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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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바라기 켄이치전설

“속을 알 수 없는 남자, 하야시 켄이치. 50세. 전설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 히가시무라 아키코의 “해바라기-켄이치 전설”이란 만화를 읽다보면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어떤 아티스트라도(그것이 만화가든 소설가든 뮤지션이든 영화감독이든 간에 장르를 불문...

2012-09-13 유호연
“속을 알 수 없는 남자, 하야시 켄이치. 50세. 전설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 히가시무라 아키코의 “해바라기-켄이치 전설”이란 만화를 읽다보면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어떤 아티스트라도(그것이 만화가든 소설가든 뮤지션이든 영화감독이든 간에 장르를 불문하고), 무언가를 창작하는데 있어 자신이 직접 겪은 경험만큼 좋은 자양분이 되는 건 없구나, 하는 생각 말이다. “아키코가 만화가...만화가 선생님이라...너 그렇게 돈이 벌고 싶었냐?” 히가시무라 아키코는 “해파리 공주”, “패션걸 유카”, “엄마는 텐파리스트” 등의 작품을 발표한 작가로 일본에서는 꽤나 유명세를 자랑하는 인기 만화가다. 특히 이혼하고 나서 혼자 어린 아들을 키우며 만화가로 살아가는 바쁜 일상의 모습을, 기상천외한 개그코드로 풀어낸 독특한 느낌의 육아일기 “엄마는 텐파리스트” 같은 작품은 일본여성들에게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각 분야의 ‘오타쿠녀’들이 모여서 각자의 특기를 살려 화려한 패션산업의 세계로 진출한다는 “해파리 공주”같은 작품은 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어져 큰 인기를 끌었다. “해바라기-켄이치 전설”은, 작가의 자전적인 경험이 투영된 재미있는 작품으로 총 13권으로 완결되었으며 학산문화사를 통해 한국어판으로 발행되어 있다. 작가 자신의 고향이기도 한 미야자키를 무대로 개그만화와 순정만화를 합쳐놓은 독특한 스타일의 작품인데, 활달함을 가볍게 넘어서서 정신없을 정도로 산만한 캐릭터들이 무더기로 등장해 매회 개성 넘치는 활약을 펼치면서 독자들을 ‘황당 개그’의 세계로 이끈다. “참 멋진 아버님이세요. 아키코 선생님이 부러워요.” “해바라기- 켄이치 전설”은 히가시무라 아키코의 자전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한 만큼, 스토리나 캐릭터가 모두 ‘자기의 이야기’나 ‘자기 주변의 인물’들을 조금씩 바꿔서 만들어낸 만화라고 인터뷰를 통해 밝히고 있는데, 먼저 작품의 주인공인 두 명의 켄이치 중 하나인 하야시 켄이치 과장은 여자 주인공인 아키코의 아버지이자 미나미텔레폰 큐슈지점에 근무하는 직장 상사이기도 하다. 업무능력 좋고, 인간관계 훌륭하고, 성격도 활달해서 모두에게 인기 많은 남자지만 결정적일 때는 ‘이기적인 한방 개그’를 터트려 모두를 ‘멘붕상태’에 빠지게 하는 무서운 남자이기도 하다. 이 만화의 전반부는 제멋대로인 아버지와 얽혀 자멸하고 마는 아키코의 처절한 직장생활을 다루는 것에 에피소드의 거의 대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또 한 명의 켄이치인 코로기 켄이치는 조경업체인 남국 그린 서비스에 근무하며 식물을 사랑하는 순수청년이다. 고등학교 때 엄청나게 주목받은 야구선수였으나 후배가 일으킨 사건으로 인해 갑자원에 출전하지 못했고, 야구를 그만두게 된 후 조경업체에 취직해 거래처인 미나미텔레폰 큐슈지점에 관엽식물을 관리하러 드나들다 아키코와 친해지기 시작한다. 