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버린 웨폰 X
의 영화 포스터를 봤을 때 머리 속을 스친 것 중 하나가 1988년 의 커버였다. 영화 포스터엔 헬멧이 벗겨진 토니가 양 팔을 벌린 채로 도시 위로 거꾸로 추락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그는 의식을 잃은 듯 보이고 파손된 다리 부분에선 불꽃과 연기가 솟아난다. 이것은 에서...
2013-07-15
이규원
<아이언맨 3>의 영화 포스터를 봤을 때 머리 속을 스친 것 중 하나가 1988년 <아이언맨 232호>의 커버였다. 영화 포스터엔 헬멧이 벗겨진 토니가 양 팔을 벌린 채로 도시 위로 거꾸로 추락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그는 의식을 잃은 듯 보이고 파손된 다리 부분에선 불꽃과 연기가 솟아난다. 이것은 <아이언맨 232호>에서 아머가 부서지고 헬멧이 벗겨진 채 여러 가닥의 전선에 휘감겨 천정에 매달린 모습으로 그려진 토니 스타크를 거꾸로 뒤집은 모습이다. <아이언맨 232호>는 <아이언맨 3>에 많은 영향을 준 원작의 ‘아머 워즈’ 스토리 라인의 에필로그에 해당되는 이슈다. 그 서두는 ‘잠은 죽음의 또 다른 모습’이라는 말로 시작된다. 기계의 미로를 헤메던 토니는 그 안에서 자신을 닮은 한 괴물의 공격을 받고 쓰러진다. 얼마 뒤 그는 끔찍한 시체 더미 위에서 깨어난다. 그 앞에선 제임스 로즈가 예전의 아이언맨 아머를 입고 시체들을 소각하고 있다. 로즈는 이 시체들은 토니가 학살한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토니는 그럴 리 없다며 부인하고, 아마 아까 마주쳤던 기계 괴물의 짓일 거라고 주장한다. 로즈는 토니에게 술 한 잔을 따라주며 조언한다. ‘빠져 나갈 길을 찾지 마, 들어갈 길을 찾아야 돼.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면 그 어떤 괴물도 다스릴 수 없어.’ 로즈의 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계 괴물은 촉수처럼 전선들로 휘감으며 토니를 덮쳐온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길 수 없는 괴물의 힘 앞에 굴복하기 직전, 토니는 로즈의 힌트를 떠올리고 자신을 향해 힘을 사용한다. 악몽에서 깨어난 토니는 비로소 그 어떤 전쟁으로도 자기 안의 괴물을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괴물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토니 스타크가 꿈속을 헤매는 이 아이언맨의 이야기는 데이빗 미클라이니와 배리 윈저 스미스의 손에서 태어났다. 이 만화에선 미국 만화에서 흔히 등장하는 상황에 대한 설명을 담은 말상자들 대신에 작은 말상자들이 꿈속을 떠도는 토니의 흩어지고 깨진 생각들을 담는 데에 사용된다. 하나의 문장은 여러 개의 말상자로 깨어지고, 각각의 작은 말상자들은 하나의 패널 속을 이리 저리 부유하면서 몽환적인 그림을 읽어나가는 독자의 시선을 유도한다. 다시 시대를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1986년에 배리 윈저 스미스가 앤 노센티의 데뷔작을 그린 <데어데블 236호>가 있다. 이야기의 주인공 잭 해저드는 베트남 참전 용사로 정부의 슈퍼솔저 프로그램에 지원했다. 그렇지만 그는 베트남에서 겪은 심리적인 충격을 극복하지 못하고 여전히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탈출한다. 책임자인 스트라이크 박사는 블랙 위도우에게 잭 해저드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다. 잭은 어느 술집에서 신문을 읽고 있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 신문에는 사이코 살인마가 된 뉴크라는 이름의 슈퍼솔저의 기사가 적혀 있고, 술잔을 기울이는 잭의 머리에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자신을 실험했던 스트라이크 박사의 무시무시한 모습이 겹친다. 그래서 패널 전개 역시 현재의 잭과 붉은 핏빛으로 뒤덮인 잭의 악몽이 번갈아 겹쳐지는데, 현실의 패널들은 항상 페이지 겉자락을 떠돌고, 악몽의 패널은 항상 페이지 중앙을 차지한다. 그런 가운데 마침내 잭은 그를 찾아온 블랙 위도우가 겨눈 총구 앞에 서게 된다. 블랙 위도우를 바라보는 그의 머리에는 스트라이크 박사의 목을 비트는 장면이 지나간다. 그는 ‘슈퍼 히어로는 날 구할 수 없어. 난 남들이 다들 바라는 그걸 원해. 집에 돌아가고 싶어. 땅과 아내에게로.’ 라는 말을 남기고는 그에게 연민을 느끼는 블랙위도우의 총을 가로채 자살한다. 1991년 배리 윈저 스미스가 글, 그림에 심지어는 레터링까지 다 참여를 한 <울버린 : 웨폰 엑스>를 읽다보면 그가 이전에 그렸던 <데어데블 236호>와 <아이언맨 232호>의 스토리는 물론 그 때에 실험되었던 방식들이 눈에 들어온다. 한 남자가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고, 대머리에 안경을 쓴 빼빼마른 박사인지 교수인지는 슈퍼솔저 프로그램에 사용할 병사를 물색한다. 도시 뒷골목에서 숨어 사는 남자는 정부의 비밀 요원 출신인 듯 말이 없고, 미드 ‘프리즈너’에 등장하는 자동차인 로터스 세븐을 타고 다니다. 