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가의 문장 (Royal Emblem)
고대와 현대를 넘나드는 타입슬립 판타지 순정의 시작과 절정 은 호소카와 치에코와 후민, 두 작가가 만들어낸 타입슬립 순정 로맨스의 원류이자 38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연재 중인 역작이다. 일본의 순정잡지 「월간 프린세스」에서 처음 연재가 시작된 건 무려 1976...
2013-09-30
원은주
고대와 현대를 넘나드는 타입슬립 판타지 순정의 시작과 절정 <왕가의 문장>은 호소카와 치에코와 후민, 두 작가가 만들어낸 타입슬립 순정 로맨스의 원류이자 38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연재 중인 역작이다. 일본의 순정잡지 「월간 프린세스」에서 처음 연재가 시작된 건 무려 1976년으로 현재 일본에서 58편까지 발간되었다. 대단한 권수이긴 하지만, 연재 기간을 고려할 때 썩 많다고는 할 수 없다. 국내에서는 <나일 강의 소녀>, <나일 강의 여신>, <신의 아들 람세스>, <태양의 아들 람세스> 등 다양한 제목의 해적판으로 수차례 소개되었었다. 연재 기간으로나 분량으로나 대작이 분명한 이 만화의 기본 구조는 뜻밖에 몹시 단조롭다. 현대의 여주인공이 고대로 타임슬립 해 이집트 파라오와 사랑에 빠지고 그런 그녀를 온갖 이웃 나라 왕 또는 왕자들이 사랑하게 되면서 납치, 구출, 가출, 납치, 구출을 반복하면서 (현대로 돌아왔다가 다시 과거로 끌려가기도 한다.) 벌어지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 단순한 구조 안에 버티고 있는 스토리의 광대함과 상상력은 엄청나다. 타임슬립의 원류, 영원히 계속될 도돌이표 만화의 지존 이집트 카이로에서 고고학을 전공하고 있는 미국인 유학생 캐롤 리드. 그녀는 이집트 유적발굴사업을 진행 중인 미국의 재벌 리드가문의 사랑받는 딸이다. 어느 날 발굴단은 피라미드를 발굴하게 되는데, 그 와중에 고대 이집트의 여왕인 아이시스가 주술에서 깨어나면서 ‘왕의 잠을 방해한 자’에 대한 치명적인 저주를 걸며 캐롤을 무려 3천 년 전의 고대 이집트로 끌고 가 버린다. 처음엔 피라미드를 만드는 노예들 틈에 던져졌던 캐롤은 하얀 피부와 금발 머리의 신비스러운 미모로 승승장구, 결국은 멤피스 왕의 곁에까지 이르게 되고 독사에 물린 왕을 치료해주게 되면서 왕의 사랑을 얻게 된다. 바로 여기서부터 장장 38년째 끝나지 않는 어마어마한 사랑의 대장정이 시작된다. 신의 아들로 불리었던 거침없는 파라오와 현대 소녀의 만남과 사랑은 멤피스를 짝사랑하는 그의 누이 아이시스의 질투와 분노를 몰고 오며 어떻게든 캐롤을 없애고 멤피스를 되찾으려 한다. 거기에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서 (주로 가출과 납치) 만나게 되는 히타이트, 아시리아, 바빌론, 미노스 등등 수많은 나라의 왕 혹은 왕자들은 약속이나 한 듯 흰 피부와 금발 머리, 고고학으로 다져진 지혜를 바탕으로 이집트의 여신으로 추앙받는 캐롤을 사랑하게 되면서 한 소녀를 둘러싼 끝도 없는 격동의 사랑이 전쟁이라는 남다른 스케일을 자랑하며 펼쳐진다. 어찌 보면 황당하기까지 한 설정에 납치와 구출, 가출, 납치, 구출의 도돌이를 반복하는 구조, 극단에 가까운 상황과 말도 안 되는 역사적 허구에 이르기까지. 분명히 트집 잡을 구석이 많은 만화지만, 고대로의 타임워프와 이집트의 왕과 여왕, 당시 이집트를 둘러싼 다른 나라의 왕과 여왕 등을 쉼 없이 쏟아내며 쫄깃한 긴장감을 늦추는 법 없이 이야기에 푹 빠져들게 한다. 게다가 그 사이사이 캐롤을 향해 쏟아내는 수많은 왕의 애타는 사랑과 그들 모두를 합친 것보다 더 강렬하고 절실한 멤피스의 사랑까지. 그야말로 액션모험활극+시대판타지+가슴이 찌릿찌릿해지는 애절한 로맨스를 보는 기분이랄까. 그 흡입력이란 한 번 빠져들면 쉽사리 놓아버릴 수 없을 정도다. 환상적인 스토리라인, 매력적인 캐릭터, 궁극의 러브 판타지. 이 만화에는 ‘소녀의 감성을 자극하는 세 가지 요소’가 있는데 그 중 첫 번째는 타임슬립의 전형을 이룬 스토리라인이다. 고대 이집트와 현대를 오가며 펼쳐지는 매력적인 러브 스토리로 사랑 받고 있는 <왕가의 문장>은 전형적인 타임슬립물이다. 