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코의 농구
“테이코 중학교 농구부, 부원수가 100명이 넘으며 전국 중학 선수권대회 3연패를 자랑하는 엄청난 강호, 그 빛나는 역사 속에서도 특히 ‘최강’이라 불리며 무패를 자랑했던 시절, 10년에 한 명 나온다는 천재가 동시에 5명이나 존재했던 그 세대를 이른바 ‘기적의 세대’...
2012-09-21
유호연
“테이코 중학교 농구부, 부원수가 100명이 넘으며 전국 중학 선수권대회 3연패를 자랑하는 엄청난 강호, 그 빛나는 역사 속에서도 특히 ‘최강’이라 불리며 무패를 자랑했던 시절, 10년에 한 명 나온다는 천재가 동시에 5명이나 존재했던 그 세대를 이른바 ‘기적의 세대’라 불렀다. 하지만, 그 ‘기적의 세대’에는 묘한 소문이 있었다. 아무도 모르고 시합 기록도 없지만, 그럼에도 천재 5인방이 실력을 높이 샀던 또 한 명의 선수, 환상의 식스맨이 있었다.” 모든 ‘팀 스포츠’가 그렇겠지만, 팀원 개개인의 역량이 합쳐져서 종합적인 팀의 능력이 되는 것이고, ‘팀웍’이라 불리는 고도의 단결력과 집중력이 발현되면 때론 원래 능력치 이상의 힘이 발휘되어 우리가 ‘기적’이라고 부르는 명승부가 가끔씩 연출되기도 한다. 이것이 사람들이 ‘팀 스포츠’에 열광하는 가장 큰 이유다. 약자들에 의해 강자들이 쓰러질 때도 있다는 불확실성, ‘각본 없는 드라마’가 가능해지는 영역이 존재한다는 사실 말이다. 농구는 다섯 명이 하는 스포츠다. 센터, 스몰 포워드, 포인트 가드, 파워 포워드, 슈팅 가드 등등 각자의 영역과 임무가 있는, 상대에 맞서 종합적인 득점을 최대한 올리기 위한 분담포지션이 존재한다. 그러나 어떤 팀이라도 ‘최상의 균형’이 유지된 주전 선수 다섯 명만으로 모든 경기를 소화할 수는 없다. 그래서 농구에는 ‘식스맨’이라 불리는 ‘후보 선수’들이 존재한다. 이들 ‘식스맨’은 항시 선발로 경기에 나가는 ‘주전선수’는 아니지만 주전선수만으로는 이길 수 없는 상황이 온다거나, 주전선수 중 누군가가 부상을 당한다거나, 전술의 변화를 주어 타개해야할 위기 국면이 온다거나 할 때 비로소 ‘코트’라는 무대에 등장한다. 그래서 ‘식스맨’들은 자신만의 특장점을 확실하게 차별화한 ‘스페셜리스트’들이 많다. 3점 슛의 정확도가 엄청나게 높다거나, 변칙적인 드리블을 구사한다거나, 교체된 주전 선수 중 누군가와 아주 비슷한 능력치를 갖고 있다거나 하는, ‘특화된 재능’을 가진 대기 선수다. 여기에 소개하는 “쿠로코의 농구”는, 중학시절 “환상의 식스맨”으로 불리던 주인공 쿠로코 테츠야가 고등학교에 진학해 새로운 농구팀에 합류, ‘기적의 세대’로 불리던 중학교 시절의 옛 동료들과 흥미진진한 대결을 벌이는 이야기로, 위에서 말한 ‘드라마틱한 팀 스포츠의 미학’을 잘 살려내 재미있고 박진감 넘치게 풀어낸 인기 농구만화다. “테이코 중의 주전으로 패스 돌리기에 특화한 보이지 않는 선수...! 소문을 듣긴 했지만 실제로 있었다니...! ‘기적의 세대’ 환상의 식스맨!” 주인공인 쿠로코는 ‘농구 선수’라 부르기엔 너무나 약해 보이는 하드웨어를 지닌 선수다. 키 168cm, 체중 57kg, 파워나 스피드, 유연성 모두 평균치 이하다. 더군다나 ‘존재감’이 너무 약해서 평상시에는 눈에 잘 띄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 만화의 장점은 이 쿠로코의 극단적으로 빈약한 ‘존재감’을 탁월한 식스맨의 능력으로 바꿔놓은 것이다. 쿠로코의 ‘식스맨’으로서 특화된 능력은 ‘패스 돌리기’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순간적인 스피드로 패스의 궤적을 바꾸어 상대가 전혀 예상치 못한 지점에 공을 연결시킨다. 상대로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기 때문에’ 대처할 방법이 없다. 하지만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무척 간단하다. 패스가 변화하는 기점이 되는 쿠로코를 철저하게 마크하면 되는 것이다. 