그는 존재하는지 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어머니에게 편지를 쓸 생각을 한다. 어머니든 무엇이든 그는 아무도 자신을 쫓지 않는 평범한 삶을 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끊임없이 그를 따라다니는 붉은 빛깔의 악몽. 그 안에는 짐승을 실험하던 교수가 있고, 그 교수에 대한 울버린의 증오심은 점점 커져간다. 분절되고 흩뿌려진 말상자들은 꼭 순서대로가 아니더라도 다른 말상자와 엮어서 읽어도 말이 된다. 어떻게 붙이느냐에 따라서 이어붙인 대사는 때론 질문이 되기도 때론 해답이 되기도 한다. 배리 윈저 스미스는 <아이언맨 232호>를 통해서 들어갔던 히어로의 꿈의 세계와 자기 자신 안에 숨겨진 괴물 같은 짐승을 마주할 때 느끼는 공포 <데어데블 236호>를 통해서 시각적으로 그려냈던 실험 대상이 된 병사의 트라우마와 그를 바라보는 요원의 연민의 눈길. 평범한 삶에 대한 그리움, 끝나지 않는 전쟁에 대한 이야기 등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소화하고 발전시켜 <울버린 웨폰 엑스>에서 그 정점을 찍었다. 이 이야기에는 겁에 질린 인물의 표정을 그려놓고서도 ‘그는 겁에 질렸다’라고 과하게 친절을 베푸는 식상한 말풍선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눈의 흐름 색깔의 흐름에 따라서 읽어나가면 된다. 인물의 대사들에도 ‘누구는 뭐라고 말했다’라는 식의 설명이 붙지 않는다. 그저 색깔로 구분될 뿐. 한 대사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다른 말풍선이 그 위를 덮어버리는데, 놀랍게도 이런 식의 전개는 긴박한 실험 현장 그 자리에 있는 듯한 입체적인 느낌을 선사한다. 깨어진 말상자들이 주는 몽환적인 분위기, 때론 이미지만이 펼쳐지다가 때론 하나의 패널 위를 마치 먹이를 노리고 달려드는 짐승떼들처럼 우루루 덮쳐드는 적은 말상자들은 그 순간적으로 밀려드는 자극의 세기 때문인지 마치 눈을 통해 소리를 듣는 듯한 기분도 들게 한다. 패널의 배치 방식도 이전보다 더 발전했다. 말상자들이 독자의 눈을 유도하기도 하고 어느 정도는 순서를 짐작할 수도 있지만, 어느 순간에 있어서는 읽어가는 방향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도 존재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느긋하고 자유롭게 느껴지는 것도 아니다. 이야기는 짧고 빠른 호흡으로 단숨에 끌고 나간다. 선택이 주어지는 상황이지만 선택할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고, 때론 그게 맞나 싶은데도 그냥 읽어나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자유로운 패널 배치와 자유롭지 않게 강하게 끌고 가는 스토리의 힘이 만들어내는 충돌이 결코 불편하게 다가오진 않는다. 오히려 이런 방식이 들판의 야수처럼 자유를 갈망하지만, 억지로 실험실에 끌려와 잔인하기 그지없는 실험을 당하는 울버린의 고통에 더 접근하게 해주는 면이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처음 읽을 때는 한 번은 울버린처럼 끌려가는 듯한 기분으로 읽고, 나중엔 놓친 부분들을 찾아서 꼭 다시 읽게 된다. 이런 독특한 맛을 가진 책은 그리 흔치 않다. 그렇다고 해서 ‘방대한 세계관’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마블 유니버스’, ‘엑스맨 유니버스’, ‘울버린 연대표’ 같은 것들을 미리 알아둬야 될 필요도 없다. 울버린 외에 다른 슈퍼히어로들은 전혀 등장하지 않고, 주어지는 정보라고는 울버린이 뮤턴트이며, 그를 군사 무기로 사용하려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울버린은 뮤턴트도 웨폰엑스도 아닌 그냥 로건이 되고 싶어 한다는 것 정도가 전부다. 야수와도 같은 남자는 실험체가 되어서 생태계의 먹이사슬을 최상부로 올라가기 시작한다. 처음엔 늑대, 그 다음엔 불곰. 그 다음엔 호랑이. 이들 모두 먹이사슬 꼭대기에 있는 포식자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그들 안에 힘의 서열이 존재하고, 그 가장 위에는 인간이 존재한다. 불쌍하다는 마음이 드는 가운데서도 명령에 의해 그 이유도 알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폭력에 가담하는 인간들. 울버린은 발톱을 뽑아들고 인간이란 짐승떼에게 덤벼든다. 아이언맨이 기계와 괴물로서의 나를 받아들였듯, 울버린도 야수요 살인 병기로서의 나라는 악몽을 그 꿈에서 깨어나며 로건이라는 이름을 자각하는 과정을 통해 받아들여 간다. ‘내가 이 자를 칼로 찔렀나?’ 대사는 기억을 잃어버린 야수인 로건을 너무나 잘 표현해주는 말로 오래 인상에 남았다. 최후의 반전이 주는 재미도 대단하거니와, <야만인 코난> 시리즈를 오랫동안 그린 덕분인지 시체로 산을 쌓고 뜨끈뜨끈한 피가 철철 흐르는 무참한 살육전에 대한 작가의 묘사도 탁월하다. 배트를 만난 배트맨과 울프를 만난 울버린이 갖는 묘한 평행이론 덕에 다른 세계인 DC의 <배트맨 다크 나이트 리턴즈>와 같이 읽으면 더 깊은 풍미를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