요즘 이 만화를 처음 접하는 독자들에게는 ‘흔한’ 소재와 구성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순정만화에서 인기 장르로 자리매김한 타임슬립물의 원류가 바로 이 <왕가의 문장>이란 사실을 안다면 더는 이 만화를 뻔한 타임슬립물로 분류할 수 없다. 그만큼 <왕가의 문장>의 기본 설정과 구성은 이후 수많은 타임슬립 만화가 수없이 복제하고 차용하고 확장해서 재생산한 기본 뼈대,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누가 뭐래도 거부할 수 없는 매력적인 캐릭터다. 모든 왕을 사랑의 열병에 빠트리는 여주인공 ‘캐롤’은 고고학을 배우고 있는 금발 머리, 파란 눈동자의 미국 소녀다. 고대 이집트 여왕 아이시스에 의해 고대 이집트로 끌려온 후 고대와 현대를 넘나들며 수많은 나라의 운명을 뒤바꾼다. 이집트 소년 왕 멤피스는 물론이고 그녀에게 반하는 왕과 왕자들이 그녀를 납치하고 멤피스는 그녀를 구하기 위해 쉬지 않고 전쟁을 벌인다. 그녀에게는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만한 탁월한 매력점이 있다. 여신처럼 지혜로우며 (심지어 앞을 내다보기도 한다!) 금발과 흰 피부의 독특한 아름다움이 있고 왕 앞에서도 굽히지 않는 당당함에 소녀의 수줍음을 갖추고 있다. 한마디로 캐롤은 손에 잡힌다 한들 쉽게 꺾을 수 없는 꽃이다. 남주인공은 또 얼마나 매력적인가. 긴 흑발 머리와 아름다운 미모를 소유한 이집트의 소년 왕 멤피스는 호전적이고 격렬한 성격을 지닌 타고난 통치자다. 그는 우연히 발견한 캐롤의 금발, 흰 피부, 파란 눈동자에 호기심을 품고 궁에 데리고 온다. 이후 현대소녀다운 거침없음과 탁월한 지식(전공인 고고학의 힘이 크다)에 반해서 진심으로 캐롤을 사랑하게 되고. 그 후부터는 그녀를 구하기 위해 이 나라, 저 나라와 쉬지 않고 전쟁을 계속하게 된다. 소년 왕은 아름다운 외모와 달리 성격은 전형적인 나쁜 남자로 사랑하는 캐롤에게조차 거칠고 거침없이 대하며 함부로 굴지만, 그 모든 행동 속에는 쉽사리 자신의 손에 들어오지 않는 야속한 여인에 대한 갈망과 불같은 사랑이 숨어있다. 사랑을 거칠게 표현하고 퉁퉁거리는 이 남자는 어찌 보면 아직 어린 츤데레 캐릭터. 그래서 더 매력적이다. 이 두 명 외에 빼놓을 수 없는 악녀 아이시스! 고대 이집트 왕국의 제 1 왕녀로 멤피스의 배다른 누이이자 하 이집트의 여왕인 절세 미녀 아이시스는 모든 순정만화에서 빠지지 않는 악녀이자, 자기 무덤 자기가 판 불쌍한 여자다. 그녀가 캐롤을 고대로 끌고 오지만 않았다면 멤피스는 그녀의 남편이 되었을 거다. 그 외, 지고지순하달지 아니면 의뭉스러운 스토커랄지. 차갑고 계산적이지만 캐롤에 대한 사랑을 통해 성장하는 히타이트의 지혜로운 왕자 이즈밀 등. (이후 등장하는 수많은 왕, 왕자들에 대한 설명은 삭제한다) 어느 캐릭터 하나 버릴 캐릭터가 없고 주연부터 조연까지 누구 하나 각자의 매력과 생명력을 갖지 않은 캐릭터가 없을 정도다. <왕가의 문장>의 세 번째 매력은 철저한 고증을 거친 섬세한 그림과 모든 단점을 덮어버리는 궁극의 러브 판타지다. 사실 워낙 오래된 작품인 만큼 그림체 자체는 현대적인 의미에서 세련됨이 부족하다. 연출이나 데생이 남달리 훌륭하다고 극찬할 수도 없다. 그러나 작은 장신구 하나까지 세심하게 고증을 거친 섬세한 그림이나 쉽게 손에서 책을 놓을 수 없는 흡입력 있는 스토리라인은 권을 더해가며 더욱 힘을 발휘해 같은 구조가 반복된다 해도 그 안을 꽉 채운 내용의 다양성과 힘 있는 전개에 묻혀 지루하다는 생각 따위는 조금도 들지 않는다. 진정 사랑한다면 그까짓 전쟁쯤이야! 어느 날 하늘에서 떨어진 신비스러운 그녀가 신이 정해준 나의 반쪽이라면 그녀를 위해서 죽음의 강인들 건너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 단순무식할 정도로 직선적인 멤피스 왕과 21세기의 현대 소녀 캐롤.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살아왔던 두 사람이 시공간의 장벽을 뛰어넘어 삼천 년 전 이집트에서 펼치는 불꽃같은 사랑이야기는 벌써 사십을 바라보는 숫자만큼의 세월 동안 순정 독자들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이 만화,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단언컨대, 고전 혹은 명작은 세대에 구애 받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