쿠로코의 본래 능력치는 농구선수로서 너무 형편없어서(슛도 잘 못 쏘고, 풀타임을 소화할만한 체력도 없고, 드리블 실력도 형편없다) 쿠로코를 마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래서 작가는 쿠로코에게 한 가지 능력을 더 추가시킨다. 바로 마술에서 쓰는 ‘미스디렉션’이라는 눈속임 기술이다. ‘미스디렉션(Misdirection)’이란 마술사가 관객의 시선을 엉뚱한 곳으로 돌리는 트릭을 말하는 것으로 최대한 자연스럽게 시연할수록 그 마술사의 기술이 뛰어난 것이라 한다. 평상시에도 웬만큼 주의력 깊게 살펴보지 않으면 눈에 잘 띄지 않는, 쿠로코의 ‘빈약한 존재감’을 이용한 ‘미스디렉션’은 경기 중에 상대의 마크를 순간적으로 허물어뜨리고 번개 같은 스피드로 마술 같은 패스를 성공시킨다. “존재감이 없다는 점을 이용해 패스 중계 역할을?! 게다가 공에 접촉하는 시간이 극단적으로 짧아! 그럼 저 아이, 설마...원래 희미하던 존재감을...더욱 희미하게 만들었다는 거야?” “쿠로코의 농구”가 만화로서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바로 이런 주인공의 해괴하고 언밸러스한 능력 때문이다. 이것은 ‘잘 만들어진 캐릭터’만이 주는 드라마틱한 강점이지만 단순히 주인공 캐릭터의 이런 특별한 설정 때문에 이 만화가 인기를 얻었을까? 당연히 아니다. 가장 큰 요인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이유나 원인이 될 수는 없다. 그럼 이 만화가 성공할 수 있었던 원인은 무얼까? 바로 ‘스포츠 만화의 정석’을 잘 지켰기 때문이다. “쿠로코의 농구”는 1권 첫 페이지부터 쿠로코의 라이벌로 테이코 중학교 농구부의 ‘기적의 세대’를 설정해 놓고 있다. ‘중학 3년간 무패’라는 엄청난 실적을 자랑하는 다섯 명의 천재들이 모였던 시절, 쿠로코가 식스맨으로 활약하던 시절에 압도적인 실력과 천재적인 재능을 뽐내며 ‘최강 테이코’의 주전을 놓치지 않았던 다섯 명의 선수가 등장한다. 한번만 보면 상대의 기술을 순식간에 자기 것으로 만드는 키세 료타, 최고의 정확도를 자랑하는 슈터인 ‘득점기계’ 미도리마 신타로, ‘기적의 세대의 에이스’로 천재적인 재능에 압도적인 신체능력과 센스를 갖춘 것도 모자라 변칙적인 길거리 농구기술까지 구사하는 최강의 올라운더 아오미네 다이키, ‘무적의 센터’ 무라사키바라 아츠시, ‘기적의 세대’를 진두지휘했던 주장 아카시 세이주로가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고등학교를 각기 다른 곳으로 진학해 각자가 ‘정상’을 노리고 있으며, 이들의 ‘그림자’로만 활약했던 쿠로코 역시 새로운 학교에서 새로운 동료들과 함께 이들에게 도전하려 한다는 것이 이 만화의 기본적인 설정이다. ‘팀 스포츠 만화’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가 있다면, 주인공만의 개성적인 능력, ‘최강의 라이벌’, 그리고 ‘믿음직한 동료’다. 전설의 명작 “슬램덩크”에서 보여주었듯, 잘 만들어진 ‘동료’ 캐릭터가 주인공, 라이벌들과 함께 어떤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는지 굳이 설명하지는 않겠다. 쿠로코가 새로운 둥지로 찾은 ‘세이린 고등학교 농구부’에는 ‘기적의 세대’에 필적하는 재능과 잠재력을 가진 미국에서 온 카가미 타이가, 믿음직한 주장 휴가 준페이, ‘무관의 오장’중 하나라 불렸던 ‘철심’ 키요시 텟페이 등이 동료로 등장해 끈끈한 결속력을 보여주며 드라마틱한 전개를 펼쳐낸다. 물론 이들 외에도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다양하게 등장해 작품에 긴장감과 박진감을 불어넣는다. 권수가 늘어날수록 점점 황당해지는 단점은 있지만 한번 보면 끝까지 손을 놓을 수 없을 정도로 재미있게 잘 만들어져 있다. 현재 한국어판으로는 16권(2012.07)까지 나왔고 애니메이션도 있다. 강력하게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