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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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백의 소리

“조금만 더 버티면 봄이었는데, 할배가 죽었다. 할배가 죽자 내 ‘소리’도 사라졌다.” “아기와 나”, “저스트 고고”, “뉴욕뉴욕” 등의 작품으로 우리나라에도 폭넓은 팬 층을 거느린 일본의 인기 만화가 라가와 마리모의 신작 “순백의 소리” 1권이 학산문화사를 통...

2013-06-25 김현우
“조금만 더 버티면 봄이었는데, 할배가 죽었다. 할배가 죽자 내 ‘소리’도 사라졌다.” “아기와 나”, “저스트 고고”, “뉴욕뉴욕” 등의 작품으로 우리나라에도 폭넓은 팬 층을 거느린 일본의 인기 만화가 라가와 마리모의 신작 “순백의 소리” 1권이 학산문화사를 통해 정식 한국어판으로 출간 되었다. “이제 이곳에는 좋아하는 소리가 없데이....” 라가와 마리모라는 만화가에 대해서는, 굳이 특별한 설명을 하는 것 자체가 사족(蛇足)으로 느껴질 정도로, 발표하는 작품마다 많은 인기를 얻은 유명한 순정 작가다. 한 가족의 평범한 일상을 소재로 한 소소하고 따뜻한 느낌의 만화(“아기와 나”)부터 동성애자들의 소외된 삶을 다룬 사회성 짙은 만화(“뉴욕뉴욕”), 청춘의 싱그러움이 맘껏 발산되는 스포츠 만화(“저스트 고고”)까지, 장르를 불문하고 수많은 독자들을 ‘재미와 감동의 도가니’에 빠지게 한, 이젠 ‘관록’까지 느껴지는 ‘완성형 순정 만화가’랄까? 그런 라가와 마리모가 이번에 내놓은 신작 “순백의 소리”는, ‘츠가루 샤미센’이라는 일본 전통악기를 소재로 삼아 ‘순수하게 소리를 쫓는 천재 소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한국어판으로는 아직 1권밖에 나오질 않아서 좀 아쉽지만, 1권만으로도 ‘재미와 감동’을 충분히 예감케 하는, 전혀 녹슬지 않은 여전한 솜씨를 보여주고 있어서 팬으로서 무척 기대가 크다. “지금...내 안은 텅 비었거든, 그래서 뭔가를 얻을라고 찾아 헤매는 듯한 느낌이데이.” “츠가루 샤미센이란 아오모리 현 서부의 츠가루 지방에서 전해 내려오는 일본의 전통악기로, 세 개의 현으로 구성돼 있으며 풍부한 음색을 지니고 있다. 때문에 다른 악기와 달리 솔로로 연주되더라도 강하게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을 지녔다. 일본을 대표하는 전통 악기로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많은 인기를 끌고 있으며 전국단위, 지역단위의 샤미센 대회가 일본에서 1년 내내 쭉 이어질 정도다.”(기사 인용 : 제주의 소리, 문준영)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한 이름의 악기 “츠가루 샤미센”은, 최근 들어 일본에서 폭발적인 붐을 맞이해 ‘독주 악기’로서 재검토되고 있는 악기로, 음향이 아주 크고, 현대적인 리듬감이 있으며, ‘곡 연주’라 불리는 놀라운 기교의 연주가 있어서 젊은이들 사이에서 많은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츠가루 샤미센”의 실제 연주를 들어보고 싶다면, 2009년에 내한공연을 펼친 일본의 츠가루 샤미센 연주자 ‘아가츠마 히로미츠’의 영상을 찾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유투브 같은 동영상 사이트에서 쉽게 검색이 가능한데, 공연홍보의 일환으로 KBS 2TV의 “이하나의 페퍼민트”에 출연해 한국의 뮤지션 정재일, 김현준과 합동공연을 펼친 영상을 감상할 수 있다. 