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 이야기
“아침에 일어났더니 엄마한테 부재중 전화가 3통이나 와있었습니다. 엄마라는 인종은 좀 묘한 생물이라고 생각한다.” “생활의 샘”, “솔로 이야기”, “사야와 함께” 등의 작품으로 한국독자들에게 알려진 일본의 순정만화가 타니카와 후미코의 단편집 “편지”는, 작가의 ...
2012-09-26
김진수
“아침에 일어났더니 엄마한테 부재중 전화가 3통이나 와있었습니다. 엄마라는 인종은 좀 묘한 생물이라고 생각한다.” “생활의 샘”, “솔로 이야기”, “사야와 함께” 등의 작품으로 한국독자들에게 알려진 일본의 순정만화가 타니카와 후미코의 단편집 “편지”는, 작가의 귀엽고 깜직한 그림체와 잘 어울리는 풋풋하고 포근한 세 가지 이야기로 이루어진, ‘예쁜 책’이다. “매점에서 알바하는 ‘테츠’,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아이돌이다. 왠지 모르게 느낌이 좋은 사람이야. 내가 생각했던 이미지랑 상당히 흡사해.” 이 작가의 작품은 일단 표지부터 ‘예쁘다’, 물론 이 ‘예쁘다’는 느낌이 우아하다거나 아름답다는 느낌과는 많이 다른 것이다. 선물가게에 진열되어 있는 귀엽고 깜찍한 캐릭터 상품들을 볼 때의 ‘예쁘다’는 느낌이랄까? 어떻게 보면 아주 전형적인 ‘팬시상품’ 느낌의 작화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작가의 전작인 “생활의 샘”이나 이번에 발매된 “솔로이야기”도 읽어봤지만, ‘팬시상품’ 같은 그림뿐만 아니라 거기 담긴 이야기조차도 ‘팬시상품’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림과 이야기가 아주 잘 어울리는 환상의 궁합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가뜩이나 포근하고 풋풋한 이야기들이 너무 귀엽고 깜찍하게 그려져 있어서 어느 순간 좀 ‘손발이 오글거리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올해 학기 초에 계산대 앞에서 지갑을 쏟았다. 당황해서 줍는 눈앞에 커다란 손이 나타났다. 긴 손가락, 새카만 짧은 머리칼과 처진 속눈썹, 넋 놓고 있을 상황이 아닌데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언젠가 친구가 될 수 있다면 좋겠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작가의 작품이 너무 뻔하다거나 유치하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순정만화로서의 완성도도 높은 편이고 이야기의 얼개도 아주 잘 짜여 있다. 특히 여기에 소개하는 작품 “편지”는 세 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단편집으로, 이와이 슈운지 감독, 마츠 타카코 주연의 일본영화 “4월 이야기”를 보는듯한 아련한 느낌을 독자에게 선사해준다. “그날, 도쿄로 출발하던 날, 플랫폼에서 전철을 기다리는 동안 채소를 많이 먹어라. 밤늦게까지 놀지 마라 등등 지겹게 잔소리하던 엄마가 어느샌가 갑자기 말이 없어졌다. 도망치는 것도 아니고 도쿄로 학교를 가서 집에서 나오는 건데 왠지 모르게 나쁜 짓을 하는 거 같았다. 순식간에 멀어지며 작은 점이 될 때까지 그곳에서 계속해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엄마.” 첫 번째 수록된 단편 “편지”는, 여대생 모토코가 새로 이사한 집에서 전주인 앞으로 온 편지를 발견하고 호기심 반, 장난 반으로 전주인 행세를 하며 편지를 보낸 사람과 펜팔을 하다가 영화 같은 운명적인 만남을 겪게 된다는 내용이다. 새로 이사한 집의 전주인은 같은 대학에 다니는 하라다 토오루라는 이름의 남학생이고 편지를 보낸 사람은 그 남학생의 어머니였으나, 모토코는 봉투 뒷면에 쓰인 ‘엄마가’라는 문구만 보고 자신의 어머니가 보낸 편지라 착각하고 무심히 편지를 뜯어 읽어보게 된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남학생의 어머니가 보낸 편지의 내용이 너무 재미있고 공감이 가서 장난처럼 시작된 펜팔이었지만, 펜팔을 하는 동안 점점 남학생의 어머니와 진지한 커뮤니케이션에 빠져들게 되면서 이야기는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더 이상의 소개는 스포일러가 되니 자제하도록 하겠다.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에서 모토코의 짝사랑이 마법처럼 이루어지는 장면이라든가, 평상시에 자신에게 잔소리만 해댔다고 생각했던 엄마를 그리워하며 안부전화를 하는 모토코의 모습이 잔잔한 여운을 남기는 단편이었다. “선배의 허밍을 마지막으로 들은 때가 언제였더라?” 두 번째 단편 “환청 허밍”은 의외의 반전을 결말 부분에 숨겨 놓은, 아름답지만 가슴 아픈 이야기다. 동거중인 연인 시기타의 마음이 자신에게서 서서히 멀어져가는 것을 느끼고 어떻게든 이별을 막아보려 노력하는 여대생 츠구미의 안타까운 고군분투가 담겨 있는 이 짧은 이야기는, 마지막 장면에서 읽는 이에게 ‘울컥’하는 애절한 감정을 느끼게 만든다. 특히 시기타의 냉정한 태도를 보고 어느 순간 ‘더 이상은 되돌릴 수 없겠구나.’라는 것을 느낀 츠구미가, 자신의 마음을 집착에서 체념으로 바꾸며 서서히 ‘아름다운 이별’을 준비해나가는 과정은, 한 편의 잘 만들어진 뮤직비디오를 보는 것처럼 무척이나 인상 깊다. “요시다 카나 24세, 어느 여름날 아침, 연인과 5년을 함께 살았던 집에서 아무 말도 없이 나왔다.” 세 번째 단편 “강을 건너 너와 걷는다.”는, 앞선 두 작품과는 좀 다르게 복잡한 이야기구조를 지닌 단편이다. 분량도 꽤 길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흥부놀부에 등장하는 은혜 갚은 제비에 관한 설화’비슷한 판타지를 모티브로 삼아, 동거 중이던 연인이 결혼으로 발전하기까지의 우여곡절을 아기자기한 느낌의 드라마로 엮어놓았다. “크게 싸운 적도 없다. 그런데 5년이나 함께 지냈던 당신을 떠나려고 한다. 이유는 아마도 ‘서로를 위해’, 옆에 있는 것이 당연한 일상이었기에 잘해주지 못하는 날이 있더라도 그건 별로 상관없었다. 하지만 근본적인 부분에서 어쩔 수 없는 것이 분명히 존재했다. 그러므로, 굿바이, 길었던 나의 봄이여.” 아르바이트하던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우연히 만나 사귀게 된 만화가 시바타와 동거 중이던 요시다는, 5년 정도 지난 어느 날 시바타에게는 아무런 언질도 남겨놓지 않은 채 짐을 싸서 고향집으로 돌아가 버린다. 고향인 나가노로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요시다는 어디선가 만났던 것 같은 귀여운 소년을 보고 왠지 모를 신비한 느낌을 받는다. 오랜만에 돌아간 고향집에서 이것저것 추억에 잠겨 많은 생각을 하던 그녀에게 거짓말 같은 일이 벌어진다. 세 작품 모두 ‘깔끔하고 포근한’ 느낌을 전해줄 것이다. 더운 여름날 읽기 좋은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