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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블레스

노블레스 오블리주. 웹툰 의 가장 핵심적인 테마를 요약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작품 속에서 주인공 라이를 칭하는 이름인 ‘노블레스’는 보편적 의미의 귀족이 아닌 인간보다 월등한 능력과 수명을 지닌 뱀파이어 귀족 사회의 수호자를 뜻한다. 만화 속에서...

2013-07-23 위근우
노블레스 오블리주. 웹툰 <노블레스>의 가장 핵심적인 테마를 요약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작품 속에서 주인공 라이를 칭하는 이름인 ‘노블레스’는 보편적 의미의 귀족이 아닌 인간보다 월등한 능력과 수명을 지닌 뱀파이어 귀족 사회의 수호자를 뜻한다. 만화 속에서 가장 강한 힘을 가진 존재들로 표현되는 루케도니아의 뱀파이어 가주와 지구적 지배 집단인 유니온의 장로조차 ‘노블레스’의 힘 앞에서는 경외감을 표할 정도다. 요컨대 그는 매 에피소드를 거듭할수록 더 새롭고 강한 적이 나오는 판타지 액션 만화의 공식 안에서도 이미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능력자다. 
  
범박하지만 <노블레스>를 소위 ‘먼치킨 류’라 하는 장르로 분류하게 되는 건 그래서다. <드래곤볼>이나 <원피스>, <나루토>처럼 판타지 액션의 다수를 점하는 성장물에선 미완의 대기인 주인공이 수많은 시련을 거치고 더 강한 적들을 격파하며 최고의 위치에 올라가는 구성이라면, ‘먼치킨 류’의 주인공은 이미 처음부터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주인공이 난관을 극복하며 만들어가는 서사의 긴장감과 동질감은 덜하지만 대신 강력한 힘을 가진 주인공이 그 힘을 폭발시켜 악역을 말살할 때의 카타르시스는 굉장하다.
 
가령 영화 <이퀼리브리엄>에서 주인공 존 프레스톤이 조심스레 자신의 감정을 숨겨오다 더는 참지 않고 혼자서 국가의 정예 요원들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쓰러뜨릴 때의 속도감은 피투성이가 된 주인공이 겨우겨우 적을 쓰러뜨리는 식의 성장물에선 볼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하여 ‘먼치킨 류’의 플롯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설적으로 주인공이 힘을 해방하기까지의 과정이다. 주인공의 일방적인 학살극은 자극적인 재미는 있을지언정 일회성으로 쉽게 휘발된다. 서사적으로 누적된 감정을 주인공의 각성과 함께 폭발시키는 구성이 함께 할 때 비로소 ‘먼치킨 류’는 독자를 몰입시키고 이야기의 힘을 얻는다.
 
하여 두고두고 회자되는 <노블레스>의 소위 ‘꿇어라’ 장면은 ‘먼치킨 류’에서 이야기와 인물의 디테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오랜 시간의 잠에서 깨어난 라이의 외모와 분위기에서 제목 그대로 범접할 수 없는 고귀함과 힘을 짐작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노블레스>의 손제호 작가는 라이의 범상치 않음에 집중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가 현세의 고등학교에서 겪는 평범한 일상에 집중한다. 몇 백 년의 수면기 이후에 현세에 나왔기에 라면을 먹고 온라인 게임을 하는 모든 일상이 라이에겐 신기한 것이며, 때문에 귀족적인 외모에도 불구하고 현세에서 그의 모든 행동은 어설프고 엉뚱하다. 이처럼 라이를 신비롭되 친근한 인물로 납득시키고 또한 그가 신우나 익한 같은 아이들과 쌓아가는 즐거운 일상을 보여주었기에 아이들을 위기에 몰아넣은 악역 제이크에게 숨겨놓은 힘과 분노를 개방하며 “꿇어라, 이것이 너와 나의 눈높이다”라고 말했을 때 어떤 어색함이나 과함 없이 캐릭터의 위엄과 매력만이 오롯이 드러난다.
 
