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에는 <어른스러운 철구>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좋게 말하면 어른스럽고 솔직히 말하면 발랑 까졌다. 웹툰 <어른스러운 철구>의 주인공 철구는 음악 시간에 노래방 탬버린을 들고 오고 만 원짜리 지폐에 그려진 세종대왕을 가장 좋아하고 “정리해고 걱정 없는” 공무원이 장래희망인 초등학생이다. 고작 8살밖에 되지 않은, 이제 막 학교생활을 접한 철구에게 학교란 마냥 설레는 공간이 아니라 “유치하고 똑같은 일상의 반복”이고, 교과서란 모르는 것을 배우는 지식 창고가 아니라 “이런 걸 배우려고 학교에 와야 하나 싶을 만큼 유치한 것”이다. 사고방식은 지나치게 현실적이고 표정은 늘 뚱하다.
철구의 어른스럽다 못해 능글맞은 매력은 의외의 순간 빛을 발한다. 사생팬에게 시달리는 짝꿍 명희에게 연예인으로 사는 고달픔을 이해해주고 현실적인 조언을 해주는 유일한 사람이 철구다. 심지어 철구는 친구 재호의 집에 엄마가 있다는 걸 분명히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엄마에게 “재호 누나”라고 부른다. 그렇게 재호의 엄마로부터 호감을 얻은 뒤 재호 아빠의 서재에서 춘향전 완판을 빌려간다. 사회생활까지 할 줄 아는 넉살좋은 녀석이다.
어쩌다 이런 녀석이 태어났을까. ‘공상만화’라는 타이틀에서도 언뜻 예상할 수 있듯이, 철구는 남들과 다르게 태어났다. 그는 생명공학의 발전을 위한 실험 목적으로 태어난 아이다. 철구의 엄마는 아직 친구들과 수다 떠는 걸 좋아하는 여고생이다. 아홉 살 때 고아원에서 실험을 제의받고 참가했다가 철구를 낳게 된 것이다. 다른 엄마들처럼 모성애, 모성본능이라는 것에 아직 눈뜨진 못했지만 철구가 자신의 가족이라는 생각만큼은 누구보다 강하다.
아이의 얼굴을 한 채 능청스럽게 어른스러운 행동을 하는 캐릭터는 단시간 내에 생명력을 얻을 수 있지만 그만큼 수명도 짧다.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친구를 놀리거나 어른을 당황시키는 패턴이 반복되면, 독자들이 금세 지루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해다란 작가는 철구뿐 아니라 주변 인물에까지 스토리와 캐릭터를 부여해 이야기를 점차 확장해갔다. 아직은 철부지 여고생에 가까운 철구엄마 민경, 연쇄살인범 김철철의 딸 소람, 국회의원의 딸 주애, 심지어 18살이나 어린 주애를 짝사랑하는 30대 운전기사 윤기사까지 캐릭터를 부여받았다.
‘어른스러운’ 철구가 또래 아이들의 세계에 쉽게 속하지 못하듯, 소람과 주애도 이유는 다르지만 친구들로부터 소외당하는 존재라는 공통점이 있는 아이들이다. 부잣집 딸 주애는 모두가 자신과 얘기하지 않지만 모두가 자신에 대해 얘기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명품 머리띠를 하면 어떤 행동을 해도 교사들이 눈감아준다는 오해도 많이 받는다. 소람도 마찬가지다. 아버지가 연쇄살인범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친구들은 소람을 멀리한다. 혼자가 편한 주애와 혼자일 수밖에 없는 소람은 어딘가 모르게 닮아있다. 상대적으로 친화력이 좋은 민경 역시 또래 아이들과 다르다. 아무도 그녀를 초등학생 아들을 둔 엄마로 보지 않는 탓이다.
자라난 환경도, 성격도 다르지만 남모를 사정이 하나씩 있는 여고생들이 음악 수행평가를 위해 하나의 합주팀을 꾸린 건,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해다란 작가는 셋을 한 팀으로 묶은 뒤, 소외와 편견에 부딪힌 아이들이 고난을 헤쳐 나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늘 혼자서 팀 수행평가를 해왔던 주애는 난생처음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하며 우정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아무 걱정 없이 다양한 악기를 배우는 주애가 마냥 부러웠던 소람은 자신도 미처 몰랐던 보컬 재능을 발견한다. 다른 친구들이 악기만으로 구성된 합주팀을 꾸리는 사이, 주애, 소람, 민경은 악기와 목소리를 한데 섞은 신선한 합주팀을 꾸려 호평을 받는다.