이 영상을 보고 “순백의 소리”를 읽으면 ‘작품의 맛’이 아주 달라질 정도로, 작품을 감상하는데 있어서 생생하고 구체적인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어쨌든 위에서 얘기한 ‘아가츠마 히로미츠’같은 우수한 젊은 연주가가 많이 나오면서, 일본에서는 ‘츠가루 샤미센’이라는 악기가 단순히 전통음악의 영역에만 머무르지 않고 대중적인 팝뮤직을 비롯해 여타의 다른 장르와 적극적인 크로스오버를 시도해 전국적으로 인기를 높이고 있다고 한다.(나 역시 ‘샤미센 연주’를 그리 많이 들어보진 못했지만, 매우 현대적인 느낌이 강한 세련된 연주라서 감상하는 내내 아주 청량하고 신비한 기분을 들게 했다.) “순백의 소리” 주인공인 세츠 역시 “츠가루 샤미센”의 달인(우리나라로 치면 인간문화재 급으로 보이는)인 할아버지에게 어릴 때부터 샤미센 연주를 배워온 천재 연주가로 그려지고 있는데, 1권 중간에 록밴드의 공연장에서 밴드의 준비시간을 벌기 위해 홀로 샤미센 연주를 하는 대목에서 관객들이 열광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로 유명한 연주가의 공연영상을 보게 되면, 만화에 그려진 그 장면이 절대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내는 할배의 소리가 되고 싶다. 할배의 ‘즉흥(卽興)’을 내한테 줘.” “순백의 소리”는 작품의 뼈대 자체가, ‘소리를 쫓는 것 외에는 아무 것에도 관심이 없는, 순수한 천재 소년의 이야기’이지만, ‘상업만화’로서 어떻게 그려야 이 작품이 대중적인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지 너무나 잘 아는, ‘관록 있는 작가’이다 보니, 라가와 마리모는 이 작품을 그렇게 ‘심플하고 올곧은 예술성’만을 부각시키는 만화로 그리지 않는다. 라가와 마리모는 자신의 특기인 ‘드라마틱한 갈등구조’를 만들어 가기 위해, 주인공인 세츠 이외에도 다양한 매력을 지닌 캐릭터들을 다수 등장시키는데, 1권밖에 안 되는 분량에서도 캐릭터들의 개성이 서로 충돌하면서, 등장인물들 사이에 적절한 긴장관계를 유발시키는데 성공한다. 이 ‘긴장관계’는 바로 흥미진진한 스토리 구조로 이어지면서, 읽는 이로 하여금 ‘다음 권은 어떻게 될까’ 궁금해서 미치게 만드는 단계까지 직행한다. “꼴시럽구나, 세츠, 할배가 죽으면 니는 샤미센을 켜지 말그래이. 꼴시러운 소리라는 걸 깨달을 때까지 켜서는 안 돼.” 모든 장르를 불문하고, ‘천재’의 이야기는 언제나 재미있다. ‘천재’라는 특별한 부류에 내재된 ‘비극성’도 엿볼 수 있고, ‘하늘이 내린 재능’이 보여주는 경이로움도 느껴볼 수 있겠지만, 사실 그 무엇보다도, ‘천재’라는 별종의 인간을 둘러싼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는 것이 가장 재미있다. 특별한 인간을 중심축으로 놓은 상태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인연의 고리가 맺어지는 ‘버라이어티한 인간관계’는, 어떤 판타지보다도 더 신비롭고 어떤 드라마보다도 더 드라마틱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순백의 소리”는 ‘음악’이 소재다. 이건 철저히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세상에는 다양한 분야에서 재능을 발휘하는 수많은 천재들이 있어도, ‘음악의 천재’처럼 국경과 언어, 인종, 문화와 관습의 차이를 초월해 ‘직접적인 방식으로 감동을 주는 천재’는 찾기 힘들다. (미술의 천재는 복사본 말고 ‘원화’를 직접 봐야하기 때문에 패스, 문학의 천재는 언어의 장벽이 있기 때문에 패스, 스포츠의 천재는 예술장르와는 별개로 보기 때문에 패스 등)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이 작품이 ‘만화’이다 보니 ‘세츠의 소리’를 직접 들을 수 없어 그저 상상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2권도 2권이지만 ‘애니메이션’이 빨리 나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