하지만 <노블레스>가 정말 빛나는 건 오히려 라이가 보여준 힘의 해방 이후다. 사실 제이크를 물리치며 시즌 1이 끝난 이후 <노블레스>는 매 시즌 같은 방식의 플롯을 따른다. 지난 시즌의 적이 동료가 되고, 그보다 훨씬 강한 적이 등장하고, 신우 일행을 비롯한 라이 주변의 인물들이 위험에 빠지며, 최종적으로 라이와 그의 충직한 심복 프랑켄슈타인이 등장해 말 그대로 판을 정리한 뒤 다시금 학교의 일상으로 복귀한다.
 
제이크보다 강한 적 DA-5가 등장해 라이가 DA-5 리더 크랜스를 소멸시켰던 시즌 2가 그러했고, 루케도니아 가주들 및 루케도니아의 지배자 로드와의 갈등을 역시 라이의 압도적 힘으로 해결했던 시즌 3가 그러했으며, 유니온의 장로 중 하나인 12장로를 라이가 필살기 블러드 필드로 없앤 시즌 4 역시 그러했고, 세 명의 유니온 장로와 전면전을 벌이며 역시 라이가 두 명의 장로 겸 과거의 루케도니아 가주를 영면시킨 시즌 5가 그랬다. M-21, 타키오 등 새롭게 라이의 식구가 되는 개조인간들이 매 전투마다 보여주는 성장, 조금씩 밝혀지는 라이와 프랑켄슈타인의 과거, 그리고 여전한 라이와 아이들의 교내 해프닝 등이 흥미로운 서브플롯 역할을 해주지만 그것만으로 매 시즌 반복되는 패턴에 극적 긴장감을 불어넣긴 어렵다. 앞서 말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테마가 중요해지는 건 이 지점이다.
 
여타 ‘먼치킨 류’의 주인공들의 실력 행사가 상당히 과시적이라면, 라이는 언제나 자기 주위의 소중한 존재들을 지키기 위해 힘을 쓴다. 여기에 그가 힘을 발휘할 때마다 생명이 소모된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라이의 싸움은 순결한 자기희생이 되며 일종의 신성까지 부여된다.
 
왜 생명까지 소모하며 자신들을 구했느냐는 M-21의 물음에 라이는 답한다. “내 생명력을 소모해서 그대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면 내 생명의 가치는 그걸로 충분한 것이 아닌가.” 누구보다 강하고 아름다운 ‘노블레스’의 품격은 이처럼 대가를 바라지 않는 ‘오블리주’를 통해 완성된다. 생명의 소모라는 치명적 약점이 오히려 존재를 더욱 완벽하게 만드는 역설. 마찬가지로 <노블레스>의 그저 단순 반복되는 것처럼만 보이던 이야기 패턴이 라이의 일관된 희생의 과정이라는 것이 드러나며 극적 긴장감의 밀도는 훨씬 높아진다. 가장 통쾌한 액션신이 가장 짙은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이율배반을 통해 판타지 액션으로서의 쾌감과, 영웅적 주인공의 선의가 스스로의 파국을 향해 가는 전통 비극의 정서가 <노블레스> 안에서 하나가 된다.
 
매 시즌, 강력한 적들을 물리치고 라이가 다시 평범하지만 밝은 학교의 일상으로 복귀하는 ?????복적 결말을 빤하다고 할 수 없는 건 그래서다. 그 일상은 그의 희생으로 지켜낸, 말하자면 싸움 자체의 목적인 동시에 언제나 홀로 무거운 짐을 져야 하는 그가 잠시나마 그 짐을 내려놓고 쉴 수 있는 장소다. 하여 매 시즌마다 나오는 일상으로의 귀환은 가장 반가운 승전보이자 다음 시즌에서도 도래하길 바라는 이상적인 미래다. 다섯 번째 시즌을 마치며 생명의 위험 신호까지 겪은 라이에게 다시 일상을 선물해줄 수 있을까.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바로 그것, 주인공을 위해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게 되고 그 여부를 쉽게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 다른 ‘먼치킨 류’에서 볼 수 없는 <노블레스>의 가장 큰 저력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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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근우

작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