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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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인생

간단한 퀴즈를 하나 내보겠다. 남자친구와 데이트 중인 여자가 벤치에 정강이를 세게 부딪혔다. 여자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다리를 보려 하는 남자를 만류했다. 그러나 남자는 끝내 여자친구의 정강이에 밴드를 붙여줬다. 그 이후 여자의 기분은 급속도로 다운됐다. 여자는...

2013-06-07 이가온
간단한 퀴즈를 하나 내보겠다. 남자친구와 데이트 중인 여자가 벤치에 정강이를 세게 부딪혔다. 여자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다리를 보려 하는 남자를 만류했다. 그러나 남자는 끝내 여자친구의 정강이에 밴드를 붙여줬다. 그 이후 여자의 기분은 급속도로 다운됐다. 여자는 왜 화가 났을까? 
  

 
 
 
 
 
 
 
 
 
 
 
 
 
 
 
정답은 다리털 정리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자가 생각하기엔 ‘그게 무슨 대수냐’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여자들에게는 치명타다. 남자는 갸웃거리지만 여자는 무릎을 탁 치며 공감했을 법한 이 장면은 네이버 웹툰 <달콤한 인생>의 일부다. 남녀심리를 세심하게 파고들었던 tvN <롤러코스터>를 빗대, <달콤한 인생>은 웹툰판 ‘롤러코스터’라 할 수 있다. 놀라운 것은 남자 작가가 그린 웹툰이라는 점이다.
 
<달콤한 인생>이 다루는 범위는 무한대다. ‘썸남’, ‘썸녀’의 아리송한 심리부터 오래된 연인의 일상까지 횡으로, 종으로 두루 꿰뚫고 있다. 단순히 ‘여자 친구가 주장하는 생얼, 알고 봤더니 BB크림 바른 위장 생얼’ 수준이 아니다. 남녀가 꼭꼭 숨겨놓았던, 그래서 들키고 싶지 않은 속내까지 위트있게 들춰낸다. 말하자면, <달콤한 인생>은 이제 막 연애를 시작하는 사람들 혹은 연애세포가 다 죽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해 줄만한 웹툰이다.
 
‘오늘 컨디션이 안 좋아서 집에서 쉬고 있다’는 ‘썸녀’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그녀의 컨디션을 걱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것은 사실 ‘세상 천하에 할 일이 없어도 넌 안 만나’라는 피도 눈물도 없는 속뜻이 숨겨져 있으니 말이다. 여자는 화해하러 왔다는 남자친구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귀찮은 척, 화난 척, 못이기는 척 문을 열어준다. 그 다음 컷은 대문 뒤로 보이는 급하게 벗은 듯한 허물(옷가지)이다. 남자가 벨을 누르고 여자가 문을 열어주는 그 찰나, 여자는 급하게 옷을 갈아입은 것이다. 어떤 순간에라도 잘 보이고 싶은 여자의 심리를 파악한 에피소드다.
 
<달콤한 인생>이 전하는 탁월한 해석법은 연애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남자 작가임에도 남자보다 여자의 본능을 더 잘 파악한다. 쇼핑을 나서며 ‘전반적으로 보겠다’는 여자의 각오는 사실 ‘사고 싶은 건 많은데 돈이 없어’라는 투정이다. ‘주로 계절이 바뀔 때마다 하는 말’이라는 부가설명도 빼놓지 않는다. ‘난 괜찮으니까 너 먹어’라는 배려성 발언은 사실 아무런 의미 없는 감탄사 혹은 ‘빨랑 시켜’라는 재촉성 발언이다.
 
여자들의 귀여운 내숭이나 무시무시한 본능을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더 재밌게 다가오는 건, 바로 캐릭터가 주는 의외성 덕분이다. 앞서 언급한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여자 주인공은 ‘나니’라는 별명의 소유자다. 가냘픈 몸매를 장착하고 매일 핑크색 머리띠에 볼이 발그레한 ‘나니’는 예쁜 외모와 시크한 매력 덕분에 ‘나니’라는 이국적인 별명을 얻었을 것 같지만, 사실은 ‘개망나니’의 줄임말이다. 퇴근 10분전에 야근을 지시하는 상사를 향해 ‘생떼+투정+시위+폭주’ 콤보를 날리는 것이 나니의 본래 성격인 것이다.
 
내숭과 애교를 장착했을 것 같은 외모의 여자 주인공이 시도 때도 없이 이런 행동을 보이니 더 사랑스럽고 재밌는 것이다. 돈은 없으나 쇼핑욕은 충만하며 식욕은 있으나 애써 숨기겠다는 본능을 꿰뚫는 ‘나니’는, 그래서 볼수록 정이 가는 캐릭터다. 야심차게 새해 다이어리를 꾸미기 위해 가족과 지인의 생일을 체크하고 스티커까지 준비했건만 결국 본인 생일만 기록한 채 1년 내내 하얗게 남아있는 ‘나니’의 다이어리를 보면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사실 ‘나니’에게 자꾸 정이 가는 건, 예뻐서가 아니라 사랑스럽기 때문이다. 예쁘다는 것과 사랑스럽다는 것은 별개다. 객관적으로 예쁘지 않아도 충분히 사랑스러울 수 있고, 아무리 빼어난 미인이라도 매력적이지 않을 수 있다. tvN <막돼먹은 영애씨>의 주인공 영애가 아무리 ‘덩어리’ 취급을 받고 잊을만하면 ‘겨털’과 뱃살을 공개해도 사랑스러웠던 건, 변태를 단칼에 처치하는 호기로운 성격과 남자친구 앞에서는 천상 여자가 되는 반전의 매력 덕분이었다. 웹툰 <다이어터>의 수지를 떠올려보자. 간식과 야참을 갈망하던 그 모습이 정말 사랑스럽지 않았나. <달콤한 인생>의 주인공들도 마찬가지다.
 
