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기의 발명
추리기법으로 풀어낸 역사적 인물과 그 진실에 대한 조명 기본적으로 만화는 이야기를 생명으로 한다. 사건과 인물, 행위의 연관 관계가 허술하고 짜임새가 없는 이야기라면 만화는 그림의 분발에도 불구하고 생명력을 잃는다. 만화가 더러 역사에서 소재를 빌어오는 것도 결...
2013-07-03
황민호
추리기법으로 풀어낸 역사적 인물과 그 진실에 대한 조명 기본적으로 만화는 이야기를 생명으로 한다. 사건과 인물, 행위의 연관 관계가 허술하고 짜임새가 없는 이야기라면 만화는 그림의 분발에도 불구하고 생명력을 잃는다. 만화가 더러 역사에서 소재를 빌어오는 것도 결국 탄탄한 이야기구조를 담보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역사 서술과 만화적 표현, 두 가지 밸런스를 맞춰야 한다는 함정이 있다. 즉 만화의 구성과 연출이 역사적 사실을 자연스럽게 품을 수 없다면 그 만화는 역사의 훼손과 더불어 지리멸렬한 허구라는 오명을 쓰게 될 것이다. 역사가 과거 사실들의 의미와 전개과정을 파악하는데 주력하는 반면 만화와 같은 서사구조는 그 역사적 현상들이 갖는 본질적 의미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새로운 서사구조로서의 당위성을 찾아내는데 골몰해야 한다. 이런 전제를 바탕으로, 역사적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만화 한 편이 눈에 띈다. 제목부터 심상찮은 <흉기의 발명>이다. <카스텔라 레시피>의 스토리로 주가를 올리고 있는 MASA가 글을, <유레카> 14년 연재의 관록을 가진 김윤경이 그림을 맡았다. 만화의 시대적 배경은 조선조 세종연간이고 주인공으로 나선 인물은 당대 임금의 총애를 한 몸에 받던 조선 최고의 과학자이며 기술자, 발명가인 장영실(생몰년 모름)이다. 그런데 만화에 등장하는 장영실의 역할은 측우기나 자격루와 관계없이 역사적으로 전혀 기록을 찾아 볼 수 없는 탐정노릇이다. 만화에서 장영실 스스로 ‘세상 일의 진실을 찾기에 탐(探)자를 쓰고, 천기를 몰래 살피기에 정(偵)자를 붙여’ 조선명탐정이라 자칭하니 이 만화는 굳이 분류하자면 역사추리만화 쯤 되는 것 같다. 우포도청 장윤복 군관이 야간순찰을 돌던 중 뒷문 나무창살 뒤에 숨어있던 괴한에게 습격당해 팔과 옆구리를 찔린 불미스런 사건이 발생한다. 이른바 우포도청 뒷문사건. 그러자 피해자의 상관인 원도빈 종사관이 정5품 상의원 별좌인 장영실을 찾아와 사건의 단서가 되는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도구’의 궁리를 부탁하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 만화를 읽기 시작하면서 고작 이런 정도의 사건으로 흥미진진한 만화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궁궐에서 임금이나 정승 판서가 죽은 사건도 아니고 포도청 군관이 순찰 중에 부상당한 사건으로 한 편의 만화를 구성할 수 있다는 작가의 이야기 확장성 의지와 배포가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그러나 이 만화를 끝까지 놓을 수 없는 이유는 이 사건이 심야에 벌어진 목격자 없는 사건인데다 사건의 해결을 위해 궁중 비품관리를 주업무로 하고 있는 궁정 기술자일 뿐 범죄 사건의 수사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상의원 별좌를 끌어들였단 점에서 일단 추리 만화로서의 요건을 갖추었고, 사건에 끌어들인 별좌가 다름 아닌 역사적 실존 인물 장영실이란 점이었기 때문이다. 장영실을 미스터리한 사건의 해결사로 투입한 작가의 캐스팅 능력은 탁월해 보인다. 장영실이 누구인가? 중국에서 귀화한 아버지와 부산 동래현 관기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천민임에도 뛰어난 기술적 역량을 발휘, 세종대왕에게 그 재주를 인정받아 종3품 대호군 관직에까지 오fms 15세기 최고의 과학자요 기술자였다. 