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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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일기 (알코올 병동)

“이 만화는 인생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가능한 한 리얼리즘을 배제한 채로 그리고 있습니다.(리얼하면 그리기도 괴롭고 어두워지니까) 1989년 11월, 난 출판사가 의뢰한 원고를 내팽개치고 도망쳤다. ‘일하기 싫어’ 병. 그리고 숙취 탓이었을지도 모르겠다. 1주일동안 ...

2012-09-24 석재정
“이 만화는 인생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가능한 한 리얼리즘을 배제한 채로 그리고 있습니다.(리얼하면 그리기도 괴롭고 어두워지니까) 1989년 11월, 난 출판사가 의뢰한 원고를 내팽개치고 도망쳤다. ‘일하기 싫어’ 병. 그리고 숙취 탓이었을지도 모르겠다. 1주일동안 친구 집에서 묶었다. 작업실에 돌아오니 편집자의 메시지.(어떻게 된 겁니까!) 그 뒤로 연재하던 만화를 대부분 접고 휴양에 들어갔다. 일을 쉬는 기간에는 아침에 작업실에 가서 술 마시고 자고 저녁에 집에 돌아와 술 마시고 잤다. 그런 생활을 하고 있자니 점점 우울과 불안과 망상이 덮쳐 와서 죽고 싶어졌다.(어디 인적 없는 산속에 가서 죽자.) 돈도 떨어졌고, 마지막 술을 마셨다. 산비탈을 이용해서 목을 맬 계획이었다. 근데 잠이 왔다.” 우리나라에서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일본 만화가 아즈마 히데오라는 남자가 10여년간 ‘실종’(본인 말로는 가출)되었던 경험을 만화로 풀어낸 자전적인 작품, “실종일기”가 세미콜론을 통해 한국어판으로 출간되었다. 아즈마 히데오라는 작가에 대해 정보가 워낙 없어서 책표지의 소개글을 보니, 웬걸 나이가 많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할아버지다.^^(1950년생이니 한국 나이로 63세인가?) 일단 작가에 대한 정보가 너무 없는 관계로 세미콜론에서 준비한 아즈마 히데오의 약력을 소개한다. 아즈마 히데오 : 1950년 홋카이도에서 태어났다. 도쿄에서 취직을 했지만 얼마 못 가 퇴사해버렸다. 만화가 이타이 렌타로의 어시스턴트로 일하다가 1969년에 데뷔하여 “두 사람과 다섯 사람”, “자포자기 천사”와 같은 개그물에서 “패러렐 광실”, “메틸 메타피지크”, “부조리 일기” 등 부조리극 성향의 SF물, “햇빛”, “바다에서 온 기계” 등 에로틱한 미소녀물까지 다양한 장르의 만화를 발표해 각 장르 마니아들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얻었다. “나나코 SOS”, “올림포스의 포론”은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활발하게 활동하던 중 슬럼프를 겪었고 1989년 갑자기 실종되었다. 복귀와 실종을 반복하던 그는 가출과 자살 기도, 노숙, 배관공 생활, 알코올 중독치료 등의 경험을 처절하지만 코믹하게 그린 “실종일기”로 다시 일본 만화계의 주목을 받으며 오랜 침체를 딛고 재기에 성공했다.(세미콜론 제공) 한국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일본에서는 최초의 로리콘 만화로 오타쿠 문화의 서장을 연 작가라느니, 부조리극의 선구자라느니 하는 걸 보면 꽤나 유명세를 탔던 재능 넘치는 만화가였나 보다. 어쨌든 작가 소개는 이쯤 하고 책을 살펴보자. “결국 춥다든가 배가 고프다든가 담배를 피우고 싶다든가 술을 마시고 싶다든가 그런 번뇌가 나를 움직이고 있는 셈이로군.” 작가는 이 만화에 나오는 에피소드들이 전부 다 실화라는 것을 아예 밝히고 시작한다. 