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자
4년전 제9회 만화의 날 행사장에 참석한 적이 있다. 시상행사가 끝나고 자리를 뜨는 박기정 화백을 다급히 붙잡고 싸인을 요청했는데, 지나가던 원로 만화가 중 한분이 ""여~ 우리 박선생님은 어딜가나 인기 좋으시네~""하고 추켜세우니, 쑥스러워 하시면서도 자신의 작품속...
2013-07-05
페니웨이
4년전 제9회 만화의 날 행사장에 참석한 적이 있다. 시상행사가 끝나고 자리를 뜨는 박기정 화백을 다급히 붙잡고 싸인을 요청했는데, 지나가던 원로 만화가 중 한분이 ""여~ 우리 박선생님은 어딜가나 인기 좋으시네~""하고 추켜세우니, 쑥스러워 하시면서도 자신의 작품속 페르소나였던 훈이를 멋지게 그려 주셨다. 시간이 흘러도 자신을 알아봐준다는 누군가 사실은 기쁜 일이리라. 사실 필자에게 있어 박기정 화백의 만화는 그리 낯익은 작품들이 아니다. 1960년대 만화방 만화의 대중적인 레이블이었던 클로바문고의 삼인방 박기정, 박기준 화백, 그리고 박부성 이 분들은 나보단 아버지 세대에게 꿈을 안겨준 현역작가였다. 이 중 박기정 화백이 등단한 것이 1956년 [공수재]를 발표하면서부터니까 거의 반세기 전의 일이다. 유독 우리의 옛것을 소중히 다룰 줄 모르는 한국 문화 컨텐츠 시장의 특성상 이러한 시대의 걸작들은 영원히 볼 수 없는 먼 기억속의 단편으로 남아있거나 설령 존재하더라도 일부 올드팬이나 소장가들의 개인 소장품으로 고이 간직되어 있을 뿐이다. 이웃나라인 일본만하더라도 데스카 오자무나 요코야마 미츠테루, 이시노모리 쇼타로 같은 걸출한 작가들의 작품이 원형 그대로 고스란히 보존되어 아직도 절찬리에 팔리고 있는것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이라 심한 자괴감마저 느껴질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 흔히 ""권투만화""하면 떠오르는 것이 치바 테츠야의 일본만화 [내일의 죠] (한국명: 허리케인 죠, 도전자 허리케인) 라는 사실은 참으로 안타깝기도 하거니와 한편으로는 씁쓸하다. 왜 박기정 화백의 [도전자]나 박봉성의 [신의 아들], 허영만의 [변칙복서], [무당거미] 같은 한국작품이 아니라 일본 작가의 작품이어야 하는지 의문이다. 그만큼 일본만화가 한국 만화계에 미친 영향력은 우리것을 지켜내지 못할 정도로 막강했다는 방증이 아닐까. [내일의 죠]가 연재된 시기는 1968년, 박기정 화백의 [도전자]는 1964년으로 실제로는 [도전자]쪽이 4년이나 빠르다. 일본보다 먼저 권투만화의 걸작이라 불릴만한 작품이 이미 인기리에 연재되었다는 것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특히나 [도전자]는 한국 스포츠만화의 서사구조를 확립했으며 한국민의 자의식이 강하게 드러난 독창적인 작품으로 한국 만화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주인공 백훈의 어머니는 관동대학살 때 일본인들에 의하여 살해되고,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시절 강제로 끌려가 탄광에서 얻은 병으로 사망한다. 부모의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를 지닌 그는 자신을 친자식처럼 사랑하는 일본인 새엄마 덕택에 우등생으로 자라게 되지만 일본인에 대한 증오와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 사이에 혼란을 느끼며 폭력적인 행동을 일삼게 되고, 심지어 양어머니를 냉담하게 대하는 인물이다. 결국에는 일본인 급우들의 모함으로 학교를 그만두고, 시하메 패거리들과의 주먹질을 통해 분노를 표출하며 살아가는 백훈은 어느날 친구인 오동추가 우연히 권투시합에 대리출전하게 된 것을 계기로 복싱계에 입문해 링위에서 일본인을 마음껏 때려눕히지만 마음 한구석에 채워지지 않는 무엇인가를 느끼며 날이 갈수록 회의감에 빠져든다. 결국 그는 권투선수로서의 성공을 위해 일본인으로 귀화한 후 챔피언이 된 오동추와 큰 갈등의 골이 생겨 급기야 죽마고우와의 결전을 요청하게 되는데, 백훈이 진정 링 위에서 원했던 것은 무엇일까? 그는 무엇을 위해 끝없이 도전해 온 것일까? [레슬러]와 더불어 박기정 화백의 대표작으로 기억되는 [도전자]는 세월을 뛰어넘은 한민족의 트라우마를 고스란히 반영하는 작품으로서 재일교포 2세대인 백훈의 복싱 챔피언 등극 과정를 통해 한일간의 갈등과 화해라는 주제를 전달한다. 질풍노도의 시기에 이방인으로서 살아가는 삶의 돌파구로서 권투를 택한 젊은이 백훈의 모습은 6,25 동란과 같은 격동기를 겪어온 세대들의 마음 속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40년전의 작품답게 표현법이나 대사에서 풍겨나오는 정서의 차이는 일본만화 [내일의 죠]에 더 익숙한 세대의 독자에게는 다소 이질적으로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80년대 이후 이상무 화백의 독고탁 시리즈나 이현세 교수의 까치 시리즈로 이어지는 스포츠 만화의 원형을 직접 확인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본 작품 또한 한동안 기억속에서 잊혀져 있다가 한국만화걸작선 복간 프로젝트에 의해 총 5권의 두툼한 박스셋으로 출시되었으며 비록 10페이지 정도가 누락되어 있긴 해도 총 3부 45권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분량의 작품을 40년이 지난 지금 고스란히 담아냈다는 점에서 무척 고무적인 성과를 올렸다, 앞으로도 박기정 화백의 [폭탄아]나 [레슬러], [은하수], [터번] 같은 주옥같은 작품들을 보게되길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