<달콤한 인생>은 직장인의 하루, 남자와 여자의 두근거리는 첫 데이트, 오래된 연인의 눈물 나는 현실 등 일상적인 에피소드를 보여주되 그 위에 피도 눈물도 없는 해석을 얹는다. 나, 너, 우리와 별다를 것 없는 주인공들이 짠하면서도 사랑스럽고 혀를 끌끌 차면서도 남일 같지 않은 묘한 감정이 드는 건 이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연애의 시작’ 시리즈는 현재 소개팅을 앞두고 있는 혹은 이미 첫 만남을 가진 소개팅 상대와 잘되고 싶은 사람에게 정독을 추천한다. 웬만한 연애 지침서보다 도움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공유할 수 있고 단답형 대답도 피할 수 있으면서도 나의 마음을 완전히 들키지 않고 그러면서도 너무 딱딱해 보이지 않는 문자, “모해?ㅋ”는 많은 것을 함축하는 키포인트를 잘 잡아낸 대표적인 에피소드다.
 
그 문자를 받은 여자는 (당장 연락이 가능한) 솔로 친구들을 대동해 과학수사에 나선다. ‘뭐해’, ‘머해’, ‘모해’의 차이, ‘ㅋㅋㅋㅋ’의 개수가 의미하는 바까지 해석해내는 <달콤한 인생>을 보면 입이 떡 벌어진다. 가히 문학 교과서의 시를 해석하는 수준이다. ‘오랜만이네’는 내가 너를 기억하고 있었다는 뜻이며, 그 뒤에 붙은 ‘ㅋ’ 하나는 너가 쉽지 않다는 의미다. ‘나야 뭐 걍 있지’라는 문장은 ‘나 주말인데 데이트하는 남자가 없다’는 오픈 마인드를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며 마지막에 덧붙인 ‘~’은 차마 ‘아잉’이라고 쓸 수 없어 대신한 애교인 셈이다.
 
직장인의 마음을 읽는 방식도 센스있다. 직장인의 고질병인 월요병을 다루는 방식이 빤하지 않다. 직장인의 고된 업무만을 원인으로 삼지 않는다. 그 월요병은 직장을 다니면서 얻은 병이 아니라 학생 때부터 쭉 이어져 온 고질병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지름신, 휴대폰 약정, 뱃살 등 사람들의 약한 구석을 의인화해 표현하는 것도 눈길을 끈다. 인터넷 쇼핑을 하는 ‘나니’ 옆에서 “나니씨가 입으면 예쁠 것 같다”고 속삭이는 남자는 직장동료가 아니라 지름신이고, 여자친구 몰래 나타난 의문의 여자는 남자친구의 숨길 수 없는 뱃살이다. ‘730일간의 사랑’이라고 표현된 사연은 휴대폰 2년 약정 기간을 빗댄 것이다. 처음엔 땅에 떨어질까, 액정에 얼굴기름 묻을까 애지중지하더니 1년이 지나면 침대에 내동댕이치고 2년이 가까워지면 잃어버린 휴대폰을 찾기는커녕 오히려 새 휴대폰으로 바꿀 수 있는 기회라고 좋아하는 모습. 어디서 많이 보??? 않았는가.
 
<달콤한 인생>은 환상을 현실로 바꾸는 웹툰이다. 그래서 읽다 보면 웃다가 괜히 씁쓸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달콤한 순간보다 씁쓸한 순간이 더 많은 인생을, <달콤한 인생>은 제목처럼 정말 사랑스럽게 그렸다. 해피엔딩은 없지만 슬며시 웃게 되는 순간이 있다. 매주 찾아오는 월요병의 고통 속에서 어쩌다 한 번, 정말 딱 한번 월요일 출장을 떠난 상사 때문에 아침이 상쾌한 여자 주인공 ‘나니’의 모습을 보면 그런 감정이 생긴다.
 
‘나니’가 친구와의 전화통화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씁쓸하고 짜증나는 일도 이렇게 나누면 재밌는 이야기가 돼버리는 것 같아. 이래서 사람들이 인생을 달콤하다고 하나봐.” 이것이 <달콤한 인생>의 지향점이 아니었을까 ??각해 본다. 매일 똑같이 흘러가는 직장인의 월요병, 끝까지 들키고 싶지 않은 여자의 ‘귀차니즘’도 서로 공유하면 깔깔거리며 읽을 수 있는 이야깃거리가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