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초기화
글자확대
글자축소

나의 목소리를 들어라

24년 동안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현민 작가의 두 번째 장편 (이하 )에서 1988년 풍운전자 영업사원 최종 면접을 보던 열정 넘치던 청년 최판규는, 하지만 24년이 지난 현재 열정도 욕심도 없는 무표정한 중년의 임원이 되었다. 면접 때 밝힌 포부대로 풍운...

2013-06-04 위근우
24년 동안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현민 작가의 두 번째 장편 <나의 목소리를 들어라>(이하 <나목들>)에서 1988년 풍운전자 영업사원 최종 면접을 보던 열정 넘치던 청년 최판규는, 하지만 24년이 지난 현재 열정도 욕심도 없는 무표정한 중년의 임원이 되었다. 면접 때 밝힌 포부대로 풍운전자의 이름을 뉴욕 타임스퀘어 한복판에 세워놓으며 해외영업의 살아있는 전설로까지 불리던 이 남자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알 수 없지만, 더는 가정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가 되고 회사에 대해 별다른 미련을 보이지 않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 풍운전자 입사라는 타이틀은 꼭 영광스러워만 보이지는 않는다. 2012년 현재(작품 기준) 다시 풍운전자 영업팀 입사라는 좁은 문을 뚫기 위해 2박3일의 면접을 치르는 치열한 청춘들의 모습을 보여줌에도 <나목들>을 단순히 주인공의 성공 도전기로 볼 수 없는 건 그래서다.
 

 
 
 
 
 
 
 
 
 
 
 
 
 
 
 
 
 
 
 
 
 
사실 기본적인 설정만을 본다면 <나목들>의 그것은 상당히 고전적이고 심지어 전형적이다. 변변찮은 학벌에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스펙조차 제대로 쌓지 못했지만 근성과 다양한 경험을 가진 주인공 김건호가 한국 최고의 대기업인 풍운전자 신입직원 모집에 도전하는 과정은 다수 소년 만화에서 공유하는 플롯이다. 비교대상을 만화가 아닌 현실의 성공 서사로 옮기면 기시감은 더하다. 비록 종착역이 대기업 입사는 아니라 해도, 별다른 학벌 없이 오직 자신의 능력만으로 성공을 거머쥐었다는 고 정주영 회장의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류의 이야기는 현재 수많은 자기개발서를 통해 재생산되고 있다. 청춘이여 꿈이 있는가? 그렇다면 달려라. 돈도 배경도 없어도 당신의 열정과 능력만 확실하다면 그 끝엔 분명히 성공이 있다. 하지만 현실의 청춘들이 극복해야 하는 현실은 그저 열정만으로 넘기엔 너무 높고 심지어 종종 비루하다.
 
앞서 말한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같은 성공 서사는 기본적으로 이 세상이 공정한 룰을 통해 돌아간다는 신화 위에 서있다. 이것은 그 자체로는 당위적인 명제지만, 현실의 불공정함을 은폐하고 실패의 모든 책임을 온전히 개인의 능력 부족과 게으름 탓으로 돌린다는 점에서는 비윤리적이다. 전형적인 기본 플롯에도 불구하고 <나목들>이 흥미로운 작품인 건 이 지점에 대해 외면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인공 김건호와 역시 그처럼 학력과 스펙보단 다양한 현장 경험을 무기로 한 황태룡이 싸워야 하는 건 단순히 학력 사회의 편견이 아니다. 편견은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 오해를 풀면 해결된다. 하지만 풍운전자 영업본부장 이지창은 일을 잘하고 못하고는 상관없이 그들을 “쓰레기”로 규정하고 면접 답변에 상관없이 탈락자로 지목한다. 심지어 최판규 부장을 정리하려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면접의 기본 룰까지 변경하며 결국 황태룡을 떨어뜨리기까지 한다. 여성 응시자에 대한 태도 역시 마찬가지다. 1대1 배틀 면접에서 박재천에게 미세하게 앞섰던 정향실을 비롯해 모든 여성 응시자는 전멸하고, 정향실을 이긴 것에 대해 씁쓸한 뒷맛을 느끼던 박재천조차 ‘이 면접은 뭔가 이상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김건호가 간파했듯, 이 면접은 박진감 넘치던 과정에도 불구하고 “형식적인 절차”다. 이 불공정하고 비루한 현실 속에서 열정만 가진 청춘들은 황태룡처럼 절망을 억지로 견뎌 내거나, 1대1 배틀 면접을 앞뒀을 때의 김건호처럼 자포자기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동시대의 어떤 문제를 반영한다는 것이 <나목들>의 횡적인 축이라면, 이런 비루함을 웃음으로 풀어내는 개그 만화의 방법론은 종적인 축이라 할 수 있다. 이현민 작가 스스로 열혈 개그라 칭할 정도로 <나목들>, 그리고 그의 전작 <들어는 보았나! 질풍기획!>(이하 <질풍기획>)의 주인공들은 만화이기에 가능한 과장되고 역동적인 액션을 보여준다. 첫 면접인 복장 검사에서 탈락할 뻔한 황태룡은 하늘 위에서 천사 날개를 펼쳐 다시 면접에 합류하고, 조별 PT에 참가한 김건호는 “리스크를 두려워하는 최고의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습니다!”라는 사자후를 광선과 함께 토해내며 면접관들의 마음의 벽을 부순다. <질풍기획>에서도 질풍기획의 김병철은 PT 시간에 맞춰 USB 메모리를 전달하느라 빌딩과 빌딩 사이를 장대로 뛰어넘고, 송치삼은 이레이저 피스트라는 필살기로 벽을 뚫어 화가 난 광고주들의 기억을 삭제한다. 일종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면접관 혹은 광고주가 부리는 ‘갑’의 패악 앞에서 이현민 작가의 주인공들은 그렇게 코믹하면서도 과격한 액션으로 ‘을’의 현실을 돌파해나간다.
 