이 책의 주된 내용으로 이야기되고 있는 두 번의 실종과 노숙자 생활, 배관공 생활, 알코올 중독과 치료병동 생활 등의 사건이 모두 자신이 겪은 10년여 간의 실제 경험들이며, 후기에 나오는 인터뷰에도 밝혔듯이 ‘자신을 제 3자의 시선으로 보는 건 개그의 기본’이라는 ‘쿨’한 태도로 굉장히 객관적인 입장을 유지하면서, 무척이나 힘들었을 것이 분명한 자전적인 경험을 그저 웃고 넘기기에는 무언가 맘에 걸리는, 담백하면서도 씁쓸한 만화로 풀어낸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노숙자 생활을 했던 시절에 제일 건강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 잘 먹고 잘 싸, 맑으면 일하고 비오면 책 읽어, 새벽 4시에 일어나면 두 시간 안에 하루 준비를 끝낸다. 그날 먹을 밥, 담배, 디저트, 술값, 마실 물을 확보한다. 돈이 꽤나 많이 떨어져 있는데 만 엔을 주운 적도 있다. 그랬더라도 술은 자기 전에 세 잔까지만 마시기로 정했다. 자판기 밑에 돈 같은 건 없다. 문제는 낮에 할 일이 없어서 시간이 남아돈다는 것, 주운 주간지랑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난 특별히 허가 없이 빌릴 수 있었다) 그냥 넓기만 한 어느 공원에서 뒹굴거리며 읽었다.” “실종일기”는 총 3개의 챕터로 나뉘어져 있다. 첫 번째 챕터는 “밤을 걷다”, 두 번째 챕터는 “거리를 걷다”, 세 번째 챕터는 “알코올 중독 병동”이다.(맨 마지막에 권말 대담 형식으로 작가의 인터뷰가 실려 있다.) 첫 번째 챕터인 “밤을 걷다”는, 처음 실종되었을 때의 노숙 경험을 담담하게 풀어내고 있는데, 본인도 노숙생활이 처음이다 보니 매일매일 겪게 되는 생경하고 가혹한 경험들이 마치 무인도에 표류한 로빈슨 크루소의 일지처럼 만화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 무척 흥미롭다. 두 번째 챕터인 “거리를 걷다”는 두 번째 실종되었을 때의 이야기로, (아무래도 두 번째다 보니) 어느 정도 경험이 붙어 여유로워진 노숙자생활 이야기로 시작해서 중간에 배관공으로 스카우트되어 육체노동을 하다가 어느 순간 자격증까지 따고 본격적인 노동자 생활을 경험하는 이야기, 그리고 다시금 만화가로 복귀해서 만화를 그리는 이야기까지 재미있고 아기자기하게 그려져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 두 번째 챕터의 이야기들이 가장 좋았다) 세 번째 챕터인 “알코올 중독 병동”은 심각한 알코올 중독으로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지자 가족들이 알코올 중독 치료 병동에 강제입원을 시키게 되고 결국 그 곳에서 재활치료를 받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본인 외에도 여러 명의 알코올 중독자들의 다양한 모습이 리얼하게 그려지는데, 솔직히 읽기가 좀 불편했을 정도로 ‘중독자들의 세계’는 잘 이해되질 않았다. “내가 조금씩 만화에 정열을 되찾은 건 ‘좋아하는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의 얼굴은 뒤틀려 있다.’라는 야마시타 요스케 씨의 말과 그리고 싶은 걸 그릴 수 있는 동인지 아마추어 만화가들에게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려나.”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실종일기”는 요즘 나태한 일상에 빠져있는 나에게 신선하고 좋은 느낌을 전해 준 작품이었다. 일상에 매몰되어 가는 무기력한 자신을 느끼면서 무언가 변화가 필요하다고 막연하게 ‘생각만’ 하고 있던 게으른 나에게 이 작품이 ‘리플레쉬(refresh)’되는 느낌을 받게 해주었다고 할까? 이 작품을 읽으면서 평상시에는 전혀 인지하지 못했던 내 자신의 안 좋은 점들을 아주 많이 깨닫게 해준 것도 이 책이 나에게 준 긍정적인 변화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제34회 일본만화가협회 대상, 문화청 미디어예술제 만화부문 대상, 제10회 테츠카 오사무 문화상 만화 대상을 탄 작품이기도 하다. 현재 자신의 상태가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고 느끼시는 분들은 한번쯤 읽어보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