우수에 찬 꽃미남 외모, 모델 뺨치는 큰 키에 준수한 몸매, 과묵하고 순수한 품성까지 말 그대로 ‘최고의 훈남’으로 등장하지만, 식물 외에는 세상물정을 몰라도 너무 모르고 눈치도 너무 없어서 인간관계를 수월하게 맺기가 쉽지 않은 스타일이다. 거기다가 어리숙하기까지 해서 주위사람들에게 자주 이용당하고 잘 속아 넘어가기까지 한다. 세상사나 타인의 삶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자신의 삶만이 확고한 전형적인 ‘마이웨이’타입인데, 이런 고지식한 켄이치가 아키코에게 이성으로서 호감을 갖게 되면서부터 심각한 문제들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나...말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대로 솔직하게, 지금 생각하는 걸, 진짜 트리 앞에서라면...” 이 만화의 초반부에는, 기상천외한 아버지를 비롯해 어지간한 개그맨들 뺨치는 직장 동료들에게 엮여버린 아키코의 좌충우돌 회사생활, 순수청년 켄이치와 아키코의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사랑인지 우정인지 모를 미묘한 관계와 그에 따른 갑갑하고 황당한 애정행각, 우연한 계기로 공모한 공모전을 통해 아키코가 만화가로 데뷔하게 되는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주인공인 아키코가 프로 만화가가 되기 위해 회사를 퇴직하고 정든 고향인 미야자키를 떠나 도쿄로 옮겨오면서부터 이 만화의 후반부가 시작되는데, 이때부터는 개그보다는 아키코와 켄이치의 원거리 러브스토리라든가, 아키코와 주변인물들이 프로 만화가라는 꿈을 향해 열심히 나아가는 이야기 같은, 정통적인 순정만화 스타일 쪽에 더 무게를 둔다. (물론 개그요소는 여전히 빛을 발하지만 무엇보다도 아버지 캐릭터의 등장횟수가 현저히 줄어들기 시작하면서부터 웃기기보다는 스토리의 완결에 주력하려는 느낌이 강하다) “아키코 선배와 켄이치 씨의 인생은 이미 길이 갈리고 말았다고요. 켄이치 씨는 앞으로도 쭉 미야자키에서 야자나무며 부겐빌리아를 돌볼 거고, 아키코 선배는 도쿄에서 만화를 그리겠죠. 이제 더 이상 두 사람의 길은 만나지 않아요.” 이 작품에는 정말 엄청난 개성을 자랑하는 조연들이 수두룩하게 등장한다. 가장 대표적인 캐릭터가 ‘혼자 놀기’의 달인이자 ‘뻔뻔함과 오지랖’의 최강자 사루와타리 부주임일 것이고, 사루와타리와 개그콤비를 이루는 최고의 파트너이자 ‘촌철살인의 대명사’인 날라리 출신의 에비하라가 그 뒤를 이을 것이다. (‘사루와타리와 에비하라 콤비’가 이 만화에서 차지하는 분량은 어쩌면 주인공인 아키코나 켄이치보다도 훨씬 더 많을지도 모른다) 이 최강의 개그 콤비이외에도 만화연구부의 ‘오타쿠 부부장’으로 시작해서 아키코의 어시스턴트를 거쳐 결국 프로 만화가의 꿈을 이루는 ‘칫솔’ 콘도, 9권부터 등장해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열렬한 삼국지 동인녀 세키(후에 콘도와 세키는 ‘후루카와 우나기’라는 필명으로 프로 만화가로 데뷔해 대박을 터트리게 된다) 등이 작품의 매력을 급증시키며 웃음과 재미를 책임지는 주요 조연들이라 하겠다. 이들 외에도 ‘허허실실’ 쿠로키라든가, 앞니가 녹아버린 ‘카니에’라든가, 최강의 악역이자 ‘얄밉지만 귀여운 악마’를 담당한 세츠코라든가 존재만으로도 웃음을 유발하는 훌륭한 캐릭터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다. “나중에 함께 살게 되면, 이걸, 마당에 심자.” “해바라기-켄이치 전설”은 히가시무라 아키코의 ‘개그 재능’이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으로 메인이 되는 아키코와 켄이치의 러브스토리도 훌륭한 편이다. 심심하다거나 우울하다고 느낄 때 꼭 한 번 읽어보길 권한다. 무척 재미있을 것이다.