이 ‘기억상실증에 걸린 무술의 달인’이라는 설정으로, 주인공이 새롭게 만나게 되는 여러 명의 동료들과 함께 폐허가 된 도쿄 한복판에서 처절하고 화려하게 사투를 벌이는 액션활극이다. “지금은 1945년. 서력 1945년 9월 9일. 여기는 도쿄 신바시의 암시장이지.” “창천항로”에서도 유감없이 보여주었듯이, 이 작가의 작화나 액션 연출은 정말 달인의 경지에 올랐다. 아무 생각 없이 책장을 넘기는 것만으로도 이런 장르를 좋아하는 독자들이라면(특히 남자들) 행복감에 빠져들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스토리인데, 아무래도 “창천항로” 때는 워낙 훌륭한 스토리 작가가 공동으로 일을 했었기 때문에, 이 작가의 화려한 그림과 연출에 뛰어난 스토리가 결합되면서 그야말로 명작이 탄생했던 것이고, 스토리 작가가 없는 이번 작품은 어떨지 아직은 미지수다. “나는 네가 쓴 기술을 알고 있다. 너는 전에 대륙에 있었을 거야.” 작품의 주인공인 자지는 기억을 잃어버려서 자신의 이름조차 모른다. 그저 정신이 들었을 때 누군가의 유골함을 들고 폐허가 된 도쿄 한복판에 서있었다. 자신의 이름조차 떠올리지 못하던 그였으나, 중국 마피아 창룡회의 일원인 류와 우연히 시비가 붙어 격투를 벌이다가 그의 신기한 무술을 본 류가 무언가를 떠올리며 내뱉은 이름이 ‘자지’다. ‘자지’라는 이름이 그의 진짜 이름인지 아닌지도 확인할 길이 없지만, 어쨌든 그 이후로 그는 ‘자지’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작품의 재미는 폐허가 된 도쿄에서 새로운 구역과 이권을 놓고 아귀다툼을 벌이는 야쿠자들 간의 항쟁에 자지가 개입되게 되면서 발생한다. 암시장의 상권을 비롯해 새롭게 재건되어 가는 도쿄의 여러 가지 이권을 차지하기 위한 야쿠자들의 항쟁에 중국 마피아들까지 끼어들면서 상황은 거의 복마전으로 치닫는다. 주인공인 자지는 자신의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으려 노력하면서, 새롭게 알게 된 많은 이들과 인연을 맺고, 자신의 의지에 상관없이 여러 가지 사건에 개입하게 된다. 아직 한국어판으로 2권까지 밖에 나오질 않아서 판단을 내리긴 이르지만, 스토리 자체가 좀 산만한 감은 있다. 하지만 폐허의 시대에서 새롭게 피어나려는 다양한 사람들의 엄청난 에너지가 작품에 화려한 활력을 불어넣는다. 주인공인 자지의 신기한 무술 실력과 잃어버린 기억도 흥미롭지만, 날카롭고 빠른 칼솜씨를 지닌 아사모토 파의 중간보스 레이지, 시부야를 근거지로 삼은 중국 마피아 창룡회의 잔인무도한 ‘고문집행인’ 류, 암시장의 한 구석에서 점을 봐주며 미군들까지 쥐락펴락하는 애꾸눈 마담 긴 등 개성 넘치는 조연들이 다양하게 등장해 읽는 재미를 배가시킨다. 다음 권이 얼른 나오길 기대하고 있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