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 루비코믹스 1119 - ZE-11 (是(ZE)-11)
말에는 힘이 있다고 한다. 나쁜 말도 좋은 말도 말을 한 당사자나 말을 들은 상대에게 고스란히 기운을 미치기 때문에 말을 하기 전엔 한 번 더 생각하고 조심해야 한다는 의미다. 생각 없이 경솔하게 내뱉은 말이 나에게 돌아올 수도 있고, 홧김에 “확 다쳐라!” 짜증 ...
2013-08-13
원은주
말에는 힘이 있다고 한다. 나쁜 말도 좋은 말도 말을 한 당사자나 말을 들은 상대에게 고스란히 기운을 미치기 때문에 말을 하기 전엔 한 번 더 생각하고 조심해야 한다는 의미다. 생각 없이 경솔하게 내뱉은 말이 나에게 돌아올 수도 있고, 홧김에 “확 다쳐라!” 짜증 부렸는데 정말로 상대가 다치기도 한다. 우연이라기엔 어른들에게 자주 들어온 ‘말의 힘’이 마음에 걸린다. 정말 말에는 힘이 있는 걸까. 말한 대로 이루어진다는 말은 사실일까. 언령-내뱉은 말이 현실이 되는 힘 시미즈 유키의 만화 <是-ZE>는 바로 말의 힘을 다루는 언령사와 그들을 지켜주는 키마, 즉 종이 인형과의 관계를 다룬 BL코믹이다. 아니, 왜 하필이면 비엘? 이라고 생각할 취향이 맞지 않는 분들에게는 조금 죄송하지만, 이 만화는 수많은 비엘 중에서도 여러모로 눈에 확 튀는 만화다. 어려서부터 길러주시던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혼자가 된 시치카와 라이조는 요리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 그는 부동산업자인 겐마의 소개로 와키라는 남자의 집에 가정부로 얹혀살게 된다. 갈 곳 없는 라이조는 어떻게든 그 집에서 버텨야 하지만, 어쩐지 이 집은 수상쩍은 점이 한둘이 아니다. 남자들만 가득한 집에서는 시시때때로 야한 장면이 연출되고 심지어 저녁 식탁 앞에서 코노에의 한쪽 팔이 잘려나가는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한다. 더욱 충격은 잘린 팔에서 피 한 방울 흐르지 않는다는 사실! 혼이 나갈 정도의 충격에 빠진 라이조에게 집주인 와키가 말한다. 팔이 잘린 코노에는 ‘카미(인형)’이며 자신은 인형사이고, 또 이 집에서 함께 지내는 미토 가문 사람들은 ‘언령사’라고. 언령이란 곧 ‘말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힘’이다. 미토 가문은 대대로 언령사 집안으로 그들은 자신의 말을 현실로 바꾸는 힘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언령은 저주를 걸어 상대를 죽이거나 다치게 하거나 불행하게 하는 등, 대체로 저주나 나쁜 주술에 한정되어 있다. 또한, 자신이 뱉은 말의 무게만큼 위험이 고스란히 되돌아오기 때문에 언령사로서 그들의 삶은 결코 평탄하지 않다. 지독한 ‘말’로 저주를 걸 때마다 자신의 목숨도 담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결코 함부로 저주의 ‘말’ 내뱉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직업이 언령사인만큼 말의 저주가 무서워 입을 다물고 살 수는 없다. 그런 그들의 위험을 대신 받아서 저주로부터 지켜주는 존재가 바로 인형사 와키가 만든 인형 ‘카미’다. 카미는 100% 천연펄프 소재의 종이로 인형사 와키에 의해 영혼을 지니고 태어난 인간형의 종이 인형. 언령사들은 모두 자신의 카미를 소유한다. 카미와 언령사는 처음 카미가 깨어나는 순간부터 주종의 관계를 맺고 남다른 유대감을 갖게 되는데 카미는 자신의 언령사를 대신해 저주를 받거나 언령사의 상처를 대신 받고 치료해줄 수 있다. 이때 언령사의 부상이 심각할수록 그를 치료하는 카미의 몸에는 깊은 상처가 생기는데 인간이 아닌 종이 인형이니만큼 그들의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금세 사라진다. 카미가 언령사의 상처를 대신 받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로, 언령을 통해 상처를 카미에게 옮기거나 혹은 서로 간 점막접촉을 통해서다. 즉, 카미는 언령사의 재앙을 대신 받는 일종의 재앙받이지만, 자신의 언령사가 없는 카미는 존재 가치가 없기 때문에 소멸의 과정을 걷게 된다. 