스스럼없이 친구에게 상처를 주고 가시 돋친 말을 하는 ‘어떤 초등학교’ 아이들. 해다란 작가는 <어른스러운 철구>를 통해 “다름보다 편 가르기를 먼저 배운 아이들”의 실상을 보여준다. 아이들은 “나랑 놀고 쟤랑 놀지 말라”는 말을 쉽게 내뱉는다. 내 편이 아니면 적, 흑이 아니면 백, 왼쪽이 아니면 오른쪽이라는 흑백논리를, 10살이 채 되기도 전에 몸소 배운 것이다. 고사리 같은 손에 꼽기도 어려울 만큼 과목별로 학원을 다니는 재호는 마음대로 놀이터에서 흙장난 한 번 못해보고 자연스럽게 할아버지, 아버지를 따라 의사를 꿈꾸게 된다. 이것이 요즘 초등학생들의 고달픈 인생이다.
지난 2009년 연재를 시작한 <어른스러운 철구>는 현직 교사의 고민, 학교 내 왕따, 초등학생들의 과도한 경쟁구도, 연쇄살인범의 가족으로 살아가는 고통 등 한국 사회의 무거운 문제를 태연하고 덤덤하게 그려낸 웹툰이다. 교사가 학부모로부터 받게 되는 촌지는 분명 심각한 문제다. 그러나 <어른스러운 철구>는 무거운 이슈를 무겁게 담아내지 않는다. 철구의 후견인인 박사로부터 촌지를 받게 된 담임은 고민 끝에 철구에게 봉투를 돌려준다. 담임은 양심의 가책을 덜고 철구는 진짜 교사를 만났다고 뿌듯해하는 순간, <어른스러운 철구>는 그 봉투의 최종 주인이 박사가 아닌 철구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철구의 명품 책가방으로 장식된 마지막 컷은 훈훈할 뻔했던 에피소드를 블랙코미디로 만든다.
더욱 놀라운 건, 심각한 문제를 유머러스하게 그려내는 매력이 있는 <어른스러운 철구>가 해다란 작가의 데뷔작이었다는 사실이다. 1부를 연재하는 동안 스스로 부족한 점이 많았다고 고백한 해다란 작가는 <어른스러운 철구> 1부 연재를 끝낸 후 연재를 잠정 중단했다. “End가 아니라 And”라는 메시지와 함께. 그로부터 3년 후, 2013년 7월에 해다란 작가는 2부??? 컴백했다. 영영 2부가 나오지 않을 줄 ??았던 애독자들에게 2부 컴백은 그 자체만으로도 핫이슈다.
1부가 어른스러운 철구를 둘러싼 ‘어떤 초등학교’의 단면들을 세심하게 그려냈다면, 2부는 주인공이 과연 ‘어른스러운’ 철구인지 ‘어른’ 철구인지 가려낼 것으로 보인다. 주인공 철구의 정체성은 1부 중반부터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철구는 종종 입대하는 꿈을 꾸거나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 모르겠다”는 말을 내뱉으며 현실과 꿈을 혼동했다. 평범한 벌레인 줄 알았던 생물이 사실은 곱등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민경은 그것을 대하는 태도를 바꿨다. 이를 지켜보던 철구는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는 점을 몇 번이나 강조하며 씁쓸해했다. 단순한 ‘곱등이 에피소드’인 줄 알았건만, 이는 8살 철구가 사실은 진짜 어른이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복선이었다.
철구는 정말 철구의 후견인 박사 친구의 아들 재하일까. 시험관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뇌를 이식받은 사람일까. 철구가 우리가 알던 철구가 아니라면,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일까. 아니면 여전히 본질은 변하지 않았으니 똑같은 철구일까. “벌레의 진짜 본질이 곱등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앞으로 주의하는 게 맞다”는 민경은 철구의 비밀을 알게 됐을 때에도 자신의 생각에 변함이 없을까.
먼 길을 돌아 철구가 돌아왔다. 여전히 어른스러운 철구인지, 애써 아이인 척 하는 어른 철구인지는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무거운 이슈를 무겁지 않게 그려내고, 별 생각 없이 웃으며 읽어 내려가던 독자의 뒤통수를 시원하게 치던 <어른스러운 철구>의 해다란 작가는 2부를 통해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해줄까. 진짜 철구의 맨얼굴이 드러나는 순간이 기다려지는 이유다.
이제 막 2부를 시작한 시점에서 1부 정주행을 추천하는 건, 미처 모르고 지나쳤던 사소한 에피소드가 사실은 극 중 흐름에서 굉장히 중요한 복선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3년 전 연재했던 1부를 정독하고 다시 2부를 본다면, 해다란 작가가 곳곳에 숨겨놓은 의미를 하나둘 씩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