입지전적인 인물이지만 가계와 출생배경, 과학자로서의 성장과정은 알려진바 없고, 승승장구하던 그가 불경죄로 파면 된 이후 그에 대한 모든 행적과 기록이 자취를 감추었다는 점 등 생애의 많은 부분이 베일에 가려져 있는 미스터리의 인물이다. 이런 인물을 미스터리한 사건의 해결자로 내세운 것은 그야말로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초강수 였던 셈이고 이 만화가 역사 담론으로서 성공을 거둘 수 있는 요인이었다. 장영실은 수사관 못지 않는 예리한 추리로 원 종사관을 압도하며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간다. 피해자가 상처를 입은 장소와 찔린 각도가 수평이라는 데 착안하여 용의자와 사용된 흉기를 추정해 나가는 장영실의 능력은 놀랍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작가의 과학적 상식과 추리 능력이 놀라운 것이다. 추리물이라면 이 정도의 설정은 당연한 것일 수 있지만 격자문 너머의 용의자와 흉기를 밝혀내기 위해 다양한 시설 평면도와 흉기 설계도를 그림으로 표현해 내도록 한 것은 이 분야에 대한 작가의 내공이 만만치 않음을 보여준다. 이런저런 추리로 용의자는 그 날밤 포도청에 남아있었던 사람들인 도구쟁이 뚝영감과 부엌지기 한씨 아줌마로 좁혀진다. 만화가 진행되는 내내 그저 만화적 재미와 시대적 배경의 당위성을 위해 빌어온 허구의 인물일 뿐, 우리가 아는 역사적 인물 장영실과는 싱크로율 제로였던 그 장영실은 마침내 만화의 후반부에 이르러 뚝영감이 던지는 냉소적인 한 마디를 통해 단순한 만화의 주인공이 아니라 역사의 실체,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장영실이란 사실이 처절하게 각인된다. 그리고 이 순간 이 만화는 고도의 테크닉을 발휘한 역사추리만화로서의 가치를 지니게 된다. 결국 이 만화는 단순히 우포도청 뒷문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역사 추리 만화가 아니었다. 작가가 의도한 것은 역사추리만화의 형식을 빌어 우리가 놓치고 있었던 역사의 진실, 기록으로 남겨진 그 이면의 진실에 대한 진지한 탐구였다. 역사적 인물 장영실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어 보이는 허구의 사건에 장영실을 투입하고 장영실이 그 사건을 해결해 내도록 만드는 과정을 통해 실제 역사에서 장영실이 어이없는 사건으로 어느 순간 한 줄의 설명도 없이 역사의 기록에서 사라진 진실을 조명하려고 했던 것이다. 우리가 아는 역사는 정말 사실일까? 그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어떤 웅숭깊은 사연을 놓친채 그저 명문화된 몇 줄의 의미에만 연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뚝영감이 장영실에게 던지는 한마디 ‘지금은 전하의 총애를 받으며...승승장구하고 계시다 들었지만... 어쩌면 나리도 나와 같은 꼴을 당할 수도 있소. 사소한 실수.. 헛발질 한 걸음으로... 나리라면 그럴 때 어떻게 하실겁니까?’ 이 말은 이 만화의 정점이며 장영실을 둘러싼 역사적 진실에 대한 작가의 소신이다.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장영실들이 귀담아 들어야할 잠언이다. 과거의 역사를 결부시켜 현재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이야말로 역사를 차용한 모든 서사구조가 지녀야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흉기의 발명>은 그 덕목을 잊지 않은 만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