그러므로 카미에게는 언령사가 그 누구보다 특별하고 중요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오랫동안 연령사의 재앙을 대신 받아 카미로서의 능력이 다하거나 가슴 안쪽 ‘핵’이 파괴되는 경우 카미는 백지상태로 돌아가는 죽음의 과정을 겪는데, 이때 해당 카미를 만들었던 기원이 남아있는 한, 다시 그를 재생시킬 수는 있다. 그러나 이렇게 재생된 카미는 리셋 과정을 거친 상태나 마찬가지기 때문에 이전 생에 대한 기억은 존재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백지에서 종이 인형으로 재탄생한 것. 이런 카미를 만들어내는 존재가 바로 인형사인 와키. 그는 죽은 언령사의 모습을 기원으로 카미를 만들어내고 소멸하기 전까지 카미의 A/S를 담당하는, 카미에게는 언령사 만큼이나 중요한 존재다. <是-ZE>는 바로 이 언령사와 카미들의 이야기다. <是-ZE>는 와키의 집에 머무는 다양한 언령사와 카미들의 사연을 여러 에피소드에 나누어 보여준다. 총 12권의 이야기에는 5, 6개 정도 커플의 이야기가 담겨있는데 이중 겐마-히미 커플과 쇼우이-아사리 커플의 이야기는 취향을 뛰어넘는 찡한 로맨스의 정석을 멋지게 살리고 있다. 한쪽의 일방적인 사랑과 그로 인해 아주 서서히 열리는 마음, 그리고 카미의 죽음과 재생이라는 비슷한 패턴의 반복을 거쳐 한쪽은 이전 카미로서의 기억을 완전히 잃은 리셋의 청순한 상태로 재생됐고 다른 한쪽은 재생 후 기적적으로 이전의 기억을 되찾는다. 리셋이 아니라 전원 온인 셈. 이렇게 다른 결과를 불러왔지만, 그 과정에서 두 커플은 각각의 방식으로 진정한 사랑을 찾기에 이른다. 사랑의 방식이 다르듯 사랑의 완성 또한 다른 길을 걸어 행복에 이르는 셈이다. 이 이야기는 BL이라는 장르와 주인의 재앙을 대신 받는 인형이라는 특이한 소재를 차용했지만, 가장 순정적인 로맨스의 감동을 보여주고 있다. 특이한 설정, 참신한 소재. 그리고 그것을 잘 이끌고 풀어가는 각각의 스토리가 지닌 감동. 마이너한 장르인 BL임에도 순정 로맨스를 좋아하는 독자들에게 꼭 소개해주고 싶은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어쨌거나 <是-ZE>는 재미있다. <是-ZE>는 BL이라는 장르에 대한 선입견을 내려놓고 보았을 때 칭찬할만한 장점을 많이 지닌 만화다. ‘로맨스’ 장르를 풀어가는 스토리라인은 남-남 커플이라는 점만 빼면 여느 순정로맨스와 별반 다르지 않다. 다양한 사랑이 나오고 그들이 품고 있는 스토리는 단순한 재미를 넘어서 무척 진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억지스럽지 않은 전개와 몰입하게 하는 스토리라인이 그 자체만으로도 매우 재미있다. 게다가 말로 사람을 저주하는 언령사와 그들의 재앙을 대신 받는 종이인형, 인형을 창조하는 인형사의 설정은 무척 창의적이다. 또한, 재앙을 대신 받는 방식으로 언령을 이용하거나 혹은 점막을 이용한다는 설정은 BL 만화에 만연한 에로틱한 장면의 반복에 그럴듯한 타당성을 부여해준다. 씬 남용에 대한 거부감을 납득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셈이다. BL 만화계의 스타 작가 시미즈 유키는 소재의 참신성, 설정의 특이성, 감동적인 스토리, 취향을 뛰어넘는 다양하고도 가슴 울리는 로맨스로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자랑한다. 작품의 후반부에서 작가는 많은 사연을 감춘 듯 보였던 와키의 과거를 보여줌으로써 미토 가문의 시작, 카미와 언령사의 시작을 극적으로 설명해준다. 그 모든 이야기가 무척 재미있고 눈물 나도록 찡하게 전달된다. 가슴에 남는 장면의 연출뿐 아니라 스토리텔링 능력에서 누구보다 뛰어난 자신의 재능을 능수능란하게 보여주는 셈이다. <是-ZE>를 읽고 나면 기억에 남는 건 동성애가 아니라 ‘사랑’이다. 동인녀가 아니라도 순정만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작품이다. 물론, 아무리 스토리가 재미있어도 BL은 영 취향이 아니고 역겨운 분들에게는 비추다. 언령사의 재앙을 점막을 통해 받는 인형의 이야기인 만큼 권마다 에로틱한 씬이 절대 빠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