하지만 이러한 열혈 개그 혹은 액션 개그가 독자에게 좀 더 깊은 감정적 공감을 주는 순간은 <나목들>의 응시생들의, <질풍기획>의 질풍기획 제3기획팀의 초인적 액션과 패기가 결국 현실의 벽 앞에서 무너질 때다. 이현민 작가는 자기 개그의 롤모델로 주성치의 영화를 꼽기도 했는데, 실제로 코믹하고 과장된 액션 뿐 아니라 그것들이 짙은 페이소스로 이어지는 과정까지 그의 만화는 주성치의 방식을 연상케 한다. <질풍기획>의 김병철은 수정된 광고 시안을 시간 맞춰 보내기 위해 경비의 벽을 역시 터프한 액션으로 뚫지만 시안이 찢어지는 실수 때문에 회사를 나가고, 제3기획팀과 DJ FOOD의 정석구 과장은 DJ FOOD의 풋돈 소시지의 비위생적 생산을 고발???지만 오히려 괘씸죄 때문에 광고주들로부터 ???규모 계약 해지를 당한다. <질풍기획>의 내레이션처럼 ‘현실의 벽은 빙벽보다 높았다.’ 주성치 영화의 시그니처이자 소위 ‘다구리 씬’이라 불리는 집단 구타 장면이 그러한 것처럼, 가진 거 없어도 세상 무서운 줄 모르던 명랑 쾌활 주인공이 여전히 우스꽝스럽게, 하지만 현실의 잔인함을 온몸으로 겪는 순간은 오히려 직설적으로 슬픔을 드러내는 방식보다 더 먹먹하다. 스펙 없이, 혹은 여성의 몸으로 뛰어넘기엔 세상이 만만찮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나목들>에서 황태룡과 정향실이 탈락할 때 김건호가 느낀 정서적 충격을 독자 역시 공유할 수 있는 건 그 때문일 것이다. 개그 만화의 가벼움과 현실의 무게감은 그렇게 조우한다.
 
물론 주성치 영화 다수가 그러하듯, <나목들>과 <질풍기획>의 인물들은 현실의 벽 앞에서 다시 한 번 열혈의 기운을 불태??다. 질풍기획을 스스로 그만뒀던 김병철은 사운이 걸린 PT를 위해 빙벽을 뛰어넘고, 불공정하고 적대적인 면접 앞에서 방어하기만 바쁘던 김건호는 최종 면접을 앞두고 ‘싸워야 할 때’도 있다고 전의를 불태운다. 열혈 개그와 씁쓸한 현실, 그리고 열혈의 역습은 정반합을 이루며 다시 한 번 꿈과 열정을 긍정한다. 윤리적 주인공이 비윤리적 세상에 승리할 때 비로소 정과 반은 합을 이룬다. <나목들>이 흥미로운 건 이런 구조를 따르되 주인공의 승리를 인생의 성공과 구분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면접이라는, 남을 이기고 올라가야 하는 경쟁 구도에서 주인공이 옳은 방법으로 승리하는 과정을 따라가면서도 꼭 그것만이 성공의 전부인양 말하지 않는다. 가령 면접 중 요리에 대한 자신의 열정을 재확인한 최필재가 풍운전자 입사를 포기하고 돌아설 때 이지창 본부장을 비롯해 모두들 미쳤다 생각하지만 최판규는 말한다. “네가 뭔데 그들의 성공을 맘대로 정의내리나?” 마찬가지로 주인공 김건호를 통해 가장 큰 위로를 받는 순간은 그가 비장한 표정으로 최종 1인을 향해 걸어갈 때가 아니라 경쟁자인 정향실의 칭찬을 받고 다음 내레이션을 할 때다. ‘나는 어쩌면 내 생각처럼 초라한 ???간이 아닐지도 모른다.’
 
면접을 ??재로 했음에도 <나목들>이 여타의 경쟁 서사와 다른 건 이 지점이다. 스펙 없이 성공했다는 자기개발서 류의 성공 서사가 결국엔 남을 누르고 올라선 이들의 승리 선언이라면, 김건호의 최종 1인을 향한 도전은 비로소 긍정 받은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에게 증명하기 위한 과정이다. 서두에 언급한 최판규 부장의 지친 표정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바라던 풍운전자에 입사해 영업직으로서 승승장구했지만, 그를 외면하는 부인에게서 알 수 있듯 그는 정작 자신의 삶을 잃었다. 과연 최판규는 성공했는가. 하여 김건호를 비롯해 지금 풍운전자 입사에 도전하는 청춘들이 최판규의 24년을 반복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다시 말해 김건호를 비롯한 열혈 청춘들이, 또한 <나목들>이 쟁취하고자 하는 것은 정글에서의 생존이 아닌 진짜 나를 위한 삶이다. 물론 이놈의 세상은 종종 이 둘을 너무 쉽게 혼동하지만.

 

 

필진이미지

위근우

작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